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붉은 망토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잠시간 고요하던 홀이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귀족들이 너도나도 피델리오와 말을 섞기 위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피델리오는 그들과 의례적인 인사만 나누고는 다른 사절들과 함께 홀 밖으로 나가 버렸다.
괜히 아쉬워진 귀족들은 은근슬쩍 그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홀 밖에서 뜻밖의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쉬러 가는 줄 알았던 피델리오는 문 옆에 서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영애. 피델리오 플레타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일리아 그라니체입니다.”
“아까 눈이 마주쳤을 때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역시나 그라니체 가문의 영애셨군요.”
피델리오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라니체 가문의 명성은 프노이트 왕국에서도 꽤 자자합니다. 무려 드래곤의 후손이 아니십니까.”
프노이트 왕국은 마도 왕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마법사가 현저히 많은 국가였다. 그 이유는 국토의 특수성에 있었는데, 국토의 3할 이상이 마정석 광산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프노이트 왕은 군사력 증진을 위해 마정석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한편, 질이 좋은 마정석은 해외로 수출하여 매해 엄청난 돈을 벌어들였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국가 전체가 마법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 관심은 곧 드래곤의 후손인 그라니체 가문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한 번쯤은 꼭 만나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요.”
피델리오는 다른 귀족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리아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냈다. 대개 마법에 관한 것들이었다. 덕분에 마법에 문외한인 귀족들은 함부로 대화에 끼어들지 못했고, 두 사람의 대화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보다 못한 카일루스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플레타 백작, 이제…….”
“아, 그러고 보니 공무 수행 중이셨군요. 눈치 없이 굴어 죄송합니다.”
그때 타이밍 좋게 피델리오가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는 피곤에 찌들어 있는 다른 사절들을 힐끔거리며 난처하다는 듯이 웃었다.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푹 쉬십시오.”
“아, 그 전에.”
피델리오가 일리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더니 하얀 장갑 위에 살짝 입을 맞췄다.
“다음에 또 뵐 수 있기를.”
부드럽게 웃은 피델리오는 사절 행렬을 이끌고 넓은 복도를 나섰다. 피델리오와 안면을 트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던 귀족들 역시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자리를 떴다.
일리아는 멍하니 손등을 내려다보다 어깨를 흠칫 떨었다. 어느새 다가온 카일루스가 그녀의 손등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맑은 황금빛 눈동자가 마치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카일…….”
카일루스는 예고도 없이 일리아의 장갑을 휙 벗기더니 그대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병균이라도 옮으면 어떡해.”
“벼, 병균이라니요!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런 소릴 해요!”
“원래 풍토병이 제일 무서운 법이야.”
카일루스는 되도 않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장갑을 꾹 밟았다.
사실 그는 일리아가 아제르궁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기를 바랐다. 피델리오가 마법사라는 공통점을 들먹이며 일리아에게 관심을 가지지는 않을까 염려한 것이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피델리오는 일리아와 마주치자마자 노골적으로 관심을 보였다. 이렇게 버젓이 그녀의 (가짜) 연인이 보고 있음에도 말이다!
외교적인 문제가 걸려 있어 자국의 귀족들에게 하듯 함부로 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카일루스는 부아가 치밀었다.
“가자, 일리아.”
“어딜 가요. 여기 정리는…….”
“너. 네가 책임지고 정리하고 가.”
“…넵!”
지목을 받은 이는 다름 아닌 레널드였다. 그는 분주하게 움직이며 마법사와 기사 들을 아제르궁 밖으로 몰아냈다.
“됐지? 이제 가자.”
“하아, 정말…….”
카일루스는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장갑을 노려보다 일리아와 함께 아제르궁을 나섰다.
* * *
프노이트 사절단은 약 두 달간 아제르궁에서 지내며 화친 논의를 하기로 했다. 이례적으로 긴 기간이었지만, 프노이트 왕국의 사절단이 아제로스 제국에 있으면 테멜 왕국도 섣불리 행동하지 못할 거라는 계산하에 결정된 일이었다.
만약 이런 시기에 전쟁을 일으킨다면 테멜 왕국은 아제로스 제국뿐만 아니라 프노이트 왕국과도 척을 지게 된다. 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진 마족이어도 그런 상황이 오는 것은 달갑지 않을 터였다. 그렇기에 황실은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일리아와 카일루스는 황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프노이트 왕국 또한 마족과 연관이 있고, 이번 화친 요청 역시 순수한 의도가 아닐 거라는 것. 이전에 만난 괴한이 바로 그 증거였다. 일리아는 피델리오 플레타를 비롯한 사절단 전원을 경계하리라 마음먹었다.
‘그건 그렇고…….’
상념을 털어 낸 일리아는 고개를 들어 올려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어쩐지 잘생긴 얼굴이 평소보다 더욱 굳어져 있는 것이, 뭔가 언짢은 게 있어 보였다.
‘설마 환영식 때 있었던 일 때문에 그러시나?’
이틀 전, 피델리오 때문에 사교계가 또 한바탕 들썩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적인 마법사가 에스테반 공작의 연인에게 대놓고 관심을 보이면서 묘한 삼각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던가. 귀족들은 일리아가 공작의 연인으로 남아 있을지, 아니면 타국의 마법사에게 마음을 돌릴지 내기까지 해 가며 연일 떠들어 댔다.
덕분에 카일루스는 또다시 사교계의 가십거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원인은 일리아였으니 어찌 보면 그가 기분 나빠 하는 것도 당연했다.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눈치를 살피며 넌지시 말했다.
“죄송해요.”
“뭐가?”
“저 때문에 또…….”
“정확히는 그대 때문이 아니라 그놈 때문이지.”
애초에 피델리오가 일리아에게 관심만 보이지 않았어도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카일루스는 피델리오가 더욱 싫어졌다.
“그래도요. 죄송해요.”
“정 죄송하면 그놈하고 확실히 거리를 둬. 폐하께 빌미를 줘선 안 되니까.”
“알겠어요.”
만약 일리아가 피델리오와 친근한 모습을 보인다면 바이에드는 그것을 빌미로 카일루스와 이사벨라의 결혼을 다시 추진하려 들지도 몰랐다. 아니면 의도적으로 일리아와 피델리오를 연결시켜 그녀를 프노이트 왕국으로 보내 버리거나.
그렇게 되면 바이에드로서는 그라니체 가문의 전력을 한풀 꺾어 놓는 것과 다름없으니 아예 생각 못 할 일은 아니었다. 일리아는 경각심을 일깨우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런데 그건 그거고.
“카일루스.”
“왜?”
“안 가요?”
“…가야지.”
현재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일리아의 개인 응접실이었다. 느지막한 오후에 일리아를 찾아온 카일루스는 벌써 해 질 무렵이 다 되었음에도 돌아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전처럼 일거리를 가지고 온 것도 아니었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일리아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조용히 간식을 집어 먹기만 할 뿐. 덕분에 일리아는 카일루스를 의식하느라 계획해 놓았던 일을 하나도 끝내지 못했다.
깃펜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하던 일리아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고는 카일루스의 팔을 힘주어 당겼다.
“자, 얼른 일어나세요. 모셔다드릴 테니까요.”
“그대가?”
“네. 갈 생각을 안 하시니 이 귀염둥이가 직접 모셔다드려야죠.”
카일루스는 마지못해 일어나며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완전히 적응한 모양이네.”
“설마요. 이렇게 해야 제 말을 들어주시니까 그렇죠.”
“내가?”
“그래요. 카일루스가요.”
카일루스는 일리아와 함께 마차에 오르면서 부드럽게 웃었다.
“생각해 보니 그대 말이라면 꼬박꼬박 다 들어줬던 것 같은데. 그 말도 안 되는 파트너 요청도 수락해 주고.”
“그건…….”
“오히려 그대가 내 말을 안 듣는 편이었지. 전장에서부터 시작해서…….”
“어, 어, 얼른 가요! 솔로! 얼른 출발해!”
“하하하!”
카일루스의 청량한 웃음소리가 어쩐지 얄밉게만 들렸다.
* * *
그로부터 이틀 후, 아제르궁에서 성대한 환영 파티가 열렸다.
일리아는 피델리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한쪽 벽으로 비켜섰다. 바이에드의 짧은 연설로 시작된 파티는 어느덧 완전히 무르익어 있었다. 그동안 피델리오는 로베르트 백작을 비롯한 여러 유력 귀족들과 대화를 나누며 친분을 다졌다.
워낙 공개적인 자리다 보니 오가는 대화라고는 전부 영양가 없는 것들뿐이었지만 일리아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호수에서 그들을 습격한 괴한이 프노이트인이라는 정보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프노이트 왕국이 마족과 결탁한 게 맞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 프노이트인이 독단적으로 움직이는 것일 수도 있고, 누군가가 프노이트인의 행세를 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이렇듯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일리아는 촉각을 더욱 곤두세웠다. 방심은 금물이었다.
‘그나저나 카일루스는 언제 오려나.’
일리아는 아직까지도 온기가 남아 있는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픽 웃었다.
사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바로 카일루스였다.
결국 파트너 없이 혼자서 파티에 참석한 카일루스는 파티 내내 일리아를 쫓아다니며 사방을 경계했다. 덕분에 피델리오는 물론이고, 경비 상황을 보고하려던 다른 단원들까지 지레 겁을 먹고 다가오지 못했다.
- 카일루스, 계속 이러고 있을 거예요?
- 할 일도 없는데, 뭐.
- 할 일이 없긴요. 황태자 전하께서 아주 열렬한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계신걸요.
카일루스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 안 보여.
- 어린애같이 굴지 마시고요. 돈을 받았으면 일을 하셔야죠. 자, 자, 얼른 저리 가세요.
- 그럼 그 전에.
카일루스는 허리를 쿡쿡 찌르는 일리아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며 웃었다. 얇은 장갑 너머로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감각에 일리아는 순간 당황하고 말았다.
- 뭐, 뭐 하시는 거예요!
- 그대와 내 사이가 건재하다는 걸 보여 주려고.
- 아까 그렇게 따라다니셔 놓고…….
-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요새 이런저런 일 때문에 대외 활동이 적었잖아.
카일루스는 일리아의 손등에 재차 입을 맞췄다. 찬란한 황금빛 눈동자가 마치 자석처럼 일리아의 눈길을 끌었다.
- 그럼 다녀올게.
- …또 오시려고요?
- 내 귀염둥이가 이렇게 무심하니 나라도 정신 바짝 차려야지.
- 됐으니까 얼른 다녀오기나 하세요!
- 알겠어. 금방 올게.
그제야 카일루스는 만족스러워하는 얼굴로 일리아의 손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