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일리아의 시선이 패트릭과 그를 따르는 기사들에게 박혀 들었다. 그들은 현재 다른 기사들을 밀어내고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중이었다. 원래 그들의 자리는 아제르궁의 입구, 그러니까 메인 홀과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복도 어귀였다. 패트릭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기사단장에게 잘 보이고자 이렇게 문 앞을 사수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일리아에 관한 것은 반쯤 핑계에 불과했다. 어차피 전쟁에서 요행으로 공을 세우고 작위를 하사받은 풋내기가 아니던가. 패트릭은 기선 제압만 잘하면 자신들이 막무가내로 굴어도 일리아가 문제 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일리아는 대놓고 그들을 타박했다. 무려 다른 기사들이 보는 앞에서 말이다.
패트릭은 자존심이 상했다. 기사가 된 지도 어언 20년. 일리아가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할 때부터 검을 휘둘렀던 그였다. 고작 직급 하나만으로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경께서 아무리 마법사단의 부단장이라고 해도 이런 무례는 안 될 말입니다!”
“무례라니. 나는 그저 경의 임시 상관으로서 물어본 것뿐이야. 이게 잘 처신한 결과가 맞는지.”
“그만하십시오. 정녕 기사단과 척을 지시겠다는 겁니까?”
“그 말에는 어폐가 있군. 설마 경이 기사단을 대표한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일리아의 날카로운 지적에 패트릭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것처럼 검 자루를 들썩거렸다.
“결투 신청이라면 언제든지 받아 주겠지만…….”
패트릭에게 다가간 일리아가 들썩이는 검 자루 끝을 꾹 눌렀다. 그러자 언뜻언뜻 번뜩이던 은빛 검날이 검집 안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당황한 패트릭이 힘을 주어 검을 뽑으려고 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힘을 주면 줄수록 마치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것 같은 압력이 느껴졌다.
“기사단장님께 깨지고 싶지 않으면 지금은 내 명령에 따르도록 해.”
영롱한 자색 눈동자가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불꽃과도 같은 그 눈빛에 패트릭은 찰나지만 완전히 압도되었다.
“…어디 두고 봅시다.”
패트릭은 의아해하는 기사들을 이끌고 정해진 위치로 자리를 옮겼다.
가장 연륜 있는 기사가 꼬리를 내리니 복도는 순식간에 질서를 되찾았다. 일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문 앞에 섰다.
곧, 귀족들이 하나둘씩 메인 홀로 모여들었다.
“일리아!”
그중에는 그라니체 가문의 가주인 레이븐도 있었다. 레이븐은 주위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일리아에게 다가왔다.
“이렇게 보니 더 반갑구나. 피곤하지는 않니?”
“전 괜찮아요. 아버지께서는요?”
“나도 괜찮단다.”
“그럼 여기서 이러지 마시고 얼른 들어가세요.”
“하하, 그래. 고생하려무나.”
일리아와 짧은 인사를 마친 레이븐이 막 홀 안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였다.
“그라니체 백작!”
저 멀리서 한 남자가 레이븐을 불러 세우며 부리나케 뛰어왔다. 바로 레이븐의 상관이자 오스카의 아버지인 로웰 헤이스팅스 후작이었다. 인자한 얼굴과 선명한 분홍색 머리카락이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오셨습니까, 후작님.”
“반갑네, 백작. 그나저나 이쪽이 그라니체 준남작인가?”
로웰의 시선이 일리아에게 향했다. 그에 일리아는 짧게 묵례하며 대답했다.
“일리아 그라니체입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헤이스팅스 후작님.”
“너무 격식 차릴 필요 없다네. 사실 승전 기념 파티 때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각하께서 워낙 철벽 방어를 하시는 통에 나서지 못했다네.”
“…그러셨군요.”
“이렇게라도 보니 반갑구만.”
로웰은 일면식도 없는 일리아에게 이상할 정도로 호감을 보였다. 괜히 마음 한편이 불안해진 레이븐은 로웰의 눈치를 살피며 은근히 말했다.
“제 딸아이를 좋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이런 것 가지고. 사실 내가 준남작에게 고마운 게 아주 많다네.”
“고마운 것이라니요?”
“일단 우리 오스카를 보필해 주고 있지 않나.”
로웰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오스카는 할 수 있는 게 아주 많은 아이라네. 그 아이가 날개를 펼칠 수 있도록 준남작이 옆에서 많이 도와주게.”
“…알겠습니다.”
로웰은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오스카에 대한 자랑을 늘어놨다. 물론 오스카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던 일리아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요새 각하와는 어떻나?”
“잘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아니, 사람 앞일은 모르는 게 아닌가. 사람 마음이라는 게 말일세, 시각만 바꿔도 달라지는 게 아주 많…….”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후작.”
그때, 카일루스가 로웰을 지그시 노려보며 일리아의 옆에 섰다.
익숙한 체향과 함께 낯익은 온기가 일리아의 손등을 감쌌다. 일리아는 손가락을 바르작거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벌써 오셨습니까?”
“내 연인에게 무슨 헛바람을 불어넣으려는 거야?”
“아니, 뭐……. 그냥 그런 게 있습니다.”
카일루스가 눈썹을 들썩거리며 말했다.
“후작이 모르나 본데, 일리아는 눈이 꽤 높은 편이야.”
“각하! 마치 오스카의 외모가 준남작의 기준에 못 미친다는 소리처럼 들립니다만?”
“정확해.”
“우리 오스카가 얼마나 잘생겼는데요! 그렇지 않나, 준남작?”
일리아는 그들의 유치한 대화에 끼고 싶지 않아 은근슬쩍 딴청을 피웠다. 그러자 카일루스는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봐 봐. 대답 못 하잖아. 일리아는 내 얼굴이 객관적으로 잘생겼다고 했다고. 후작의 아들이 눈에 찰 리가 없…….”
“카일루스!”
왜 내 헛소리를 마음대로 까발리려고 하는 건데!
당황한 일리아는 자신의 손등을 감싸고 있던 카일루스의 손을 그대로 잡아끌었다.
“다른 분들 앞에서는 좀……!”
그제야 카일루스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리아는 어깨를 흠칫 굳혔다.
카일루스는 항상 자연스럽게 내리고 다니던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빗어 넘긴 상태였다. 덕분에 잘생긴 얼굴이 더욱 돋보였다. 마치 맑은 하늘에 뜬 태양처럼 찬란하고, 눈이 부셨다.
“일리아?”
일리아가 멍하니 굳어 있자 카일루스가 그녀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괜찮아?”
“…네, 네. 괜찮아요. 괜찮고말고요.”
일리아는 고개를 푹 숙이며 볼을 문질렀다.
그와 동시에 로웰이 낮게 혀를 찼다. 어쩐지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각하, 정말 섭섭합니다.”
“왜?”
“저한테는 꿈도 꾸지 말라고 하시더니 준남작한테는 벌써 이름을 허락하신 겁니까?”
일리아가 카일루스를 이름으로 부른 것 때문에 뿔이 난 모양이었다.
사실 로웰로서는 충분히 서운할 만했다. 로웰은 선대 에스테반 공작의 절친한 친우로서 카일루스와도 특별한 유대가 있었다. 어렸을 때는 곧잘 부르곤 했던 이름을 이제는 부르지 못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서운할 수밖에. 원래 줬다 빼앗는 것이 가장 나쁘다고 하지 않던가.
로웰이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자 카일루스는 일리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후작이랑 일리아가 같아? 질투할 걸 해야지.”
“너무하십니다, 각하!”
“시끄럽고, 들어가기나 해.”
로웰을 레이븐에게 떠민 카일루스가 일리아를 내려다보며 씩 웃었다.
“그럼 수고해, 일리아.”
“…네. 잘 다녀오세요.”
카일루스마저 홀 안으로 들어가고, 머지않아 커다란 종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두 번. 프노이트 사절단이 아제르궁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일리아는 마지막으로 대열을 점검하고 문 옆에 바르게 섰다.
얼마 있지 않아 복도 어귀에서 프노이트 사절단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절 행렬의 선두에는 적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젊은 남자가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일리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바로 그 유명한 피델리오 플레타라는 것을.
【 프노이트 사절단 】
시종장이 커다란 목소리로 황제의 입장을 알렸다. 근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온 바이에드는 곧장 단상 위에 있는 화려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오만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들라 하게.”
바이에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종들이 거대한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던 적갈색 머리카락의 남자가 긴 사절 행렬을 이끌고 홀 안으로 들어섰다.
도열해 있는 귀족들을 지나 바이에드의 앞에 멈춰 선 그는 한 손을 가슴에 올리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폐하.”
그가 짙은 녹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피델리오 플레타라고 합니다.”
홀 안의 공기가 변했다. 귀족들은 저마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피델리오를 바라봤다. 그의 외모가 이룩한 업적에 비해 상당히 젊어 보였기 때문이다.
바이에드 역시 근엄하게 앉은 채로 피델리오를 찬찬히 훑었다. 프노이트 왕국에서 왕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더니, 그는 감히 제국의 황제가 두렵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의 여유로운 미소에 바이에드는 괜히 심사가 뒤틀렸다.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소.”
“아닙니다. 제국의 전경이 아름다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이건 프노이트의 왕께서 폐하께 드리는 작은 성의입니다.”
피델리오는 은은하게 웃으며 재상에게 진상 목록을 건넸다. 진귀한 비단부터 질 좋은 마정석까지. 진상 목록에는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품목이 적혀 있었다. 나름대로 고심해서 고른 흔적이 엿보였다. 바이에드는 그제야 옅은 미소를 띠었다.
“고맙소. 프노이트의 왕에게도 잘 받았노라 말을 전해 주시오.”
“흔쾌히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왕께도 꼭 전해 드리겠습니다.”
그 이후로 의미 없는 대화가 두어 차례 더 오갔다. 바이에드는 피델리오를 통해 프노이트 왕의 저의를 알아보려고 했지만, 그는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바이에드가 은근히 속내를 떠볼 때마다 피델리오는 짙게 웃으며 아제로스 제국을 향한 호의를 보였다. 마치 검은 속내 따위는 없다는 듯이 말이다.
그에 흥미가 식은 바이에드는 서둘러 환영식을 진행시켰고, 형식적인 예식은 약 두 시간이 지난 후에야 완전히 끝이 났다.
“환영 파티는 사흘 후에 있을 예정이오. 여독이 많이 쌓였을 테니 푹 쉬시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의자에서 일어난 바이에드가 유유히 홀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