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좋지도 않았어.”
낮게 웃은 일리아는 레널드의 공격을 방어하는 대신 미련 없이 손을 놓았다. 축을 잃은 레널드는 당연히 바닥에 곤두박질쳤고, 일리아는 기를 쓰고 일어나려는 그의 등을 지그시 밟았다.
“이제 하나 남았네. 어디 있으려나.”
그때, 두 사람을 향해 돌풍이 불어닥쳤다. 마치 칼날을 품은 듯 날카로운 바람이었다.
‘이제야 움직이는군.’
일리아는 레널드의 등을 밟은 채로 정면에 거대한 장벽을 세웠다. 흙으로 만든 장벽이 거센 돌풍을 단단히 막아 주었고, 그동안 일리아는 숨을 고르며 타이밍을 잴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이 점차 옅어지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고개를 살짝 빼고 장벽 너머를 빠르게 훑었다. 허공에 떠오른 흙먼지 사이로 퍼렐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공격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을 눈치챈 것인지 다음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듯했다. 즉시 흙의 장벽을 허문 일리아는 퍼렐이 수식을 계산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단숨에 몸을 날려 그의 뒤편에 착지했다.
“잠깐……!”
일리아는 다급하게 몸을 돌리는 퍼렐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렇게 마무리를 지으려던 찰나, 어느새 일어난 레널드가 재차 덤벼들었다. 그러나 레널드는 일리아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대지가 거세게 요동치면서 그의 몸을 바닥으로 끌어당겼기 때문이었다.
세 사람이 모두 움직임을 멈추자 뿌옇게 일어났던 흙먼지가 차츰 가라앉았다. 그들의 대련을 넋 놓고 바라보던 단원들은 ‘와아아아아!’ 하고 우레와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그만큼 일리아의 무위는 대단했다.
“하아, 역시 못 당하겠네요.”
레널드가 항복의 의미로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도 많이 늘었네, 레널드.”
일리아는 마법을 해제하며 퍼렐의 옷깃을 놓았다. 퍼렐은 후련한 얼굴로 패배를 인정하는 레널드와 달리 큰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일리아는 그런 퍼렐을 일별하고 한껏 상기되어 있는 단원들을 향해 말했다.
“마법사라고 다 후방에만 있는 건 아니야. 공격형 마법사들은 레널드처럼 전방에서 함께 싸우기도 해. 전선이 밀리면 이렇게 습격당할 수도 있고.”
일리아는 몸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거야. 그러니까 너희들은 최대한 많은 경험을 쌓고 앞으로의 일에 대비해야 해. 내 말 알아듣겠지?”
“네!”
“좋아. 그럼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해 볼까.”
* * *
“확실히 대단하긴 하네.”
연무장 어귀에 선 오스카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일리아를 눈으로 좇았다. 그녀가 뛰어난 마법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였을 줄은 몰랐다.
문득, 일리아를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예전부터 공부에 대한 열의가 남달랐던 오스카는 항상 1등을 놓치지 않던 수재였다. 헤이스팅스 후작은 늘 ‘오스카, 너는 최고의 마법사가 될 거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그 역시 그렇게 되리라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처참히 부서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오스카와 같은 해에 아카데미에 입학한 한 학생 때문이었다. 그날 오스카는 절대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을 보았다. 바로 일리아 그라니체라는 벽을.
일리아는 고학년도 풀기 어려워하는 복잡한 수식을 손쉽게 풀어내고 기초적인 수식을 조합하여 새로운 마법을 창조하는 등 연일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아무리 드래곤의 후손이라지만 이건 너무 사기적인 차이가 아닌가!
처음으로 인생의 쓴맛을 본 오스카는 그때부터 개인 과외까지 해 가며 마법 공부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일리아를 따라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없이 노력했지만, 오스카는 일리아가 조기 졸업을 할 때까지 단 한 번도 그녀를 이기지 못했다.
그 이후로 얼마나 많이 방황했는지 모른다. 오스카는 생전 입에도 대지 않던 샐러드를 먹기도 하고, 소중한 마법서에 작게나마 낙서를 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정신을 차린 것도 일리아 덕분이었네.’
그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헤이스팅스 후작은 저명한 마법사들을 수소문하여 상심한 아들에게 열정을 북돋아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오스카를 다시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다.
그렇게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던 어느 날. 오스카는 우연히 일리아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녀가 마법사단의 부단장으로서 테멜 왕국과의 전쟁에 참전한다는 소식이었다.
누구는 이렇게 폐인처럼 살고 있는데 누구는 찬란한 영광을 누리려 하다니.
발끈한 오스카는 당장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더는 이런 식으로 인생을 허비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스카는 일리아가 수도로 돌아오면 반드시 최고의 마법사가 되어 그녀를 맞이하겠다고, 그렇게 다짐하며 다시금 공부에 열을 올렸다.
‘나를 까먹고 있었던 건 조금 충격이었지만.’
오스카는 고개를 내저으며 상념을 털어 냈다. 직급으로라도 일리아의 위에 서고 싶어 덜컥 단장직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그 역시 자신의 일에 허투루 임할 생각은 없었다.
“다들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군.”
“오셨습니까, 단장님!”
오스카는 어깨를 가볍게 풀며 말했다.
“나도 참여하지.”
* * *
시간은 흘러, 드디어 프노이트 사절단의 내방일이 다가왔다. 일리아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피델리오 플레타의 감시 역으로서 파티장 내부 경비를 서게 되었다. 사실 오스카는 일리아가 직접 환영 파티에 참석하여 그를 밀착 감시 하기를 원했지만 인력이 부족한 탓에 어쩔 수 없었다.
마법사단은 혈통을 중요시하는 기사단과 달리 재능만 있으면 누구든 입단이 가능했다. 그렇다 보니 귀족보다는 평민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고, 이렇게 귀족만이 수행 가능한 임무가 생기면 늘 인력이 부족하곤 했다.
이번 역시 그랬다. 그나마 이번에는 기사단과 함께 경비를 서기 때문에 사정이 나았지만, 통솔자의 존재는 필수 불가결했다. 때문에 환영 파티에 참석하는 오스카를 대신해 일리아가 모든 경비 인력의 통솔권을 넘겨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 환영 파티에 불참할 수 있게 된 건 다행이었지만 파티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 경비를 서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종일 거기 있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아.”
일리아의 투정에 옆에 가만히 서 있던 에나가 대꾸했다.
“그래도 이번 환영 파티는 하루뿐이라면서요.”
“맞아. 그나마 다행이지.”
사절단을 환영하는 파티는 대개 일주일에 걸쳐 열리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운이 감도는 시기였고 프노이트 왕국 또한 제국의 입장을 이해한다고 전해 왔기에 환영 파티는 하루로 대폭 축소되었다.
“하루만 고생하면 되겠네요.”
“아니. 이틀이야. 오늘도 고생해야 하니까.”
오늘은 프노이트 사절단의 환영식이 있는 날이었다. 사절단을 맞이하는 환영식에는 황족과 고위 귀족, 그리고 황실의 주요 인사들이 모두 참석한다. 지켜야 할 대상이 늘어나면 병력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에 따라 기사단과 마법사단 또한 근위대를 도와 경비 임무에 나서게 되었다.
“폐하께서도 너무하시지. 이런 꼭두새벽부터…….”
“어쩔 수 없잖아요. 까라면 까야죠.”
“…에나,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그냥 주워들었어요.”
“그런 거 주워들을 시간에 옷이나 줘.”
에나는 일리아가 늘 입던 푸른 제복이 아닌, 보라색 무늬가 정교하게 자수 놓여 있는 검은 제복을 꺼내 왔다. 이 제복은 황실에서 지급한 것으로 황실의 공식적인 행사 때만 입을 수 있는 일종의 예복이었다.
“입어 보는 건 처음인데 딱 맞네.”
“잘 어울리세요.”
일리아는 몸에 빈틈없이 들어맞는 제복을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지. 그럼 다녀올게, 에나.”
“조심히 다녀오세요.”
저택을 나선 일리아는 호신용 단검을 차고 마차에 올라탔다. 벽을 가볍게 두드리자 작은 소음과 함께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황성 정문을 지나쳤고, 곧이어 환영식이 열리는 아제르궁에 도달했다.
사절단의 거처이기도 한 아제르궁은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라고 할 수 있었다. 거대한 황금을 깎아 만든 기둥부터 천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수십만 개의 다이아몬드까지. 무엇 하나 가치 없는 것이 없었다.
“와, 저게 다 얼마야?”
일리아의 중얼거림에 어느새 다가온 오스카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마 작은 나라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을걸?”
“그 정도입니까?”
“그렇다고 들었어.”
“뭐 하러 궁 하나에 그만한 돈을…….”
“기선 제압이지, 뭐.”
아제르궁은 대대로 사절단의 거처로 쓰였다. 즉, 그들에게 아제로스 제국의 위엄과 재력을 과시하기에는 이만한 방법도 없다는 것. 일리아는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효과는 있겠네요.”
“홀 안은 더 엄청나. 한번 볼래?”
“사양하겠습니다. 그냥 제 일이나 할게요.”
오스카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어쩔 수 없고. 복도는 맡길게, 부단장.”
오스카가 메인 홀 안으로 들어가고, 일리아는 잔뜩 긴장한 단원들을 적당히 배치하여 경비에 만전을 기했다.
그런데 그때, 작은 문제가 생겼다. 기사단은 현재 단장과 부단장이 모두 환영식에 참석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직급이 가장 높은 일리아가 기사단 역시 책임지게 되어 있었는데, 일부 나이 많은 기사들이 그녀의 명령을 들은 체 만 체하며 멋대로 굴기 시작한 것이다. 전부 일리아와 연이 없는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소속 부대도 다르고 나이도 어린 데다가 여자이기까지 한 일리아의 명령은 따르지 못하겠다며 대놓고 무시를 해 댔다.
일리아는 고민했다. 아직은 여유가 있었기에 잠시 놓아두어도 괜찮았지만, 언제까지나 그들의 억지를 들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여기서 확실하게 기강을 잡아야 뒤탈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욕먹는 건 나중에 생각하자.’
생각을 마친 일리아는 가장 연륜 있어 보이는 기사를 향해 물었다.
“이름이 뭐지?”
그는 일리아의 자연스러운 하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얼굴을 설핏 찌푸리며 대답했다.
“패트릭 패터슨입니다.”
“그래, 패터슨 경. 내가 아무리 경보다 경험도 적고 어리다고는 하나 공식적인 직급은 더 위고 지금은 경들을 통솔할 권한 또한 가지고 있어. 그러니까 얌전히 명령에 따라 줬으면 좋겠는데.”
고압적인 일리아의 말투에 패트릭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저희는 자랑스러운 아제로스 제국의 기사들입니다. 경의 명령 없이도 잘 처신할 수 있습니다.”
“이게 잘 처신한 결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