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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42)화 (42/101)

42화 

“제군들도 알다시피 나는 마법사단 출신이 아니다. 이전까지는 마법사 협회에 있었지.”

오스카의 말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일부는 마법사 협회 출신 엘리트인 그를 반기는 눈치였고, 다른 일부는 마법사단에 대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그가 단장이 된 것을 우려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제군들에게 도움이 되는 부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일리아를 힐끔 쳐다본 오스카는 한 발 앞으로 나서며 강인하게 말했다.

“현재 아제로스 제국은 전례 없는 위기 상황에 내몰려 있다. 테멜 왕국과의 협상이 결렬된 것으로도 모자라 마물까지 출몰하기 시작했지.”

오스카의 시선이 좌중을 훑었다.

“이런 때에 내 출신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나는 마법사단의 새로운 단장으로서 제군들을 단련시키고, 마법사단의 근간을 다잡을 생각이다.”

오스카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햇볕을 받아 밝게 반짝였다.

“일단 그 첫걸음으로 제군들에게 마법사 협회가 직접 만든 마법서로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마법사단은 체내의 마력과 자연계의 마력을 제대로 느낄 줄만 알면 마법 수식을 몰라도 입단할 수 있다더군. 개인마다 가지고 있는 지식도 천차만별이겠지. 일단 그 격차를 줄이는 데 집중한다.”

오스카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제군들의 손으로 제국을 직접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이끌겠다.”

우려 섞인 소란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오스카의 외침이 넓은 연무장을 가득 울렸다.

“아제로스 제국의 영광이 되고 싶은 자는 나를 따라라!”

“와아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단원들은 이미 오스카의 연설에 감화되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법사 협회는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마법 실력, 그리고 끊임없는 탐구 정신을 가진 마법사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다. 그런데 무려 그런 곳에서 만든 마법서로 교육을 시켜 준다고 하지 않는가. 범인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마법서일 터였다.

지금까지 마법사 협회에서는 아카데미에서 마법학을 수학하는 학생에게만 양산형 마법서를 지급해 왔다. 즉, 학비를 낼 능력이 없어 마법학을 배우지 못한 평민들과 더욱 심도 깊은 교육을 원했던 귀족들에게는 염원하던 기회가 온 셈이라는 것.

오스카는 그런 마법사들의 열정을 제대로 건드렸다. 새로운 단장으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적응은 어렵지 않겠네.’

협회에서 넘어온 마법사들은 대체로 거친 군부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전속을 요청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나 오스카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온 것인지 우레와 같은 함성 속에서도 결코 위축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반응을 즐기고 있는 듯했다. 일리아는 혀를 내두르며 단원들을 따라 박수를 쳤다.

“그라니체 부단장.”

그때였다. 단상에서 내려오던 오스카가 일리아를 불렀다.

“네, 단장님.”

“잠깐 나 좀 보지, 부단장.”

일리아는 단상에서 내려와 건물로 향하는 오스카를 삐뚜름하게 바라봤다. ‘부단장’이라고 부를 때마다 묘하게 목소리에 힘을 주는 것이, 오스카는 어쩐지 일리아에게 언짢은 게 있어 보였다. 자신이 헤이스팅스 가문과 척을 진 적이 있나 곰곰이 생각하던 일리아는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오스카의 뒤를 따랐다.

“앉아.”

일리아는 소파에 앉으며 빠르게 단장실을 훑었다. 고즈넉하던 단장실은 마치 대저택의 응접실처럼 변모해 있었다. 입구에 세워져 있는 황금 조각상부터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알록달록한 그림들까지. 아주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일리아는 문득 검소하기 그지없었던 휴스턴 백작이 보고 싶어졌다. 앞으로는 보고할 것이 생길 때마다 이 오색찬란한 방에 들어와야 하지 않는가. 생각만 해도 부담스러웠다.

“그라니체 부.단.장.”

또, 또!

역시나 착각이 아니었다. 오스카는 ‘부단장’이라고 말할 때마다 묘하게 목에 힘을 주었다. 일리아는 짐짓 모르는 척, 태연하게 대답했다.

“말씀하십시오.”

“나 기억 안 나?”

“…네?”

전혀 모르겠다는 눈빛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오스카가 눈을 부릅떴다.

“기억 안 난다고?”

“네.”

“어떻게 네가 나를 기억 못 해! 네가 귀환했을 때 초대장까지 보냈었는데!”

그러고 보니 저택으로 도착한 초대장 중에 헤이스팅스 가문의 초대장도 섞여 있었던 듯했다.

“아, 기억났습니다.”

“기억났어?”

“네. 그때 거절해서 죄송했습니다. 별로 여유가 없었거든요.”

“그거 말고! 내가 누군지 기억났냐고!”

일리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역시나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일리아가 고개를 내젓자 오스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한 손가락을 들어 올려 자신의 말간 얼굴을 가리켰다.

“하! 이 빛나는 외모를 기억 못 한다고?”

“…사과드려야 합니까?”

“나잖아, 나! 오스카 헤이스팅스! 항상 네게 밀려 차석에 그쳤던 그 꽃미남!”

“차석……. 아!”

일리아는 눈을 세차게 깜박거렸다.

오스카 헤이스팅스. 그는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던 시절부터 끈질기게 일리아의 뒤를 쫓아다니며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던 남자였다. 얼마나 집요하게 쫓아다니던지, 아카데미 동기들은 그를 ‘구르는 강아지’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런 오스카를 왜 바로 기억해 내지 못했는가. 그 이유는 바로 오스카의 별명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구르는 강아지’라는 별명의 ‘구르는’은 오스카의 비대한 몸집을 이르는 말이었다. 당시 오스카는 걷는 모습이 구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살집이 있는 편이었다. 특유의 분홍색 머리카락도 항상 모자로 가리고 다녔으니 당연히 모를 수밖에.

“정말 그 오스카?”

“맞아! 이제 기억난 거야? 내가 바로 그 오스카 헤이스팅스라고!”

일리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오스카를 훑었다.

“그… 많이 달라졌네?”

“요새 연구에 열중하느라 식사를 제때 못 했거든. 살이 조금 빠졌지?”

“응, 뭐…….”

“살 좀 빠졌다고 못 알아보다니. 정말 실망이야, 그라니체 부단장.”

이렇게 달라졌는데 알아보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닐까?

일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나를 부를 때마다…….”

“음?”

“바로 기억하지 못한 건 미안한데,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아니. 딱히 없어. 그저 상사가 부하의 직함을 부르는 것뿐인걸.”

일리아는 기세등등하게 웃는 오스카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꽤 늠름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알맹이는 그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듯했다.

“어떻게 네가 단장이 된 거야?”

“아버지께 부탁드렸지.”

“헤이스팅스 후작님께서 그런 부탁을 들어주셨다고?”

“오해하지 마. 아버지는 기회만 주셨을 뿐, 순전히 내 실력으로 붙은 거니까.”

오스카의 해명에도 일리아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마법사단의 단장 시험은 전 단장의 참관하에 이루어졌다. 건강상의 이유로 물러나긴 했지만 휴스턴 백작은 꽤 엄격하고 고지식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뒷배경을 이용해 자격을 얻어 낸 오스카를 용납할 리 없었다.

“진짜야! 휴스턴 백작님께서 내 실력을 인정하셨다고!”

“진짜라고?”

“그래!”

“그렇다면 뭐…….”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 오스카는 몸을 일으키더니 책장에서 두꺼운 마법서를 두어 권 꺼내 왔다.

“아무튼 그런 이야기나 하자고 부른 건 아니고, 이거.”

“마법서?”

“아까 말했잖아. 마법사 협회에서 만든 마법서로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마법사단은 당분간 이걸로 이론 공부에 전념하게 될 거야.”

일리아는 반 뼘은 족히 되어 보이는 마법서들을 바라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이런 시기에 고작 마법서 몇 권으로 이론 공부나 시키겠다고?”

“고작 마법서 몇 권이라니! 이건 마법사 협회에서 종일 피땀 흘려 가며 만든 최고의 역작이라고!”

몸을 부들부들 떨던 오스카가 흥분을 가라앉히며 말을 이었다.

“마법사라면 자고로 마법의 기본이 되는 마력과 속성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응용할 줄 알아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확실한 지식이 뒷받침되어야 하고.”

“하지만 오스카, 단원들은 이미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수도 없이 치렀어. 이제 와서 이론이 중요할 것 같아?”

“말은 바로 해야지, 일리아. 모든 단원이 전쟁을 겪은 건 아니잖아. 이론은 중요해. 어렴풋하게 아는 것과 확실하게 아는 건 다르니까.”

일리아는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곧 전쟁이 터질 거야. 실전 훈련이 훨씬 시급해.”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지난 전쟁으로 많은 결원이 발생했고, 많은 단원을 선발했어. 개중에는 실력이 변변치 않은 단원도 분명히 있다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단원들을 데리고 주먹구구식 훈련을 하고 싶지는 않아.”

“…그건 일리 있네.”

“너무 걱정하지는 마. 실전 훈련에 관해서도 충분히 검토해 볼 테니까.”

이어 오스카는 부드럽게 웃으며 마법서를 탁탁 내리쳤다.

“곧 사본이 도착할 거야. 단원들한테 잘 나눠 줘, 부단장.”

“하아, 알겠습니다, 단장님.”

단장실에서 나온 일리아는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다 몸을 휙 돌렸다.

* *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일리아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종일 신상명세서만 들여다보고 있었더니 좀이 쑤셨다.

‘결원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일리아는 수북이 쌓여 있는 신상명세서를 바라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테멜 왕국과의 전쟁은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것은 마법사단 역시 마찬가지였다. 은퇴하거나 죽은 단원이 무려 수백이었다. 그에 따라 일리아의 휴가 기간 동안 거의 백여 명에 달하는 단원이 새로이 선발되었다. 덕분에 명단을 확인하는 데만 하루가 꼬박 걸렸다.

“에나한테 마사지라도 해 달라고 해야지.”

일리아는 단단하게 채워져 있는 셔츠의 위 단추를 풀며 문을 열었다. 그러다 막 문을 두드리려던 남자와 정통으로 부딪치고 말았다.

“들어올 거면 빨리 들어오지, 뭐 하는…….”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문지르던 일리아는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카일루스? 여기까진 무슨 일이에요?”

“복직했다고 들어서. 근데 왜 첫날부터 야근이야?”

“아, 볼 게 조금 있어서요. 잠깐 들어올래요?”

카일루스는 군소리 없이 들어와 소파에 앉았다.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서 왠지 모를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당연했다. 그동안 편지를 자주 주고받긴 했지만 만나는 건 그 사건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렇게 카일루스를 마주하니 불현듯 그날의 기억이 치솟았다. 일리아는 괜히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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