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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54)화 (54/101)

54화 

“당황하는 사이에 확 붙잡는 거지. 나름 괜찮지 않아?”

가볍게 손을 털어 낸 일리아는 레널드를 구속하고 있는 수갑을 부수고 그에게 치유 마법을 시전했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레널드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부단장님?”

“괜찮아?”

“으윽, 괜찮습니다. 치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널드가 손을 툭툭 털며 몸을 일으키자 바닥에 엎어져 있던 마법사가 비명을 빽 내질렀다. 일리아는 마법사의 경악 어린 외침을 뒤로한 채 게트릭의 앞에 섰다.

“일단 푹 자고 있어. 황성에서 보자고.”

“자, 잠깐! 너 대체……!”

일리아는 방긋 웃으며 게트릭의 목덜미를 쳤다. 그의 얼굴이 바닥에 처박히는 것과 동시에 산산이 부서진 창문 사이로 붉은 햇살이 비쳐 들었다.

슬슬 동이 트고 있었다. 지금 출발하면 이틀 후 오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일단 게트릭 로한슨하고 마법사만 데려가자. 다른 놈들은 여기 대충 묶어 둬.”

“알겠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일단락되려던 찰나였다. 붉은 밧줄에 묶여 있던 마법사가 갑자기 거품을 물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거센 마력의 파동에 밧줄마저 끊어졌다. 마법사는 팔을 비틀어 가며 몸부림을 쳤고, 종국에는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움직임을 멈췄다.

“이게 무슨…….”

일리아가 한 발 가까이 다가서자 마법사의 몸이 쩍 갈라지면서 검은 마물이 스멀스멀 기어 나왔다. 진득한 피 웅덩이와 처참하게 갈라진 시신은 마치 테멜 왕국군의 진지에서 봤던 지옥도를 떠올리게 했다.

‘설마…….’

일리아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날 별동대를 기습했던 수만의 마물이 어디서 나타난 것이었는지를.

“크르르릉…….”

마물은 붉은 피를 뚝뚝 흘리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피를 갈구하는 마물의 울음소리가 가슴 한편을 서늘하게 했다.

“저, 저게 대체 뭡니까?”

“…우리가 파견 나온 목적이지.”

“저게 마계의 마물이라는 겁니까?”

“그래.”

마법사의 몸을 가르고 나타난 마물은 알 수 없는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미 전장에서 마물과 싸워 본 적이 있던 레널드 역시 마른침을 삼킬 정도였다.

“내가 상대하고 있을 테니까 일단 이 사람들부터 데리고 나가.”

“하지만…….”

“괜찮으니까 얼른.”

“알겠습니다!”

마물은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일리아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이빨이 그녀를 씹어 삼킬 듯이 사방으로 벌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일리아의 목에 걸려 있던 핏빛 보석이 밝은 빛을 터뜨리며 순식간에 마물을 밀어냈다. 강한 마력 폭풍에 휘말린 마물은 소름 끼치는 괴성을 내질렀고, 곧 검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마물의 마력에 반응한 건가?’

일리아는 잠잠해진 목걸이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레널드 일행은 목걸이의 마법에 휘말리지 않은 것인지 멀쩡해 보였다.

“바, 방금 그건 뭡니까, 부단장님?”

“으음, 설명하자면 복잡해. 일단 수도로 돌아가자. 퍼렐, 마부 좀 불러와.”

“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일리아는 주머니 속에서 영상석을 꺼냈다. 언제 마력이 고갈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짙푸른 수정은 빛을 잃은 상태였다.

“마물이 나타나는 장면은 찍혀 있었으면 좋겠는데.”

일리아는 남은 용병들을 한 대씩 때려 재운 후 성을 나섰다.

성문 어귀에 다다르자 어느새 마차를 부른 퍼렐이 부리나케 뛰어왔다. 그의 옆에는 글렌에 대한 정보를 줬던 넝마의 남자도 함께였다. 일리아는 남자를 손으로 척 가리켰다.

“너.”

“네, 네?”

“당분간 네가 이곳의 책임자야. 글렌의 주민들과 영주성을 지키도록.”

“네?!”

“서쪽 성에 용병들을 묶어 놨으니 황실에서 사람이 올 때까지만 감시해 줘.”

남자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어떻게 제가 그런 중책을…….”

“당분간만 해 주면 돼. 음, 그러니까… 이름이 뭐라고 했지?”

“로버트 발터입니다.”

“뭐? 발터?”

발터는 몇 해 전에 몰락한 글렌의 전 영주 가문이었다. 발터 자작이 황실의 공금을 횡령하여 처형당했다고 들었는데, 나중에 그게 누명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한창 떠들썩했던 기억이 난다.

어쩐지 처음부터 바락바락 대드는 게 범상치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설마 몰락 귀족 출신이었을 줄이야.

“분명 유족은 없다고 들은 것 같은데.”

“…유모의 도움으로 겨우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글렌을 떠나지 못하는 처지지만요.”

“딱 좋네. 로버트, 당분간 잘 부탁해.”

“하지만…….”

“이건 명령이야. 네게 선택권은 없어.”

일리아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주에 한 번씩 네 일거수일투족과 글렌의 상황을 보고하도록 해. 그라니체 가문으로 보내면 될 거야.”

“그, 그, 그라니체 가문이요?”

이미 몰락하여 귀족으로서의 신분을 상실한 로버트지만 한때는 역사를 공부했던 입장으로서 그라니체 가문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드래곤의 후손, 아제로스 제국 최고의 마법사 가문, 황실의 방패 등. 그들은 그야말로 현존하는 전설이었다. 평생 글렌에서만 살아온 로버트로서는 가슴 떨리는 만남이 아닐 수 없었다.

“잘 해내리라 믿어, 로버트.”

“…기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좋아. 그럼 우리도 일단 돌아가자.”

일리아는 을씨년스러운 영주성을 뒤로한 채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가 출발하기 직전, 어디선가 하얀 물체가 튀어나와 마차 바닥에 찰싹 달라붙었지만 그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수도로 돌아온 일리아는 게트릭을 일단 그라니체 저택에 구금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황성에 데리고 갔다가는 바이에드가 그를 죽여 증거를 인멸하려고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노이트 사절단의 일정이 아직도 한 달 가까이 남아 있었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그들의 시선을 끌 우려도 있었다.

‘어떻게 한다…….’

일리아는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도 글렌이 안전하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수면 위로 끌어 올릴 필요가 있었다.

가장 빠른 방법은 소문을 이용하는 것이었지만, 그러기에는 프노이트 사절단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중대한 사안을 언제까지고 미루어 둘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전하와 상의하고 움직여야 할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카일루스와 만나야 했다. 그 사실이 일리아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황태자궁에 몰래 들어가려면 반드시 카일루스의 집무실에 있는 비밀 통로를 이용해야만 했다. 지금은 그럭저럭 괜찮아졌다지만, 막상 카일루스를 마주하면 또다시 부끄러워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보고 싶다…….”

무심코 중얼거린 일리아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일리아의 중얼거림에 에나가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보고 싶다고요.”

“내가 그랬어?”

“네. 제가 확실히 들었어요.”

일리아는 당황했다. 카일루스를 생각하니 갑자기 심장이 쿵쿵거리며 거세게 요동쳤기 때문이다. 에스테반 저택에서 지낼 때도 이런 적은 단연코 없었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일리아는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자신이 카일루스에게 마음을 가지게 된 계기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그들은 파티에서 춤을 추기도 하고, 빌른의 축제를 즐기기도 하고, 마정석 채석장을 내려다보며 이런저런 속마음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함께 케이크를 먹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매일같이 시간을 보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수많은 기억의 끝으로, 언젠가 카일루스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 그냥 좋아하는 사람과 일상을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거니까요.

아무리 황제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 가짜 연애를 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 순간들만큼은 모두 진심이었다. 적어도 일리아는 그랬다.

감정을 깨닫고 나니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럼 그동안 카일루스의 웃는 모습에 설레고, 따뜻한 숨결에 설레고, 매혹적인 눈빛에 설렜던 게 다…….

“얼굴이 취향이어서가 아니었어.”

일리아의 중얼거림에 에나가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로베르트 님 때는 대체 어떻게 아셨던 거예요?”

“몰라. 기억 안 나.”

사실은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일리아가 에렉을 만난 건 여섯 번째 연애에 실패하고 상심해 있을 무렵이었다. 에렉은 분수대 앞에 서서 연거푸 한숨을 내쉬는 일리아에게 손수건을 건네며 이렇게 말했다.

- 분수대의 물도 영애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나 봅니다.

그때는 ‘이게 무슨 개소리야?’ 하고 생각했었다.

일리아가 무심코 손수건을 받아 들자 에렉은 ‘다음에 만나면 돌려주세요, 영애.’ 하고 웃으며 자리를 떴다. 아마 그 미소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 같다. 그 이후로도 두 사람은 몇 번이나 우연히 마주쳤고, 오랜 대화 끝에 자연스럽게 사귀게 되었다.

일리아는 당시에도 로맨스 소설에 심취한 상태였기에 에렉과의 로맨틱한 만남을 그저 운명이라고만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전부 의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이 넓은 아로스에서 같은 사람과 우연히 여러 번 마주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도 참 멍청했지.’

일리아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어 에렉과의 기억을 털어 냈다. 카일루스의 잘생긴 얼굴이 금세 일리아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에나, 나 아무래도 카일루스를 좋아하는 것 같아.”

카일루스를 좋아한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니 항상 오락가락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차분해졌다. 마치 텅 비어 있던 꽃병에 예쁜 꽃을 한아름 장식해 놓은 것처럼 묘한 충족감이 느껴졌다.

“이제 아셨어요?”

“에나는 알고 있었어?”

“그럼요.”

에나는 오랜 시간 동안 일리아를 지켜봐 왔다. 그녀의 감정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정도는 눈 감고도 맞힐 수 있었다.

일리아는 무뚝뚝한 에나의 얼굴을 괜히 노려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에나, 여기에는 아주 큰 문제가 하나 있어.”

“어떤 문제요?”

“내 짝사랑이라는 거야.”

카일루스는 다정하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만약 일리아가 진심을 담아 고백한다면 마음 약한 그는 쉽게 거절하지 못할 터였다. 아니면 반대로 ‘귀염둥이라고 오냐오냐했더니 감히 내게 그런 마음을 품다니!’ 하고 질색을 하며 가짜 연인 관계마저 끊어 낼지도 모를 일이고. 어느 쪽이든 썩 만족스러운 결과는 아니었다.

“하아, 짝사랑은 어렵네.”

“딱히 그렇지도 않아요.”

“혹시 에나도 짝사랑 해 봤어?”

일리아의 물음에 에나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지금도 하고 있는걸요.”

“뭐? 누구?”

“아가씨요. 아가씨께서 저를 거두어 주셨을 때부터 아가씨를 짝사랑하는 중이랍니다.”

“…그런 무덤덤한 얼굴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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