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그럴 만했다. 에렉은 그동안 세도가의 영애들을 장신구처럼 데리고 다니며 사교계를 주름잡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크리스틴에게 파혼당한 것으로도 모자라 황실이 주최하는 파티에 파트너도 없이 혼자서 참석하기까지 했다. 주변 귀족 영식들의 은근한 무시에 속이 말이 아닐 것이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추태를 부릴 거면 방구석에 박혀서 혼자 부리든가. 일리아는 에렉에게 붙잡힌 영애를 구하기 위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고작해야 다 쓰러져 가는 자작 가문의 여식 주제에! 감히 너까지 날 무시해?”
“이, 이러지 마세요!”
길길이 날뛰는 에렉의 뒤로 곱슬거리는 보랏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일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필이면 상대가 지젤 아르투아라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분명했다.
“멈추세요. 영애께서 싫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일리아의 단호한 목소리에 에렉은 몸을 휙 돌리며 이를 갈았다.
“감히 누가! 하, 일리아 그라니체…….”
“당장 떨어지세요.”
에렉의 눈동자가 분노로 화르륵 타올랐다. 그는 여전히 지젤의 팔을 붙잡은 채로 불같이 화를 냈다.
“일리아!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너 같은 것만 안 만났어도 내 인생이 이렇게까지 꼬이지는 않았을 거라고!”
일리아는 에렉을 억지로 밀쳐 내며 대꾸했다.
“그게 왜 내 탓이야? 네가 처신을 잘 못한 결과지.”
“아니. 네가 소피아와의 일을 플로라 영애한테 전하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어!”
“헛소리하지 마, 에렉 로베르트. 애초에 바람을 피우지 말았어야지. 어디서 적반하장이야?”
“일리아 그라니체!”
술에 취해 용감해진 에렉은 지젤에게 그랬던 것처럼 일리아를 벽에 밀치려고 했다. 그러나 호기롭게 뻗은 에렉의 손은 일리아의 제복 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일리아가 허리에 차고 있던 의장용 검을 들어 에렉의 손을 막아섰기 때문이다. 검날은 화려하게 치장된 검집 속에 고이 잠들어 있었지만, 에렉은 알 수 있었다. 일리아라면 검을 뽑지 않고도 그를 벨 수 있다는 것을.
에렉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보석이 잔뜩 달린 의장용 검이 마치 단두대의 칼날처럼 섬뜩하게만 느껴졌다.
“돌아가서 잠이나 자. 또 이런 식으로 소란을 피웠다가는 경고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두, 두고 봐. 이대로 끝나지는 않을 테니까!”
에렉은 괜히 엄포를 놓으며 부리나케 도망쳤다.
에렉의 모습이 복도 너머로 사라지자 지젤이 비틀거리며 벽에 기대어 섰다. 일리아는 화들짝 놀라며 지젤을 부축했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 거예요?”
“아니에요. 그냥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일리아.”
“별말씀을요. 근데 왜 여기 나와 계세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요…….”
지젤은 평생을 아자카산맥에서 숨어 지낸 사람이었다. 급하게 예법을 배우고 귀족 사회에 관해 공부했다고 한들 귀족 행세를 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전하께는 제가 말씀드릴 테니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어때요?”
“괜찮아요.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그럼 파티장까지라도 데려다줄게요. 손 줘요.”
“어머, 부탁드릴게요, 상냥한 마법사님.”
지젤은 환하게 웃으며 일리아의 손을 맞잡았다.
찰나의 순간. 핏빛 목걸이가 미약하게 떨렸지만, 일리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환영 파티는 성황리에 끝이 났다. 일리아는 종일 고생한 단원들을 먼저 돌려보내고 마지막으로 파티장에서 나왔다. 몇 시간 동안 계속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더니 피곤하다 못해 쓰러질 지경이었다. 일리아는 가물거리는 정신을 애써 일깨우며 걸음을 옮겼다.
일리아가 넓은 복도를 지나 막 아제르궁을 나섰을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한 무리의 기사들이 나타나 일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선두에는 환영식 때 일리아와 마찰을 빚었던 패트릭 패터슨이라는 기사가 서 있었다.
“잠시 멈추십시오.”
패트릭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당당하게 말했다.
“일리아 그라니체 님께서 무장도 하지 않은 민간인에게 무력을 행사했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잠시 함께 가 주시죠.”
패트릭은 다짜고짜 군법까지 들먹이며 일리아를 압박했다. 명백한 하극상이었지만, 그에게는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다. 바로 일리아가 민간인에게 무력을 행사했다는 제보였다.
제보한 이는 이름만 들어도 알 법한 백작 가문의 영식이었다. 술에 잔뜩 취해 있어 진위 여부가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만약 그의 제보가 사실이라면 환영식 때의 설움을 확실하게 되갚아 줄 수 있으리라.
“증거는?”
“증인이 있습니다. 마침 복도를 지나던 기사가 봤다더군요.”
“그것 참 이상하네. 거긴 아무도 없었는데 말이야.”
“머, 멀리서 봤다고 했습니다. 확실합니다.”
일리아는 패트릭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었다. 일리아는 마법사단의 부단장이 된 이후로 이런 상황을 숱하게 겪은 바 있었다. 개중에는 일리아의 자질을 의심하며 이렇게 트집을 잡고 나선 이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지금 이 기사처럼 말이다.
그때마다 어떻게 대응했더라.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항상 말보다는 주먹이 앞섰던 것 같다. 그래서 카일루스에게 종종 혼나곤 했다.
물론 그때는 전쟁 중이었으니 구구절절하게 설명하는 것보다는 무력으로 해결하는 게 훨씬 빨랐다. 군인들은 강자를 따르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전쟁 중도 아니거니와 귀족으로서의 체면까지 달려 있었다. 다시 말해 절대 함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
일리아는 일이 귀찮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자작 영애께 무례를 범하기에 막으려고 나선 것뿐이야.”
“무력을 행사하신 건 맞는다는 거군요.”
“아니. 안 때렸어. 차라리 때렸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일리아의 말에 패트릭은 뒤를 휙 돌아봤다.
“사실입니까?”
기사들이 양쪽으로 물러서자 그 끝으로 잔뜩 흐트러진 에렉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아직도 술이 덜 깬 것인지 흐릿하게 풀린 눈으로 일리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닙니다! 저를 밀친 것으로도 모자라 검까지 들이댔다고요!”
에렉은 소매를 걷어 올려 붉게 부어오른 팔목을 척 내밀었다. 그에 어이가 없는 건 일리아였다. 그녀는 에렉을 가볍게 밀치기만 했지 저렇게 상처가 남을 정도로 세게 잡지는 않았다.
“에렉, 너 지금…….”
“아니라고 하시지 않습니까!”
“경은 내 말보다 술 취한 남자의 말이 더 신빙성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혹시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라니체 님께서 사실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계시는 것일지.”
에렉이 증거까지 가지고 나오자 패트릭은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자못 섬뜩하기까지 했다.
상황이 완전히 유리해졌다고 생각한 것인지, 뒤에서 눈치만 보던 에렉이 패트릭의 옆으로 다가와 이런저런 말을 보탰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둥, 지난번에도 똑같이 당했다는 둥. 아무래도 발코니에서 있었던 일을 아직까지도 마음에 담아 놓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저 촉새 같은 입에 주먹이라도 쑤셔 넣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흥분해 봤자 불리해지는 건 이쪽이었다.
“내일 그 자작 영애께 증언을 받아 오도록 하지. 그때 마저 얘기해.”
“도망치시려는 겁니까!”
“경이 하나 잊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난 마법사단의 부단장이야. 반드시 받아 올 테니까 비키도록 해.”
패트릭과 에렉은 급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지금 여기서 일리아를 놓치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사실을,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었다.
다급해진 패트릭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
저 멀리서 제복만큼이나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패트릭의 직속상관이자 기사단의 단장인 루크 아베르타 후작이었다. 패트릭은 사색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다, 단장님!”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그게…….”
패트릭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상황을 설명했다. 순찰을 끝내고 보고하러 가던 길에 동료 기사가 일리아의 만행을 목격했고, 핍박받은 귀족이 직접 제보까지 하는 바람에 불의를 참지 못하고 나섰다고 말이다.
“사실인가?”
루크의 차가운 눈빛이 일리아에게 닿았다.
“아닙니다.”
“할 말이 있으면 해도 좋다.”
“저기 계신 영식께서 아르투아 자작 영애께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것을 말리는 과정에서 사소한 마찰이 있었던 것뿐이고요.”
루크의 시선이 다시 에렉과 패트릭에게 향했다. 지레 겁을 먹은 패트릭은 서둘러 다른 기사들에게 신호를 보냈고, 그들은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너도나도 거짓 증언을 쏟아 냈다.
누가 봐도 일리아가 거짓말을 하는 형국이었지만, 루크는 섣불리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지금은 영향력이 많이 옅어졌다고는 하나 일리아는 명망 높은 그라니체 가문의 마법사이자 마법사단의 부단장이었다. 또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황제로부터 작위까지 하사받지 않았던가. 그런 그녀가 거짓말을 할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하나 고작 그런 이유로 이 많은 증언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잠시 고민하던 루크는 묵묵히 말했다.
“그럼 그 자작 영애를 증인으로 세우면 되겠군. 내일 기사단 본부로 데리고 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패트릭은 점점 초조해졌다. 만약 일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면 팽당하는 것은 일리아가 아닌 그가 될 터였다. 에렉은 이름 있는 귀족 가문의 자제이니 이런 소란쯤은 쉽게 무마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는 아니었다. 패터슨 남작 가문은 그가 없으면 존속조차 불가능했다. 만약 그가 기사직에서 잘리기라도 한다면 대를 잇는 것은 고사하고 당장 거리에 내몰릴지도 몰랐다.
“다, 다 거짓말입니다!”
“뭐?”
“일리아 그라니체 님의 말은 다 거짓입니다! 그곳에 자작 영애는 없었습니다!”
“그라니체 부단장?”
위기감을 느낀 패트릭이 소리를 빽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화려한 예복을 차려입은 누군가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바로 오스카였다. 오스카는 오른손으로 작은 수정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잠시 잊은 게 있어서 가지고 나오는 길인데…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게…….”
“제가 설명드리죠.”
오스카의 물음에 대답한 건 루크였다. 그는 모두의 증언을 객관적으로 정리하여 오스카에게 전달했다.
“하, 우리 부단장이 민간인한테 무력을 행사했다고요? 그리고 제보자가 저기 있는 에렉 로베르트고?”
“그렇습니다.”
“어이가 없군.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린 것도 모자라서 이렇게 폄훼하기까지 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