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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55)화 (55/101)

55화 

일리아가 에나를 처음 만난 건 16년 전의 겨울이었다. 클리드의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 거리로 나온 일리아는 우연히 외진 골목 앞을 지나다 에나를 발견했다.

에나는 당시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입고 상처투성이인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일리아는 서둘러 골목으로 들어가 에나에게 치유 마법을 써 주었다.

- 이제 아프지 않지?

일리아의 물음에 에나는 눈물을 왈칵 쏟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안쓰럽던지. 일리아는 결국 레이븐을 설득해 에나를 저택까지 데리고 와 버렸다.

에나는 평생 그라니체 가문의 하녀로 살 테니 제발 버리지만 말아 달라고 울며 사정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일을 가르치고 자신의 전담 하녀로 삼은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분명히 감정에 솔직한 사람이었는데 어쩌다 이런 능구렁이로 자라게 된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아가씨.”

“응?”

“지금 클리드 님께서 그 남자를 심문하고 계세요.”

“오라버니가?”

* * *

어둑한 창고 안. 옅은 등불 아래로 두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바로 클리드와 게트릭이었다.

붉은 밧줄에 묶인 게트릭은 몇 번이나 탈출 시도를 감행했다. 그러나 일리아의 마법은 고작 기사에 불과한 그가 파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어금니 안쪽에 숨겨 두었던 독단(毒丹)을 삼키려고 했는데, 어느새 창고 안으로 들어온 클리드가 손짓 한 번으로 독단을 없애 버렸다.

파문당한 이후로 두려울 것 없이 살았던 게트릭은 처음으로 가슴이 서늘해졌다. 클리드의 기세는 그만큼 엄청났다. 마치 거대한 드래곤의 입 속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것처럼 온몸의 솜털이 쭈뼛 섰다.

“내가 널 찾아온 이유는 단 하나야.”

“글렌에 대한 일이라면…….”

“감히 내 동생을 건드려?”

게트릭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뭐?”

“목걸이가 자동으로 발동했다는 건 상당한 위험을 감지했다는 이야긴데…….”

클리드가 얼굴을 와락 구기며 게트릭을 훑었다.

“감히 너 따위가 그랬을 리는 없고.”

“대체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클리드는 꿇어앉아 있는 게트릭의 머리를 가볍게 붙잡았다.

“잠깐 확인 좀 해 보자.”

눈을 감자 게트릭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클리드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쓸데없는 기억을 전부 건너뛰자 마침내 검을 든 일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비장한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클리드는 그 장면을 무심코 세 번이나 돌려 봤다.

‘아차, 이게 아니지.’

클리드는 게트릭의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우락부락한 용병들 사이로 붉은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보였다.

‘저거군.’

클리드의 눈에는 보였다. 그의 체내에 잠들어 있는 검붉은 기운이. 지금까지 마계의 마물들이 어떻게 인간계로 넘어올 수 있었던 것인지 궁금했는데, 아무래도 봉인에 문제가 생긴 게 확실한 듯 보였다.

“확실히 둔해지긴 했군.”

클리드는 혀를 차며 게트릭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대, 대체 나한테 뭘 한 거야!”

“너 운 좋은 줄 알아.”

“뭐라고?”

“하마터면 마물한테 찢겨 죽을 뻔했으니까.”

무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클리드는 미련 없이 창고를 나섰다. 알아낼 것은 다 알아냈다. 이제는 대책을 세워야 할 때였다.

‘이사벨라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클리드의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 * *

일리아가 급하게 창고로 향했지만 클리드는 이미 저택을 벗어난 후였다. 괜히 불안해진 그녀는 굳게 닫힌 창고 문을 바라보다 걸음을 돌렸다.

“아무래도 뭔가 있는 것 같아. 하루라도 빨리 보고해야겠어.”

두어 시간이 지나고, 카일루스로부터 방문을 허락받은 일리아는 서둘러 황성으로 향했다.

마차에서 내려 별궁으로 들어서니 일에 열중하던 카일루스의 보좌관들이 반색을 하며 일리아에게 뛰어왔다. 그들은 두 국가의 감시라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음에도 신수가 훤했다.

“그라니체 님!”

“다들 상태가 좋아 보이네요?”

“다 그라니체 님 덕분입니다.”

“제 덕분이라고요?”

이카루트라는 보좌관이 환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얼마 전부터 카일루스의 기분이 하늘을 뚫을 지경이라 보고서에 실수가 있어도 혼나지 않고 있다고 말이다. 덕분에 다들 마음이 편해져 일의 능률도 대폭 상승했다고 했다. 일리아는 얼떨떨하게 웃으며 ‘축하해요.’ 하고 대답했다.

“아, 그러고 보니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얼른 들어가십시오.”

“그럴게요. 그… 들어오시면 안 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헛기침을 한 일리아는 노크를 한 후 집무실 문을 열었다.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은 카일루스는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사각거리는 깃펜 소리마저 악단의 선율처럼 아름답게만 들렸다.

“왔어?”

멍하니 카일루스를 바라보던 일리아는 그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많이 바빠요?”

“아니. 괜찮아.”

카일루스는 눈가를 슥슥 문지르며 소파에 앉았다.

“파견은 잘 다녀왔어?”

“그럼요. 제가 누군데요.”

어깨를 으쓱거린 일리아가 카일루스에게 보고서와 영상석을 내밀었다.

“사실 이것 때문에 찾아온 거예요.”

“글렌에서 뭐라도 찾은 거야?”

“카일루스도 알고 있었네요?”

“당연하지.”

“그게… 뭔가를 찾긴 찾았는데…….”

“일단 가자.”

일리아와 카일루스는 비밀 통로를 지나 황태자궁에 다다랐다. 침실을 나서니 한 시종이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드디어 왔군.”

테오도르는 그들에게 자리를 권하며 대뜸 본론부터 꺼냈다.

“글렌은 어땠지?”

“처참했습니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요.”

“용병들은?”

“다 붙잡았습니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일리아는 보고서를 탁자에 내려놓고 영상석을 발동시켰다. 짙푸른 수정이 밝게 빛나며 글렌에서 있었던 일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다.

영주성에서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태연하던 테오도르는 마계의 마물이 마법사의 몸을 가르고 나타나자 깊이 탄식했다. 그 장면은 가히 충격 그 자체였다.

마물이 일리아에게 덤벼드는 것과 동시에 영상은 끝이 났다. 아무래도 목걸이가 일으킨 마력 파동 때문에 녹화가 꺼진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더 엄청난 일이 있었군.”

“일단 글렌으로 사람부터 보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지. 저 게트릭 로한슨이라는 자는?”

“현재 저택에 구금 중입니다.”

테오도르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글렌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공론화하는 건 의외로 간단했다. 그저 대회의에서 영상석을 공개하기만 하면 된다. 영상석은 마정석에 내포되어 있는 마력으로 작동하는 아티팩트였기에 아무리 시전자가 마법사라고 한들 조작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이 영상석만 있으면 글렌의 상황 정도는 손쉽게 수면 위로 끌어 올릴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증거의 입수 경로인데.’

테오도르의 직속 부하도 아닌 일리아가 단장의 허락도 없이 그에게 직접 보고를 올리고 증거를 전달하는 것은 명백한 하극상이었다. 파견에 관한 보고서는 소속 부대의 단장을 거쳐서 황실에 올라가는 게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즉, 테오도르가 직접 증거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헤이스팅스 가문의 도움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

“아무래도 헤이스팅스 가문을 포섭해야겠어.”

“안 넘어올 거야.”

“노력해 봐야지.”

현 헤이스팅스 후작인 로웰 헤이스팅스는 마치 산들바람 같은 사람이었다. 바이에드가 시키는 일은 뭐든지 하지만 그뿐이었다. 정치에 관심도 없고 욕심도 없으며 그저 흘러가는 대로 유유히 사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그를 분쟁의 소용돌이로 끌어들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일단 단장님과 먼저 얘기해 보겠습니다.”

“괜찮겠나?”

“맡겨 주십시오. 글렌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내겠습니다.”

“좋아. 그럼 그대가 가져오는 결과에 따라 움직일 방향을 정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보고서와 영상석은 다시 일리아의 손에 넘어왔다. 이것을 이용해서 오스카를 설득하는 것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었다.

테오도르와 짧은 인사를 나눈 일리아는 다시 카일루스의 집무실로 돌아왔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벌써?”

“할 일이 생겼잖아요. 보고서부터 새로 작성해야 하는걸요.”

카일루스는 소파에 앉아 일리아를 올려다봤다.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일 얘기만 하고 헤어지긴 아쉽잖아.”

마치 투정을 부리는 듯한 말투에 일리아는 순간 심장이 멎을 뻔했다.

‘귀, 귀여워!’

사랑하면 바보가 된다는 게 맞는 말인 듯했다. 그의 모든 행동이 귀엽고 예뻐 보이는 것을 보면. 일리아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카일루스의 옆에 앉았다.

“할 수 없죠. 조금 있다 갈게요.”

“잘 생각했어.”

“크흠, 그동안 잘 지냈어요?”

“물론이지. 그대는?”

“저도 잘……. 아, 전에 주정 부린 건 죄송했어요.”

“괜찮아. 이전에 비하면 애교 수준이었으니까.”

일리아는 무심코 머리를 짚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술을 마셨을 때는 구토를, 그다음에는 울며불며 하소연을 하지 않았던가. 이제는 정말 술을 끓어야 할 때라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그대가 파견 가 있는 동안 결정된 게 있어.”

“뭔데요?”

“보름 후에 사냥 대회가 열릴 거야.”

“사냥 대회라면 설마…….”

“맞아. 과시하시려는 거지.”

바이에드는 귀족들이 연일 피델리오에 관해 떠드는 것을 내심 못마땅해했다. 그래서 사냥 대회를 계획하여 아제로스 제국의 전력을 과시하기로 한 것이다. 피델리오 플레타가 아무리 유명한 마법사라고 한들 기만 꺾어 놓으면 그저 평범한 사절 중 한 명일 뿐이었다. 바이에드는 사냥 대회에 제국의 무신들을 대거 참가시켜 그가 실력을 발휘하기는커녕 모두가 보는 앞에서 창피를 당하기를 바랐다.

“당연히 그라니체 가문도 참가해야 할 거야.”

“그렇겠죠.”

“살살 해. 다치지 말고.”

“카일루스야말로요.”

카일루스가 일리아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사르르 웃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태도가 야스러웠다.

일리아는 드레스 자락을 꾹 움켜쥐었다. 카일루스의 이런 태도는 이제 막 감정의 싹을 틔운 그녀에게는 참기 힘든 유혹이었다. 결국 일리아는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저, 저 이만 가 볼게요!”

“벌써 가? 데려다줄까?”

“네! 아니요! 됐어요!”

일리아는 발그레 물든 볼을 문지르며 후다닥 카일루스의 집무실을 나섰다. 집무실 문이 닫히기 전에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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