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마력이 반쯤 뻗어 나갔을 무렵이었다. 돌연 호수 너머에서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이건 분명히 사람의 기척이었다. 일리아는 즉시 마법을 거두고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두 명인가?’
우거진 수풀 사이로 작은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는 커다란 나무 뒤에 숨어 귀를 기울였다.
“자꾸 이렇게 불러내시면 제가 곤란해집니다, 그레고리 경.”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신을 마음 편히 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이런 식은 곤란합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전하의 곁에 있는 당신을 보는 게 너무 괴로워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전하? 게다가 그레고리 경이라고?
일리아는 눈을 부릅뜨며 입을 틀어막았다.
듀크 그레고리. 그는 그레고리 백작 가문의 주인이자 황실 근위대의 부대장이었다. 그리고 몇 년 전에 결혼식을 올린 어엿한 유부남이기도 하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일리아는 고개를 살짝 빼고 두 사람을 주시했다. ‘전하’라는 호칭이 나왔을 때부터 어렴풋하게 눈치채긴 했지만, 곱슬거리는 보라색 머리카락을 보니 확신이 섰다. 현재 듀크 그레고리와 은밀하게 만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지젤 아르투아였다.
듀크는 지젤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보고 싶었습니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그레고리 경.”
“시도 때도 없이 당신이 생각나 어찌나 곤혹스럽던지.”
지젤의 손을 지분거리던 듀크는 이내 그녀의 여린 몸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지젤은 손을 바르작거리면서도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듀크 그레고리는 무려 한 가문의 가주이자 근위대의 부대장이 아니던가. 그녀가 함부로 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못 볼 걸 봤네.’
일리아는 듀크의 끈덕진 구애를 뒤로한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나무 위에서 작은 열매가 떨어져 일리아의 제복 장식을 건드렸다. 고요한 숲속에 쨍! 하고 거친 금속음이 울렸다.
“누구냐!”
일리아는 숨을 들이켰다.
듀크 그레고리는 직급에서도 알 수 있듯이 황실의 몇 안 되는 실세 중 하나였다. 즉, 이대로 들킨다면 일리아는 물론이고 그라니체 가문마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어떡하지…….’
우왕좌왕하던 일리아는 길게 자라난 잡초를 움켜쥐었다. 여차하면 불을 지르고 도망갈 속셈이었다. 어차피 근처에 호수가 있으니 불이 크게 번지지는 않을 터였다. 또다시 황실의 재산을 태워 먹는다는 게 못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일단은 살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예민해진 귓가로 스르릉 하고 검을 뽑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는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불씨를 피워 올렸다.
일촉즉발의 상황. 듀크의 검이 하늘 높이 치솟아 올랐을 때였다. 지젤이 돌연 꺅! 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듀크는 황급히 검을 갈무리하며 몸을 돌렸다.
“미안합니다, 지젤. 많이 놀랐…….”
“바, 방금 저쪽에 뭔가가 있었어요!”
지젤은 건너편 수풀을 가리키며 몸을 덜덜 떨었다.
“위험할지도 모르니 일단 황성으로 돌아가 계십시오. 여긴 제가 맡겠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레고리 경.”
듀크는 지젤을 애틋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다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숲을 벗어나면서 소리가 났던 나무를 힐끔 쳐다봤지만, 당연하게도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후, 십년감수했네.’
어느새 다른 나무 뒤로 피신한 일리아는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 지젤이 돌아가는 틈을 타 이곳을 벗어나기만 하면 되었다. 일리아를 들여보내 주었던 기사가 그녀의 방문을 보고하긴 하겠지만, 마주치지 않았으니 쉽게 추궁할 수는 없을 터였다.
일리아는 땀으로 흥건해진 손바닥을 제복 자락에 대충 닦아 내며 발소리에 집중했다. 곧, 사박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이제 나와도 돼요, 일리아.”
소스라치게 놀란 일리아는 몸을 움찔 떨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솜털이 쭈뼛 섰다. 확신에 가득 찬 지젤의 음성은 일리아에게 알 수 없는 경계심을 심어 주었다.
“괜찮아요. 그레고리 경께는 비밀로 할게요.”
“…어떻게 알았어요?”
“원래 마족은 마력에 예민하거든요. 일리아의 마력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구분하기가 쉬운 편이기도 하고요.”
일리아는 마지못해 나무 뒤에서 걸어 나왔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요?”
“얼마 안 됐어요.”
“그레고리 경과는…….”
지젤은 난처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얼마 전에 도움을 드린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계속 저러시네요.”
“…고생이 많네요.”
“아니에요. 전하께서 자주 위로해 주시는걸요.”
“전하께서도 아세요?”
“그럼요. 일단은 적당히 상대해 주라고 하셨어요. 그레고리 경은 성격이 모난 데가 있어서 자극해 봤자 좋을 게 없다고…….”
일리 있는 말이었다. 부인이 있음에도 다른 여자에게 구애를 하는 남자가 정상일 리 없었다.
“그래도 오늘 본 건 비밀로 해 주세요, 일리아. 떳떳한 일은 아니니까요.”
“물론이죠. 걱정하지 마요.”
“고마워요. 그럼 조심히 들어가요.”
“지젤도요.”
일리아는 지젤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서둘러 호숫가를 벗어났다.
“다 둘러보셨습니까?”
산책로 어귀로 나오자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기사가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네. 호수 안에 뭐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딱히 눈에 띄는 건 없네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숲에서 증거를 찾았다는 보고가 들어왔거든요. 곧 마물을 풀어놓은 범인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그럼 고생해요.”
일리아는 목뒤를 주무르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 *
며칠 후. 오스카는 일리아의 의견을 수렴하여 주 2회에 달하는 실전 훈련 일정을 잡아 주었다. 오늘이 바로 그 첫날이었다.
일리아는 연무장에 모인 단원들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단원들은 극명하게 두 무리로 나뉘어 있었다. 일리아와 함께 출정했던 마법사들과 이번에 새로 입단한 마법사들. 전자는 실전 훈련을 반기는 눈치였고, 후자는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알력에 짧게 한숨을 내쉰 일리아는 단원들 모르게 조용히 연무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두 무리로 갈라진 단원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가 선수를 쳤다.
“이론 공부만으로도 빠듯해 죽겠는데 실전은 무슨…….”
작지 않은 목소리였다. 시끌벅적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는 후자의 무리에서 들려온 것이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두꺼운 마법서를 품에 안은 채 연신 구시렁댔다.
‘퍼렐 램지. 바람 속성. 파견 임무 전무.’
일리아는 수도 없이 읽었던 신상명세서를 떠올리며 그를 주시했다.
“기사들도 실전 훈련은 꾸준히 해. 불평하지 마.”
퍼렐의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레널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라고?”
레널드의 일침에 울컥한 퍼렐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언성을 높였다.
“기사들이 실전 훈련을 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적들과 직접 대면해야 하니까. 하지만 우리는 후방에서 지원만 하면 되는 입장이라고. 난 지금 당장도 싸울 수 있어.”
“전쟁을 쉽게 보지 마. 후방에서 지원만 했으면 결원이 왜 생겼겠어? 그러니까 너 같은 것도 뽑힌 거겠지.”
레널드의 비아냥거림에 퍼렐은 이를 악물었다.
“그런 약한 놈들과 나를 비교하지 마. 죽기 싫었으면 출정하기 전에 마법 공부부터 제대로 했어야지! 그럼 그렇게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그걸 말이라고!”
“이종족에 관한 교육도 얼마 전에 끝난 참이고, 마법학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랄 지경인데 왜 이런 쓸데없는 훈련까지 받아야 하는 거야?”
퍼렐은 몸을 부들부들 떠는 레널드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게다가 실전 훈련의 교관이 부단장님이라며? 그것도 좀 그래. 전쟁을 앞두고 갑자기 부단장이 되셨다던데, 솔직히 그런 사람에게 배울 게 뭐가 있겠어?”
“부단장님에 관해서 함부로 말하지 마!”
“내가 뭐 틀린 말 했어?”
“이 자식이!”
레널드가 겉옷을 거칠게 벗어 던지더니 퍼렐을 향해 돌진했다. 덕분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던 연무장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짧은 비명과 함께 거친 타격음이 터져 나왔다. 일리아는 엉망진창으로 엉겨 붙기 시작한 그들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마력을 가득 담은 외침에 모두가 흠칫 몸을 떨었다. 특히나 레널드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사색이 되어 후다닥 뒤로 물러섰다.
“레널드 메이헴.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죄송합니다, 부단장님.”
일리아는 고개를 푹 숙인 레널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죄송하면 벌을 받아야지.”
“무, 무슨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좋아.”
일리아는 시선을 돌려 퍼렐을 바라봤다.
“싸운 건 두 사람이니 벌도 똑같이 받아야겠지?”
“저는 그저……!”
“둘 다 가운데로 와. 다른 사람들은 물러나고.”
일리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왠지 모를 위압감이 섞여 있었다. 그에 레널드와 퍼렐의 싸움에 은근슬쩍 손을 보태던 단원들은 몇 걸음씩 뒤로 물러섰다.
일리아는 망토를 바닥에 툭 내려놓더니 두 사람을 향해 씩 웃었다.
“같이 덤벼.”
“네?”
“실전이 왜 중요한지 알려 줄 테니까.”
퍼렐이 멍청하게 반문하는 사이 자세를 바로잡고 두어 걸음 물러선 레널드는 빠르게 마력을 끌어올려 허공에 주홍색 불꽃을 피워 냈다. 그렇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레널드는 바로 불 속성의 공격형 마법사였다.
“전력으로 가겠습니다!”
레널드는 불꽃을 몸에 두르고 바닥을 박찼다.
“잡았다!”
순식간에 일리아의 앞에 도달한 레널드는 그녀를 향해 수십 개의 불꽃을 쏘아 보내는 것과 동시에 맹렬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불꽃의 비와 살벌한 육탄 공격은 보는 사람마저 오금이 저릴 정도로 엄청났다. 단원들은 이러다 부단장님마저 새로 맞이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수군거렸다.
그러나 일리아는 부지불식간에 쏟아지는 공격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몸을 돌려 레널드의 손목을 낚아챈 일리아는 오른 다리를 바닥에 단단히 박아 넣은 후 있는 힘껏 레널드의 몸을 휘둘렀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불꽃의 비를 그의 몸으로 막아 낸 것이다. 정말이지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어였다.
“크흑, 부단장님!”
레널드는 이를 악물며 일리아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그의 마력으로 이루어진 불꽃이라 뜨겁지는 않았지만 가속도가 붙은 불꽃들이 온몸을 때리면서 자잘한 충격이 전해졌다.
“이게 끝은 아니겠지?”
“설마요!”
레널드는 바닥에 단단하게 뿌리 내린 일리아의 몸을 축 삼아 허리를 돌리더니 그대로 그녀의 측면을 노렸다. 절묘한 공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