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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48)화 (48/101)

48화 

그게 불과 십여 분 전이었다. 일리아는 무심코 미소 지으며 얇은 장갑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문득, 발밑에 그림자가 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일리아는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뜻밖에도, 그녀를 찾아온 사람은 소피아 랜더였다. 얼굴이 묘하게 굳어 있는 것이 무언가 탐탁지 않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그냥요.”

“……?”

“…….”

소피아는 부채를 팔락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일리아는 묘한 눈빛으로 소피아를 바라봤다. 최근에 랜더 가문이 플레타 가문의 먼 친척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랜더 가문의 가치가 순식간에 몇 배나 뛰었다. 랜더 저택으로 수많은 선물 마차가 들락거린다고 하니 일리아는 소피아가 그새 기고만장해져서 자랑을 늘어놓으러 온 줄 알았다.

그러나 소피아는 일리아의 앞을 가만히 막아서고만 있을 뿐, 아무런 말도,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일리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랜더 영애, 혹시 할 말 있어요?”

“…그런 거 없어요.”

“그런데 왜 이러고 있는 거예요?”

“저도 좋아서 이러고 있는 거 아니거든요?!”

“그럼 비켜 주세요.”

일리아의 말에 입술을 달싹거리던 소피아는 다시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괜히 불편해진 일리아는 슬금슬금 몸을 물렸다.

그때였다. 화려한 예복을 차려입은 피델리오가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소피아, 여기서 뭐 하는……. 아, 그라니체 영애.”

피델리오가 일리아를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그제야 일리아는 소피아가 왜 이상하게 굴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피델리오에게 부탁을 받은 모양이었다. 일리아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일리아는 현재 공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무작정 말을 걸 수는 없는 법이었다. 특히나 타국의 귀족인 그는 더더욱. 그래서 피델리오는 소피아를 먼저 보내고, 그녀를 찾는 척 자연스럽게 일리아에게 접근한 것이다. 이걸 정성이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괜히 귀찮게 됐네.’

일리아는 하나둘씩 따라붙기 시작하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의례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파티는 즐거우십니까.”

“물론입니다. 영애께서도 참석하셨다면 더 좋았을 텐데요.”

“보시다시피 바쁜 몸이라서요.”

그러니까 얼른 돌아가 주시죠, 훠이, 훠이.

명백한 축객령이었지만, 피델리오는 모른 척 대화를 이어 나갔다. 대화의 주제는 마법에 관한 것이기도 했고, 때로는 사적인 것이기도 했다. 일리아는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피델리오의 말에 대충 맞장구를 쳤다.

사실 처음에는 공무를 핑계로 그가 어떻게 나오든 무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피델리오는 이번 환영 파티의 주역이자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유명 인사였다. 만약 피델리오가 일리아의 태도를 트집이라도 잡는다면 그라니체 가문은 물론이고 아제로스 제국의 이름에도 먹칠을 하는 꼴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 카일루스처럼 말을 끊어 줄 수 있는 사람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플레타 백작님, 저기…….”

말이 길어지려는 듯 보이자 소피아가 주춤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 소피아. 먼저 가 있어. 금방 따라갈 테니까.”

“네…….”

일리아는 답지 않게 의기소침해진 소피아를 힐끔거리다, 내친김에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로 했다.

“백작님, 혹시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정말 랜더 가문과 친척 관계가 맞나요?”

의구심 가득한 일리아의 물음에 피델리오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궁금하셨습니까? 저는 조금 더 개인적인 질문을 원했습니다만.”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송하네요.”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친척 관계가 맞습니다. 제 고조모께서 랜더 가문 출신이시거든요.”

“그러셨군요.”

“더 궁금한 건 없으십니까?”

피델리오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물었다.

“딱히 없…….”

“뭐든 좋습니다. 아주 개인적인 것도요.”

“네?”

“제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꽤 구미가 당기는 말이었다.

카일루스가 피델리오를 의심하는 이유 중에는 그의 뛰어난 마법 실력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세간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피델리오는 이례적으로 두 가지 속성의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데다가 보유하고 있는 마력 또한 보통이 아니라고 한다. 대부분의 마법사가 한 가지 속성만을 타고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여러 가지 속성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드래곤의 후손인 그라니체 가문의 마법사가 유일했으니까. 이렇듯 인간이면서도 전례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보니 그의 배경을 의심하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물어보면 알려 주실 건가요?”

“물론입니다.”

“제게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뭐죠?”

피델리오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영애께 첫눈에 반했다면 믿어 주시겠습니까?”

“…전 이미 연인이 있습니다.”

“그저 연인일 뿐이지 않습니까. 아직 제게도 기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백작에게 기회는 없을 거야.”

뾰로통하게 대꾸한 카일루스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일리아의 옆에 섰다. 곧 그들의 주변으로 폭풍 전야와도 같은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역시 그라니체 영애의 연인은 각하셨군요.”

“그래. 그러니까 괜한 수작은 그만둬.”

“하하, 수작이라니요. 저는 그저 제 감정을 표현한 것뿐입니다만.”

피델리오의 여유 만만한 태도에 카일루스가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내 연인이라고 말했을 텐데.”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연인은 그저 연인일 뿐이지 않습니까. 마음이란 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법이니까요.”

“아니. 절대 그럴 일 없어.”

“그라니체 영애께서는 다르게 생각하실 수도 있죠.”

두 사람 사이에서 피지직 하고 불꽃이 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에 일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그들에게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이 정도 소란으로는 말릴 마음도 안 들거니와 두 남자가 자신 하나를 두고 다투는 모습이 나름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이런 광경을 볼 수 있겠는가.

“경도 참 성격이 나쁘군.”

그때, 테오도르가 슬그머니 다가오며 말했다.

“성격이 나쁘다는 소리는 처음 들어 봅니다, 전하.”

“클리드 그라니체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그런 소리를 대놓고 할 위인이 있을 리가.”

테오도르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카일루스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실 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카일루스가 그라니체 가문을 포섭하기 위해 일리아에게 접근한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카일루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성이라면 학을 뗄 정도로 질색을 했기 때문이다. 에스테반 가문의 권세를 노린 일부 귀족들이 여식을 이용해 카일루스를 옭아매려고 한 게 발단이었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그런 충격적인 경험을 했으니 이성에 관심이 생길 리 만무했다. 그 이후로 카일루스는 혼기가 지날 때까지 그 흔한 연애조차 하지 않았다.

‘그랬었는데… 드디어 임자가 나타난 모양이네.’

테오도르는 에스테반 가문의 명맥이 그의 대에서 끊어지는 것은 아닌가 항상 우려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의 모습을 보니 역시나 인연은 따로 있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플레타 백작.”

한창 신경전을 벌이던 카일루스가 팔짱을 끼며 근엄하게 말했다.

“일리아는 평생 내 귀염둥이가 되기로 맹세한 몸이라고. 그러니까 백작이 끼어들 틈은 없어.”

여기저기서 의미를 알 수 없는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덕분에 테오도르와 함께 사태를 방관하고 있던 일리아도 사색이 되어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카일루스!”

일리아가 카일루스를 잡아끌며 언성을 높였다. 이번에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일루스는 선대 공작의 친우인 로웰 헤이스팅스 후작에게도 이름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선을 긋는 게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고작 만난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연인에게 이름을 허락한 것도 모자라 무례하게 구는 그녀를 두고 보기까지 하다니. 생소한 광경에 귀족들은 저마다 눈을 비비적거렸다. 일부 영애들은 부러워 죽겠다는 얼굴로 일리아에게 눈을 부라리기도 했다. 소란의 중심에 서 있는 일리아는 부끄러워 죽을 맛이었지만 말이다.

“왜 그래, 리아?”

“리… 뭐라고요?”

“리아. 내가 평소에 부르는 애칭이잖아.”

“…그건 그렇다 치고, 창피해 죽겠으니까 그만해요!”

“창피할 게 뭐가 있어. 다 사실인데. 안 그래?”

카일루스는 태연하게 일리아의 어깨를 감쌌다.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얼굴이었지만,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일리아는 보고 말았다. 저 못된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리고 있는 모습을. 그도 아는 것이다. 지금 이 상황이 얼마나 웃기고 말이 안 되는지를!

일리아는 카일루스를 테오도르에게 떠밀며 ‘제발 방해하지 말고 어디든 가요!’ 하고 외쳤다. 그러고는 내부 지휘를 레널드에게 떠맡긴 채 파우더 룸으로 향했다. 뒤에서 피델리오가 일리아를 불러 세웠지만 그녀는 못 들은 척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하아, 뭐라는 거야, 진짜…….”

일리아는 발그레 달아오른 볼을 만지작거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칭’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낯간지러운 말인가 싶었다.

‘진정해. 그냥 연기일 뿐이잖아.’

일리아는 괜히 스트레칭을 하거나 심호흡을 하는 등, 들뜬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 애썼다.

‘에렉 이후로 이런 기분은 처음……. 잠깐만. 에렉?’

일리아는 문득 파티장에서 에렉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히 사전에 넘겨받았던 참석자 목록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의아해진 일리아는 제복을 정돈하며 중얼거렸다.

“또 어디서 바람난 거 아니야?”

일리아는 눈가를 찌푸리며 파우더 룸을 나섰다.

* * *

결과적으로 일리아의 예상은 반만 들어맞았다. 에렉이 다른 영애와 함께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건 바람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추태에 가까웠다.

웬일로 거나하게 취한 에렉은 한 영애를 벽에 밀어붙이며 연신 헛소리를 해 대고 있었다. ‘감히 날 두고 다른 파트너를 구해?’라든가 ‘타국의 백작이 뭐가 대단하다고! 언제는 나밖에 없다더니!’라든가. 아무래도 소피아가 피델리오와 함께 파티에 참석한 일로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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