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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43)화 (43/101)

43화 

“몸은 괜찮아?”

“네. 괜찮아요.”

“피곤해 보이는데.”

카일루스가 허리를 살짝 숙이며 일리아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예고도 없이 가까워진 말간 얼굴에 일리아는 어깨를 흠칫 굳혔다.

“다, 당연하죠. 야근 중이었잖아요.”

“잠은 잘 자고 있는 거야?”

“그럼요. 잠도 잘 자고 있고 아픈 데도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거짓말에 서툰 건 집안 내력인가 보군.”

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카일루스는 태연하게 일리아의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잔뜩 굳어 있는 일리아를 소파에 눕혔다.

소파가 그리 크지 않았던 탓에 일리아는 자연스럽게 카일루스의 무릎을 베게 되었다. 탄탄하다 못해 딱딱한 허벅지 때문에 뒤통수가 배겼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했다.

“카, 카일루스?”

“잠깐 눈 좀 붙여. 깨워 줄 테니까.”

“…지금 자면 집에는 언제 가고요?”

“이따 가면 되지.”

카일루스는 답지 않게 일리아의 팔을 토닥이며 그녀를 재우기 위해 애썼다.

일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카일루스를 올려다봤다. 그가 왜 이런 이상 행동을 보이는지, 어렴풋하게 감이 왔다.

“카일루스.”

“왜?”

“호수에서 있었던 일로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요.”

“…누가 그렇대?”

역시나.

카일루스는 정곡을 찔린 사람처럼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전장에서도 그러더니 또 혼자 짊어지려는 속셈인 듯했다. 괜히 울컥한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얼굴을 다시금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말했다.

“제가 카일루스였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거예요. 어떤 상황이든 카일루스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

“호수에 끌려 들어간 건 제 불찰이었어요. 카일루스의 탓이 아니에요.”

“그래도…….”

“정 미안하면 올린이 만든 쿠키나 가져다주시든가요. 설탕 팍팍 넣은 걸로요.”

다정한 일리아의 말에 카일루스는 결국 소리 내어 웃어 버렸다. 정말이지 신기한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늘 카일루스를 짓누르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이렇듯 한 번에 날려 버리곤 했다. 마정석 채석장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그렇게 웃으시니까 보기 좋네요. 자주 웃어요.”

“실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잠이나 자.”

일리아는 큭큭거리며 눈을 감았다. 집에서는 눕기만 해도 그때의 기억이 밀려와 숨이 막히곤 했었는데 오늘은 왠지 편히 잘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럼 진짜 잘게요. 이따 깨워 줘요.”

“그래.”

곧,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카일루스는 일리아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거뭇해진 눈가가 못내 마음 아팠다.

‘일리아가 편해지기 위해서는 황제부터 쳐 내야겠지.’

카일루스는 일리아의 팔을 조심스럽게 토닥이며 온갖 살벌한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창을 통해 들어오던 달빛이 옅어졌을 무렵이었다. 돌연 ‘부단장님!’ 하는 우렁찬 외침과 함께 문이 열렸다. 곤히 자고 있던 일리아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무, 무슨 소리…….”

“헉!”

환하게 웃으며 부단장실 안으로 들어오던 레널드가 덜컥 움직임을 멈췄다. 낯빛은 사색이 된 지 오래였다.

“레널드?”

“부단장님…….”

“들어오기 전에는 노크부터 하라고 했잖아.”

“죄, 죄송합니다! 주무시는 것 같아 깨워 드리려고 온 건데…….”

주절주절 변명을 늘어놓던 레널드가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그의 시선은 카일루스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러고 보니 레널드는 전장에서도 유독 카일루스를 무서워했었다. 그의 막사에 다녀온 날이면 죽는 줄 알았다며 드러누울 정도로.

일리아는 순식간에 핼쑥해진 레널드를 바라보며 작게 헛기침을 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앞으로는 안 그래도 돼. 주의하도록.”

“아, 아, 알겠습니다!”

“나가 봐.”

“넵! 죄송합니다!”

레널드가 후다닥 도망치자 일리아는 기지개를 쭉 켜며 몸을 풀었다.

“레널드 때문에 깨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푹 잔 것 같아요.”

“아까는 잘 자고 있다면서?”

“…아직 잠이 덜 깼나 봐요.”

카일루스가 잔뜩 흐트러진 일리아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

“가자. 데려다줄게.”

“네!”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의 손을 꼭 붙잡았다.

* * *

이튿날. 일리아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마차에서 내려섰다. 전일 부단장실에서 잠들어 버린 탓에 밤잠을 제대로 설치고 말았다. 덕분에 정신이 몽롱하고 온몸이 물먹은 드레스처럼 무거웠다.

‘카일루스는 그렇게 조금 자면서 어떻게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는 거지?’

일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느긋하게 교육실로 향했다.

오늘은 오스카의 마법학 교육이 있는 날이었다. 교육실에 다다르니 한껏 들뜬 단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는 삼삼오오 모여 있는 단원들을 일별하고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부단장님…….”

일리아가 삐딱하게 앉아 마법서를 뒤적거리는데 어느새 교육실 안으로 들어온 레널드가 음울한 얼굴로 다가왔다.

“왜 그렇게 죽상이야?”

“오전에 호출이 있었거든요.”

“단장님?”

“아니요, 각하요…….”

레널드는 일리아의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새벽에 호출이 있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출근하자마자 달려갔죠. 그런데 글쎄 각하께서 말입니다!”

“각하께서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 겁니다! 저를 앞에 세워 두고 십 분이 넘도록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셨습니다. 차라리 화라도 내셨으면 덜 무서웠을 텐데 말이죠! 그 숨 막히는 침묵이란…….”

퍼드덕거리며 몸서리를 치던 레널드는 돌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부단장님, 두 분께서 사이가 좋으신 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일터에서는 자제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일리아는 헛기침을 하며 레널드의 뒤통수를 가볍게 내리쳤다.

“시끄러워. 어차피 근무 시간도 아니었는데, 뭐. 잔말 말고 노크나 잘해. 다음부터는 안 봐줄 거니까.”

“알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레널드가 고개를 숙이며 은근히 속삭였다.

“진도는 어디까지 나가신 겁니까? 제 예상으로는 상당히……. 악!”

일리아는 계속해서 조잘거리는 레널드의 입에 미지근한 화염구를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몸을 들썩거리는 그를 뒤로한 채 마법서로 시선을 돌렸다. 위력을 많이 조절했으니 다치지는 않을 터였다.

“이건 읽어 봤어?”

“흐아, 죽다 살았네! 아직 안 읽어 봤습니다. 공부하고는 연이 없는 편이어서……. 아니, 그보다 죽을 뻔했잖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호들갑 떨지 마.”

일리아는 픽 웃으며 마법서를 대충 훑었다.

“…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데?”

사실 마법사 협회가 직접 만든 마법서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일리아는 내심 실망했다. 마법사단의 부단장이자 마법사 협회의 회원인 그녀는 그들의 지식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카데미에 지급하는 마법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이 마법서는 기존에 있던 양산형 마법서들과는 달리 마법을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놓은 데다가 마력의 수식과 응용 역시 이해하기 쉽게 설명되어 있었다. 오스카가 말했던 대로, 기본기가 약한 단원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듯했다.

‘그 고지식한 놈들이 웬일이래? 이런 걸 다 만들고.’

흥미가 생긴 일리아는 저자를 확인하기 위해 책장을 넘겼다.

“다들 모였나?”

그런데 그때, 교육실 안으로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근엄한 얼굴을 한 미인, 오스카 헤이스팅스였다. 일리아는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마법서를 덮었다.

“오늘은 첫날이니 가볍게 마력에 관한 것부터 시작하지. 마력이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한 에너지로서…….”

오스카는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어찌나 막힘없고 유창하던지, 이론이라면 학을 떼는 레널드마저 경청할 정도였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곧 실전도 병행할 테니 다들 준비 단단히 해 둬.”

“네!”

단원들은 교육이 끝난 이후에도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만큼 오스카의 강의는 완벽했다.

“어땠어, 부단장?”

마법서를 챙겨 교육실을 나서려는데 오스카가 일리아의 앞을 가로막으며 대뜸 물어 왔다.

“소감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이 마법서, 어땠어?”

오스카는 무언가를 기대하는 사람처럼 눈을 빛냈다. 왠지 아카데미 때의 그를 보는 것 같아 일리아는 괜히 웃음이 새어 나왔다.

“좋았습니다. 확실히 도움이 되겠던걸요.”

일리아의 대답에 오스카는 커다란 눈망울을 한껏 접으며 웃었다.

“그렇지? 내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는데! 당연히 그렇겠지!”

“‘내가’라니……. 단장님께서 만드신 겁니까?”

“맞아. 발령받기 전에 만든 거야.”

“마법사 협회에서 피땀 흘려 만든 거라면서요? 이거 사기 아닙니까?”

일리아의 말에 오스카가 펄쩍 뛰었다.

“당연히 아니지! 나도 단장이 되기 전까지는 엄연히 협회의 마법사였다고.”

“그렇게 따지면 뭐…….”

“아무튼!”

오스카가 일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소감 고마워. 난 먼저 가 볼게, 부단장. 부단장도 적당히 퇴근해!”

오스카에게 꾸벅 인사를 한 일리아는 텅 빈 교육실을 대충 정리하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마법사단 본부를 나선 일리아는 그라니체 저택이 아닌, 중앙 광장의 산책로로 향했다. 지금까지는 애써 피해 왔지만 한 번쯤은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통제하고 있구나.’

일리아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조용한 산책로를 묵묵히 따라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산책로 끝에 다다르자 한 기사가 앞으로 나서며 일리아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마법사단의 부단장, 일리아 그라니체입니다. 잠시 확인할 게 있으니 비켜 주세요.”

일리아의 제복과 배지를 확인한 기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몸은 다 회복하신 겁니까?”

“그럼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들어가시는 건 상관없지만, 지금 근위대의 그레고리 부대장님께서 와 계십니다. 워낙 방해받는 걸 싫어하는 분이시라 빨리 둘러보고 나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알겠어요.”

일리아는 기사에게 목례를 하고 호수가 있는 숲속으로 들어섰다.

그때는 아름답게만 보였던 호수가 지금은 죽음을 두른 듯 한없이 음침해 보였다. 일리아는 미약하게 숨을 헐떡거리며 목을 움켜쥐었다.

‘괜찮아. 지금은 물속도 아니잖아. 진정해, 일리아.’

짧게 심호흡을 한 일리아는 호숫가에 걸터앉아 조심스럽게 탐지 마법을 펼쳤다. 푸른 마력이 그물망같이 넓게 퍼지면서 짙푸른 호수를 뒤덮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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