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잠시 고민하던 일리아는 초대장을 다시 에나에게 건네주었다.
“거절해.”
“황성에서 온 건데 괜찮으시겠어요?”
“응. 그러는 편이 나아.”
“알겠습니다.”
에나가 방에서 나가자 일리아는 다시금 침대에 엎어졌다. 멍하니 누워 있으니 그런 거지 같은 말을 듣고도 예쁘게 웃던 카일루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창피하고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웃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못내 기쁘기도 했다.
‘미친 게 분명해.’
일리아는 붉게 달아오른 볼을 문지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얼마 후, 사절단의 내방으로 인해 미뤄졌던 마물 수색을 시작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일리아는 오스카가 전해 준 수색조 명단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일리아 그라니체. 하베룬.]
“왜 하필 하베룬이야?”
하베룬은 제국 남서부에 있는 중소 도시로, 산지가 많고 길이 험해 모두가 꺼리는 파견지 중 하나였다. 게다가 멀기는 또 어찌나 먼지, 부지런히 달려도 꼬박 이틀이 넘게 걸릴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 바이에드는 프노이트 사절단에게 아제로스 제국의 현 상황을 들켜서는 안 된다는 명목으로 모든 지원을 대폭 축소했다. 덕분에 일리아를 비롯한 단원들은 파견지까지 사비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사설 마차를 타고 가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하베룬의 영주가 란돌프 플로라 후작이라는 것이었다. 크리스틴에게 잘만 이야기한다면 영주성에서 편하게 숙식을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하아, 출발하기 전까지 푹 쉬어 둬야지.”
시간을 확인한 일리아는 책상 위를 대충 정리하고 부단장실을 나섰다.
“그라니체 영애.”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느긋하게 걷고 있는데, 정문 앞에 서 있던 누군가가 일리아를 불러 세웠다. 바로 피델리오 플레타였다. 일리아는 무심코 걸음을 멈췄다.
“플레타 백작님.”
일리아는 불과 며칠 전에 피델리오의 초대를 거절한 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예고도 없이 마주하니 껄끄럽기 그지없었다.
그런 일리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델리오는 밝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좋은 밤입니다.”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세요?”
“지나가다 우연히 들렀습니다. 이렇게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군요.”
거짓말.
프노이트 사절단이 머무르는 아제르궁과 마법사단 본부는 같은 내성에 있었지만 끝과 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리가 있었다. 게다가 길목에서 그리 멀지 않은 기사단 본부와 달리 마법사단 본부는 상당히 외진 곳에 있었기에 우연히 지나갈 확률은 지극히 낮았다.
일리아는 의례적으로 웃으며 ‘그렇네요.’ 하고 대답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잠시 시간 좀 내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요?”
“잠깐이면 됩니다.”
거절하려던 일리아는 문득 피델리오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해졌다. 그는 환영 파티에서도 첫눈에 반했다는 입에 발린 말로 자신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 않았던가.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따라오세요.”
피델리오를 부단장실로 데려온 일리아는 자리를 권하다 아차 싶었다. 부단장실에서는 손님을 맞이할 일이 적다 보니 손님용 찻잔을 따로 구비해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제르궁으로 가자고 할 걸 그랬네.’
일리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대접해 드릴 게 없네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약속한 만남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실 말씀이 뭐죠?”
피델리오는 부드럽게 웃으며 일리아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전과 같습니다. 저는 그라니체 영애에 관해 조금 더 알고 싶습니다.”
“또 첫눈에 반하셨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시려는 건가요?”
“그게 왜 말이 안 됩니까? 사실인 것을요.”
피델리오는 양손을 맞잡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렸을 때부터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란 피델리오는 최고의 마법사가 되기 위해 엄격한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혹독한 훈련 속에서 어린 피델리오에게 가장 큰 위안을 준 것은 바로 아제로스 제국의 건국 신화 속에 등장하는 ‘드래곤’이었다. 신이 빚은 마법 생물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마법에 통달한 드래곤은 피델리오에게 있어 꿈과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피델리오는 하루에도 몇 번씩 드래곤의 웅장한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며 지친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피델리오는 아제로스 제국에 드래곤의 피를 이은 가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 그라니체 가문의 마법사를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그때 다짜고짜 인사부터 드려서 죄송했습니다. 환영 파티가 열리는 날까지 기다릴 수 없었거든요. 줄곧 기대했던 순간이었으니까요.”
“괜찮아요. 저도 마법사로서 백작님이 궁금했던 건 사실이니까요.”
“듣기 좋은 말이군요. 하지만 서둘러 인사를 드렸던 건 그라니체 영애가 드래곤의 후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피델리오가 녹음이 짙게 깔린 눈동자를 한껏 휘어뜨렸다.
“첫눈에 반했거든요.”
“하지만 저는…….”
“네. 연인이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제국에 머무르는 동안만큼이라도 기회를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각하께 실례를 범할 수는 없어요.”
일리아가 단호하게 나오자 피델리오는 결국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정보를 하나씩 드리도록 하죠.”
“정보요?”
“네. 저와 프노이트 왕국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신 것 아닙니까?”
“그건…….”
“만나 주실 때마다 하나씩 알려 드리겠습니다. 어떻습니까?”
현재 카일루스와 테오도르는 피델리오를 비롯한 프노이트 사절단을 의심하면서도 섣불리 뒤를 캐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눈치채기라도 했다가는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알아서 불어 준다니, 솔직히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일리아는 피델리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 않았다.
“백작님께서 말씀하시는 게 진실인지 어떻게 알죠?”
“설마 제가 첫눈에 반한 영애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건 모르는 일이니까요.”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만, 제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고 판단되면 더는 만나 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렇게까지 하시는 거예요?”
“좋아하니까요. 본국에 돌아가기 전까지만이라도 최선을 다해 보고 싶거든요.”
“…일단은 생각해 보겠습니다.”
“부디 긍정적인 답변을 기대하도록 하죠.”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일리아는 고심 끝에 피델리오의 제안을 거절했다. 카일루스에게 따로 상의는 하지 않았다.
카일루스는 현재 바이에드의 명령에 따라 프노이트 왕국과 테멜 왕국의 움직임을 밤낮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신경 쓸 일이 많을 텐데 고작 이런 사소한 문제로 스트레스를 더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불과 얼마 전에 술에 취해 헛소리를 지껄인 참이 아니던가. 이제 와서 흑역사가 하나 더 추가된다고 한들 달라질 것은 없겠지만, 그래도 창피하고 부끄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오늘부터 파견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달가울 정도로 말이다.
“근데 파견지가 왜 바뀐 거지?”
오늘 아침, 황실에서 영상석과 함께 공문이 내려왔다. 황태자의 직인이 찍힌 공문에는 일리아의 파견지를 하베룬에서 글렌으로 변경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낯익은 이름인데.”
곰곰이 기억을 뒤지던 일리아는 탄성을 내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글렌은 과거에 테오도르가 바이에드의 횡포를 확인한 지역이라고 말해 주었던 도시 중 하나였다. 아무래도 더는 두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복잡한 얼굴로 빳빳한 종이를 내려다봤다. 오스카가 아닌, 자신에게 직접 공문을 전달했다는 것은 파견지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함구하라는 의미리라.
‘거짓말은 소질 없는데…….’
채비를 마친 일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부단장실을 나섰다. 황성을 나와 광장 어귀로 들어서니 푸른 제복을 입은 단원들이 보였다. 왼쪽부터 레널드 메이헴, 퍼렐 램지, 그리고 카야 아실트였다.
실전 훈련 첫날 일리아와 대련을 했던 퍼렐은 요 몇 달 사이에 몰라보게 달라졌다. 그러니까, 몸이 성장했다는 것이다. 키도 한 뼘이나 더 커지고 근육 또한 세 배 이상 부풀어 일견 기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날의 대련이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실전이었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상황이 아니던가. 그 경험이 퍼렐을 완전히 변화시킨 듯했다.
“다들 준비된 거지?”
“네!”
“그럼 출발하자.”
일리아는 단원들이 마차에 올라탄 것을 확인하곤 마부에게 넌지시 말했다.
“글렌으로 가요.”
“네? 하지만 어제는 분명 하베룬으로 가신다고…….”
“황명이에요. 물론 이유는 기밀이니 마차에 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내색하면 안 돼요.”
“아, 알겠습니다!”
일리아는 숨을 깊게 내쉬며 덜컹이는 마차에 올라탔다. 오랜만에 거짓말을 했더니 가슴이 쿵쿵거리며 식은땀이 났다.
‘괜찮겠지, 이거.’
‘전하만 믿을게요.’ 하고 중얼거린 일리아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 * *
“아이고! 제가 길을 잘못 들었군요! 꼬박 이틀을 마차에서 보내셨으니 오늘은 여기서 푹 쉬시지요! 내일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마부는 일리아의 부탁대로 비밀을 지켜 주었다. 되도 않는 발 연기를 펼치는 바람에 일리아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긴 했지만.
“하는 수 없이 오늘은 여기서 묵어야겠네.”
일리아는 을씨년스러운 도시 입구를 둘러보며 한숨을 삼켰다.
‘글렌은 그레고리 가문의 영지였지, 아마.’
일리아는 주머니에 넣어 둔 영상석을 꾹 쥐며 걸음을 옮겼다.
“일단 가자.”
도시 내부는 입구보다 더 처참했다. 건물들은 낡고 허술한 데다가 거리 곳곳에 넝마를 걸친 사람들이 즐비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백작령이 아닌 빈민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일리아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처참한 글렌의 모습에 탄식을 내뱉었다. 지금까지 숱하게 파견을 다녔지만, 단연코 여기보다 심한 곳은 없었다.
파견 임무가 잦았던 일리아도 이럴진대 다른 단원들은 어떻겠는가. 평생을 수도에서만 살아온 퍼렐과 카야는 큰 충격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눈을 부릅떴다.
“여기가 정말 제국이 맞는 겁니까?”
“모든 도시가 아로스 같을 줄 알았어?”
“그건 아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까지 글렌에서는 단 한 번도 마수가 출몰했다는 보고가 올라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도시 곳곳에 나 있는 커다란 손톱자국과 부서진 건물들은 이곳에서 큰 전투가 있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