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다른 단원들은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일리아만은 알았다. 이 흔적들은 모두 바이에드가 세금을 걷기 위해 고의로 마수를 푼 결과였다. 글렌은 바이에드의 최측근인 듀크 그레고리의 영지인 데다가 수도와도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일을 꾸미기에는 최적의 장소라는 것.
일리아는 부서진 건물 잔해를 살피며 이를 갈았다. 부서진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건물이었다. 즉, 최근까지도 횡포가 있었다는 소리다.
“아무래도 하베룬에 가기 전에 여기부터 조사하는 게 좋겠어.”
“저도 동감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던 일리아는 길가에 죽은 듯이 앉아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아까부터 이쪽을 힐끔거리는 것이, 할 말이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저기요.”
“…….”
“이봐.”
남자는 대답 대신 한 손을 척 내밀었다. 돈을 달라는 의미인 듯했다. 일리아가 주머니에서 은화를 꺼내어 손바닥에 내려놓자 그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은화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
“아니, 저 자식이!”
“괜찮아, 퍼렐.”
퍼렐을 만류한 일리아가 남자에게 한 발 더 다가서며 물었다.
“부족해서 그래?”
“당연하지. 이걸 누구 코에 붙여? 도시를 뜨려면 적어도 금화 정도는 있어야지.”
“도시를 뜬다고?”
“벌써 많은 사람이 여길 떴어. 글렌은 높으신 분들께 버림받은 도시니까.”
남자는 진흙으로 잔뜩 떡 진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눈을 부릅뜨며 중얼거렸다.
“처, 천사님?”
레널드가 뒤에서 ‘풉, 천사라고?’ 하고 작게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널드를 휙 노려본 일리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아직도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난 황실에서 나왔어. 그쪽은…….”
“화, 황실이라고?”
황실이라는 말에 남자의 눈매가 눈에 띄게 사나워졌다. 그는 진흙을 한 움큼이나 움켜쥐더니 일리아를 향해 냅다 집어 던졌다. 레널드가 다급하게 일리아의 앞을 막아서면서 오물 섞인 진흙이 그의 옷에 철퍽 떨어졌다.
“감히 이분이 누군 줄 알고!”
“왜 이렇게 적대감을 보이는 거지? 난 단지 도와주려는 것뿐이야.”
“하, 돕는다고? 글렌을? 황실이?”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일리아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부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돕겠다고?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남자는 죽는 게 두렵지도 않은 것인지 황실을 향해 거침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그의 욕지거리를 듣고 있자니 문득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일리아의 머릿속을 스쳤다.
- 마수를 사로잡지 못했을 때는 용병을 고용해 습격을 명하기도 하셨지.
‘그 용병들이 현재 글렌에 있는 거구나.’
일리아는 테오도르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파견지를 바꾼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현재 글렌에 그들이 머무르고 있으니 붙잡아 오라는 의미일 터였다.
그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듀크와의 연결 고리를 알아낼 수 있다면 더 좋았다. 바이에드는 대외적인 평판에 예민했다. 만약 듀크가 글렌의 상황을 눈감아 주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면 그 역시 무작정 듀크를 감싸지는 못할 것이다.
“이름이 뭐야?”
“그쪽한테 가르쳐 줄 이름은 없다!”
“자꾸 그럴 거야?”
“그럴 거다! 황실의 개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할 거라고!”
남자는 계속해서 비협조적으로 나왔다. 참다못한 일리아가 레널드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대답만 잘하게 해.”
“맡겨 주십시오!”
원래 폭력은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때로는 주먹이 효과적일 때도 있는 법이었다.
“따라와.”
레널드는 허우적거리는 남자를 질질 끌고 으슥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사라지고 얼마 있지 않아 뜨거운 열기와 함께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는 팔짱을 끼고 느긋하게 도시를 둘러봤다. 레널드가 일으킨 소란 탓인지 집 안에 숨어 있던 사람들이 창문 틈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다 됐습니다, 부단장님.”
십여 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레널드가 다시 남자를 질질 끌고 나왔다. 그는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모습이었지만 무서운 무언가를 본 사람처럼 사색이 되어 있었다.
“죄, 죄송했습니다. 제가 그…….”
“마법사단 부단장님.”
“마법사단 부단장님을 몰라보고!”
“그건 됐고, 그냥 묻는 말에나 대답해.”
“뭐든 물어보십시오! 성심껏 대답하겠습니다!”
일리아는 레널드를 포함한 단원들에게 도시의 조사를 맡기고 남자와 함께 허름한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여관 주인은 글렌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리아의 모습에 몸을 잔뜩 움츠리며 차를 내왔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혹시 용병한테 습격받은 거야?”
“…그렇습니다.”
목을 가다듬은 남자는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몇 해 전에 마수가 출몰해 황실에 신고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기사와 함께 용병단이 도착했죠. 그런데 마수를 토벌하러 온 줄 알았던 용병들이 도리어 도시를 부수더군요. 심지어 또다시 신고하면 죽이겠다며 협박까지 했습니다.”
일리아는 분통을 터뜨리는 남자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랬군. 지금 글렌에 사람이 얼마나 남아 있지?”
“반 정도는 남아 있습니다. 세금으로 뜯기고, 용병들한테 뜯기고……. 지금 이곳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다 떠날 돈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용병들이 언제 언제 나타났는지 기억해?”
“작년에는 대략 두세 달 주기로 나타났습니다만, 요새는 하루가 다르게 거리를 쏘다닙니다.”
남자는 허리를 숙이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이건 제 추측입니다만, 아무래도 영주도 한패인 것 같습니다.”
남자는 글렌을 지배하는 기사와 용병들이 영주성에 살고 있다고 전했다. 작위도 없는 시정잡배들이 영주성을 점거하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던가.
“아무래도 영주성에 가 봐야겠어.”
“크, 큰일 날 소리 하지 마십시오! 거기 사는 용병들만 수십입니다! 고작 네 명이서 뭘 어쩌시려는 겁니까!”
“걱정은 됐으니까 얌전히 기다리기나 해.”
남자에게 쏘아붙인 일리아는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여관 주인이 이따금씩 불안해하는 얼굴로 그녀를 힐끔거렸다. 괜히 불편해진 일리아는 풀내 나는 차를 한 번에 들이켰다.
“그나저나 얘네는 왜 이렇게 안 오는…….”
순간,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일리아는 이를 악물며 탁자를 움켜쥐었다. 자꾸만 눈이 감기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아무래도 여관 주인이 차에 독을 탄 모양이었다.
‘방심했네.’
글렌은 오랜 시간 동안 용병의 지배를 받아 온 곳이었다. 당연히 외부인을 경계하라는 지시 또한 받았을 것이다. 일리아는 바이에드의 악행을 조사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팔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들의 두려움을 놓치고 말았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내 불찰이야.’
일리아는 체내의 마력을 순환시키며 주머니 안쪽에 있는 영상석을 발동시켰다. 그리고 부디 용병들이 아티팩트에 무지하기만을 바랐다.
“지금 이게 뭐 하는…….”
“하, 하지만 게트릭 님이…….”
“게트릭 님은 무슨! 이분들은…….”
몽롱한 가운데 귓가로 남자와 여관 주인이 언쟁을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 어둠을 마주하다 】
톡, 톡.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먹먹한 정신을 깨웠다. 일리아는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로 녹슨 철창과 어렴풋한 달빛이 보였다.
‘감옥인가?’
일리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한 데다가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몸을 움직이기 위해 손을 뻗으니 철그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일리아는 가만히 손목을 들어 올렸다. 푸른 제복 소매 위로 투박한 수갑이 채워져 있는 것이 보였다. 복잡한 수식이 음각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마력 봉인용 구속구가 틀림없었다.
적진에서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큰 문제였지만, 일리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조악한 수갑은 일리아의 마력을 완벽하게 차단하지 못했다. 약기운만 날려 버리면 무리 없이 부술 수 있을 듯했다.
문제는 단원들의 생사 여부였다. 일리아가 여관 주인에 의해 감옥에 갇혔듯, 다른 단원들 또한 영지민의 기습을 받았을 확률이 높았다. 그녀처럼 감옥에 갇힌 거라면 차라리 다행이었지만, 혹시라도 나쁜 짓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일리아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일리아는 차가운 돌벽에 기대어 앉으며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다행히도 주머니 안쪽에 넣어 두었던 영상석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영상석을 더욱 깊이 갈무리한 일리아는 철창 근처를 대충 훑었다. 어둑한 감옥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고요했다.
‘대체 무슨 약을 탄 거야? 아직도 머리가 띵하네.’
일리아는 심호흡을 하며 수갑에 마력을 집중했다. 음각되어 있는 수식 때문에 자꾸만 흐름이 틀어졌지만 끊임없이 시도한 끝에 수갑에 작은 실금을 낼 수 있었다.
곧 속이 뒤틀릴 정도로 요동치던 마력이 수갑을 부수고 철창 밖까지 거센 파동을 일으켰다. 고요하던 감옥에 푸른 마력 폭풍이 휘몰아쳤다.
‘두 번은 못 하겠네.’
일리아는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닦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때였다.
“으윽…….”
바로 옆 철창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퍼렐?”
“윽, 부단장님?”
“카야는?”
“저 여기 있어요!”
카야가 철창을 흔들었다. 철걱거리는 소리가 감옥 전체를 울렸다. 일리아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으나 다행히 누가 다가오는 기색은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일리아는 손을 뻗어 낡은 자물쇠를 움켜쥐었다. 손에 힘을 주자 자물쇠가 파삭하는 소리를 내며 처참하게 부서졌다.
“기다려. 곧 꺼내 줄게.”
일리아는 철창의 자물쇠를 부수고 그들의 손목에 있는 구속구 또한 풀어 주었다. 어쩐지 퍼렐의 존경심 어린 눈빛이 더욱 강해진 듯했다.
“마력 봉인용 구속구였습니다. 대체 어떻게 푸신 겁니까?”
“그냥 힘으로. 그나저나 레널드는?”
“그놈들이 끌고 갔습니다. 사실… 레널드가 부단장님 배지를 가져갔거든요.”
“배지?”
그러고 보니 부단장을 상징하는 금속 배지가 없어져 있었다. 일리아가 용병들에게 해코지당할 것을 우려해 스스로 부단장 행세를 한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레널드를 리더라고 착각하고 있으니 정보를 얻기 위해 고문을 행할지도 몰랐다. 물론 뚝심 있는 레널드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고, 그것은 곧 그의 신변에 위험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