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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50)화 (50/101)

50화 

오스카가 손에 들고 있던 수정을 척 내밀며 말했다.

“다행히 저한테 이런 게 있어서 말입니다. 누구 말이 맞나 직접 확인해 보면 되겠군요.”

“그건… 영상석입니까?”

“맞습니다. 황명으로 파티장과 복도 곳곳에 영상석을 설치해 두었거든요. 복도에 있는 것을 깜박하여 이제 막 회수하고 돌아가던 참이었는데 잘되었군요.”

오스카가 마력을 흘려 넣자 짙푸른 수정이 밝은 빛을 내며 허공에 흐릿한 영상을 띄웠다.

- 꽤 반반한데. 나랑 술이나 한잔 할까?

- …이러지 마세요.

- 내가 뭘 어쨌다고? 술이나 한잔 하자는 건데.

- 가 봐야 해요. 비켜 주세요.

- 하, 지금 너까지 날 무시하는 거야? 감히 네가?

그 이후로는 일리아가 본 그대로였다. 에렉이 지젤을 벽으로 몰아붙이며 윽박질렀고, 마침 복도를 지나던 그녀가 지젤을 구했다. 에렉이 증거라고 들이댔던 팔목의 상처는 도망치는 과정에서 볼썽사납게 구르는 바람에 생긴 것이었다. 게다가 영상 말미에는 패트릭이 일리아의 뒤를 밟으며 연신 기회를 엿보는 모습까지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다.

곧 흐릿하게 떠 있던 영상이 사라지고, 루크의 차가운 눈빛이 패트릭에게 닿았다.

“패트릭 패터슨. 네가 그러고도 아제로스 제국의 기사인가?”

“다, 단장님, 그게……!”

“긴말할 필요 없다.”

루크가 패트릭의 가슴에 달린 기사단 배지를 거칠게 뜯어냈다.

“당장 내 기사단에서 나가.”

“단장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 용서는 없다.”

패트릭을 일별한 루크가 일리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기사단을 대표하여 사과하지. 실례가 많았다.”

“아닙니다. 오해가 풀렸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무례에 대한 보상은 빠른 시일 내로 하겠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루크에게 꾸벅 인사를 한 일리아는 오스카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네.”

“…죄송합니다.”

“괜찮아. 원래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지. 아베르타 단장과는 내가 이야기해 볼 테니까 일단 들어가 쉬어.”

“감사합니다. 단장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일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차로 향했다. 이상한 사건에 휘말렸기 때문인지 속에 돌덩이가 내려앉아 있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다.

‘오늘은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잠이나 자자.’

그렇게 생각하며 일리아가 마차에 올라타려던 때였다.

“일리아.”

조용한 공간에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일리아는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그와 동시에 어둑한 하늘에서 밝은 달빛이 비쳐 들며 그의 얼굴이 찬란히 드러났다.

“기다린 거예요?”

“겸사겸사. 그나저나 이제 끝난 거야?”

카일루스의 모습을 보니 괜히 이런저런 감정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카일루스으…….”

“왜 그래?”

당황한 카일루스가 일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 손길이 얼마나 다정하고 따뜻한지. 일리아는 그만 눈물을 왈칵 쏟아 내고 말았다.

“저 술이 너무 당겨요…….”

* * *

일리아는 에스테반 저택에 도착하자마자 위스키를 물처럼 들이켰다. 그러나 전처럼 주사를 부리지는 않았다. 끓어오르는 분노가 술기운마저 밀어낸 것인지, 아무리 마셔도 취기가 돌지 않았다.

“진짜 억울해 죽는 줄 알았어요!”

일리아는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한 심정을 카일루스에게 토로하며 몇 번이나 탁자를 내리쳤다.

사실 이렇게까지 화날 일은 아니었다. 오스카 덕분에 큰 오해 없이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카일루스의 얼굴을 보니 괜히 여러 감정들이 울컥 치솟았다. 마치 투정을 부리듯이 말이다. 일리아는 ‘그동안 내가 쌓인 게 많았나 보다.’ 하고 생각하며 텅 빈 술잔을 내려놨다.

“하아, 얘기 들어 줘서 고마워요.”

“그대 얘기라면 얼마든지 들어 줄 수 있지.”

“…카일루스, 요새 더 느끼해진 거 알아요?”

“그런가?”

카일루스가 픽 웃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일리아는 적갈색 위스키가 출렁이는 모습을 바라보다 넌지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카일루스가 술 마시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술을 마시다 음독하셨거든.”

일리아는 그만 마시던 물을 내뿜고 말았다.

“그, 그, 그걸 왜 지금 얘기해요!”

“안 물어봤잖아.”

“하여간!”

일리아는 사색이 되어 카일루스의 잔을 빼앗아 들었다.

“마시지 마요!”

“혼자 진탕 마시고 사고 치는 꼴을 또 보라고?”

“저 멀쩡해요. 그러니까 카일루스는 마시지 마요.”

“오래된 일이야. 이제 아무렇지도 않아.”

“오래됐다고 해서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안 돼요.”

카일루스는 텅 빈 손을 내려다보다 일리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일리아는 당장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술잔을 치우고 있었다.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다른 귀족들은 카일루스가 술을 기피할 때마다 아직도 과거에 연연하고 있는 거냐며 비웃곤 했다.

물론 지금은 그게 막 공작이 된 그의 기를 꺾어 놓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몰랐다. 그저 부끄러운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카일루스는 감정을 최대한 숨기고, 더욱 악착같이 노력하여 공작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감히 그를 우습게 보는 사람이 없도록.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이 슬픔과 상처도 완전히 잊힐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런데 일리아의 말을 듣고 나니 괜히 마음 한편이 일렁거렸다. 이것은 그때와 같은 부끄러움일까, 아니면 따뜻한 위안일까.

카일루스의 강렬한 눈빛에 뜨끔해진 일리아가 어깨를 흠칫 떨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무례했죠?”

“아니. 괜찮아. 연인 사이에 이 정도쯤이야.”

“하지만…….”

진짜 연인도 아니잖아요.

일리아는 무심코 뒷말을 삼켰다.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말이 왜 갑자기 모래알을 씹는 것처럼 불편하게만 느껴지는 것인지.

“그대 마음대로 해도 좋아. 우리가 연인으로 있는 동안은.”

“정말요?”

“그래. 웬만해서는 다 봐주지.”

“으음, 그 말 후회하지 마세요.”

카일루스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 일리아는 한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일리아? 뭐 하는 거야?”

“제가 힘들어할 때마다 어머니께서 항상 이렇게 해 주셨거든요.”

“지금은 그렇게 힘들지 않은데.”

“과거에 힘들었을 카일루스를 위한 거예요.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요.”

머리카락을 사락거리는 느낌이 꽤나 기분 좋았다. 카일루스는 일리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좋네, 그거.”

그렇게,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동이 트기도 전에 저택을 나선 클리드는 황성 종탑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이 구름 너머로 고개를 내밀 때마다 투명한 막이 반짝거렸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클리드는 그 모습을 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사실 꽤 오래전부터 마력의 흐름이 불안정하기는 했다. 워낙 오래되기도 했고, 드래곤의 영혼과 함께 아이기스를 구성하고 있던 초대 황제의 영혼이 모종의 이유로 사라지면서 힘이 많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생긴 마모는 클리드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기에 그는 ‘마정석을 쓰면 몇 년간은 괜찮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그런데 오늘 다시 확인해 보니 누군가가 아이기스가 약해진 틈을 타 장난질을 쳐 놓은 듯했다.

“감히 누가 이딴 짓을 한 거야?”

클리드의 자색 눈동자가 밝게 타오르자 투명한 방어 막 위로 검붉은 기운이 어리기 시작했다. 마계의 마물에게서 느껴지던, 바로 그 기운이었다.

‘그때인가.’

전에 테멜 왕국의 포로들이 일시에 폭발했던 사건이 있었다. 그때 클리드는 마족이 약해진 아이기스를 부수기 위해 함정을 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포로들의 폭발은 아이기스를 부수기 위한 것이 아닌, 아이기스의 복잡한 마력에 강제로 간섭하기 위한 일종의 장치였다. 워낙 미세한 움직임이라 지금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제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간섭에 성공한 마족의 마력이 아이기스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클리드는 한 손을 뻗어 검붉은 기운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쓰던 기운은 곧 피직 하는 소리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빨리 찾아야겠군.”

상대는 아이기스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자였다. 하루빨리 찾아내어 처리하지 않으면 황성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클리드는 손바닥을 탁탁 털고는 종탑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 * *

일리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로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내 방이네?”

“맞아요. 아가씨 방이에요.”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차를 우리는 에나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일리아는 늘어지게 하품하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집까지 어떻게 온 거지?”

“각하께서 데려다주셨어요.”

“각하께서?”

흐릿하던 기억이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가만히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일리아는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침대에 풀썩 엎어졌다.

“미쳤나 봐!”

결과적으로, 일리아는 또 사고를 치거나 주사를 부리지는 않았다. 그저 취중진담이라고, 마음속에 고이 담아 두었던 말을 구구절절하게 꺼냈을 뿐이다.

- 카일루스, 혹시 알고 있어요?

- 뭘?

- 당신 진짜 잘생겼어요. 우리 오라버니보다 조금 더 잘생긴 것 같아요.

라든가,

- 사람이 왜 이렇게 완벽해요?

- 내가?

- 네. 가만 보면 아주 예쁜 짓만 골라 한다니까요. 얼굴도 예뻐 가지고.

라든가.

어제의 일리아는 마치 마음에 드는 영애를 꼬시려는 한량 같았다.

일리아는 얼굴을 감싸 쥐며 절규했다. 평소에 카일루스가 잘생겼다는 생각을 밥 먹듯이 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술에 취해 그런 거지 같은 말을 내뱉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제 카일루스 얼굴을 어떻게 봐!”

“무슨 일이신데요?”

일리아는 울먹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말 못 해…….”

“그럼 일단 진정하시고 일어나세요. 확인하실 게 있어요.”

에나는 일리아를 침대에서 일으키더니 붉은 봉랍으로 봉인되어 있는 초대장을 건넸다. 뜻밖에도, 발신인은 피델리오 플레타였다.

일리아는 봉인을 뜯고 초대장을 대충 훑었다. 초대장에는 다른 사람의 방해 없이 대화를 나눠 보고 싶으니 황성으로 와 달라는 내용이 장황하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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