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저는 괜찮으니까 진정해요.”
“…다음부터는 무기라도 가지고 다녀. 그대 때문에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어.”
“무기가 있긴 했는데……. 아무튼 구해 줘서 고마워요.”
“위험할 것 같으면 내 옆에 딱 붙어 있고.”
일리아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같이 위험해지면 어떡해요?”
“그럴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알겠어요. 믿을게요.”
카일루스의 몸을 제게서 떼어 낸 일리아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와 핏기 어린 입술 탓에 어쩐지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카일루스.”
“왜?”
“얼굴이 너무 야해요.”
“…뭐?”
“진심이에요. 그러니까 조금만 떨어져 봐요. 딱 세 걸음만…….”
카일루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슬금슬금 몸을 물렸다.
“이제 됐어?”
“네. 딱 좋아요.”
“아까 일은 기억 나?”
“어렴풋하게요.”
베개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앉은 일리아는 흐릿한 기억을 되새기며 마물에 관해 설명했다.
“또 마계의 마물인가?”
“네. 확실해요.”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카일루스가 넌지시 말을 꺼냈다.
“사실 호수에서 수상한 자를 봤어.”
“수상한 자요?”
“전장에서 별동대를 기습했던 자.”
일리아는 얼굴을 굳혔다. 호수의 마물 또한 그자의 소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번에도 테멜 왕국의 마족이 손을 쓴 걸까요?”
“그런 것 같긴 한데, 일단 그자와 대화를 나누며 알아낸 게 한 가지 있어.”
“뭔데요?”
“억양이야. 제국어를 쓰고 있었지만, 묘한 억양이 섞여 있었어.”
“그럼 테멜인이 아니라…….”
“맞아. 프노이트인이야.”
프노이트 왕국은 제국어를 쓰는 테멜 왕국과 달리 독자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프노이트인이 제국어를 쓸 때는 무의식적으로 프노이트어의 발음이나 억양이 묻어나는 경우가 많았고, 검은 로브의 괴한 역시 그랬다.
“역시 프노이트 왕국이 화친을 청해 온 건…….”
“테멜 왕국과 관련이 있을 거야. 아니면 그 프노이트인이 독단으로 벌인 일일 수도 있고.”
“점점 복잡하게 돌아가네요. 일단 보고부터 드려야겠어요.”
“보고는 내가 올릴 테니 그대는 푹 쉬고 있어.”
카일루스가 몸을 일으키자 일리아 역시 침대에서 따라 내려오며 말했다.
“저도 같이 가요.”
“쉬고 있어.”
“아니에요. 많이 괜찮아졌어요.”
“…그럼 황성부터 갔다가 집에 데려다줄게.”
“그건 사양하지 않을게요. 고마워요, 카일루스.”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손을 잡고 방을 나섰다. 아니, 나서려고 했다. 문 앞에 묵묵히 서 있던 엘리엇만 아니었다면.
카일루스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엘리엇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아직도 있었어?”
“…가 보겠습니다.”
엘리엇이 후다닥 문밖으로 사라지고, 일리아는 머리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혼삿길 다 막혔네…….
【 마법사단에 복귀하다 】
얼마 후, 황성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면밀하게 조사한 결과 호수에 있던 마물은 온실에서 발견한 것과 마찬가지로 마계에서만 서식하는 식물형 마물로 판명 났다. 거기에 더해 전국 각지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마물을 봤다는 보고가 연일 날아드는 바람에 더는 좌시하지 못할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바이에드는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기사단장과 마법사단장, 그리고 황성의 주요 인사들을 모두 소집했다.
그러나 회의가 며칠 동안이나 계속되었음에도 이렇다 할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마계의 마물들은 마력을 숨기는 것에 익숙해 탐지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은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귀족들은 대책을 마련하기보다는 발견된 마물의 처리 방침에만 의견을 모았고, 회의는 계속해서 원점으로 돌아갔다.
그에 고심하던 바이에드는 마법사단에 주기적으로 전국 각지를 다니며 마물을 수색하고 처리하라는 황명을 내렸다.
그런데 황명이 전달되고 얼마 있지 않아 마법사단장인 휴스턴 백작이 저택에서 쓰러졌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단장은 병환에 부단장은 휴가라니. 마법사단은 당연히 혼란에 빠졌다. 그나마 마법사단에서 잔뼈가 굵은 레널드가 그들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자존심 강한 마법사들은 일개 단원에 불과한 그의 말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레널드는 결국 일리아에게 눈물 젖은 편지를 보냈고, 측은지심을 느낀 일리아는 마지못해 복직 신청을 넣을 수밖에 없었다.
“하아, 이제 휴가도 끝이네.”
“아직 한 달 정도 남지 않았어요?”
“단장님께서 쓰러지셨대. 나라도 복귀해야지.”
에나가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곧 바빠지시겠네요.”
“아마도.”
일리아는 노란 라벤더차를 내려다보며 클리드를 떠올렸다.
며칠 전, 클리드가 모든 교육 일정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의 귀가였지만 일리아는 그와 회포를 풀기는커녕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이번 마물 사건에 일리아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클리드가 다시금 저택을 박차고 나갔기 때문이다.
클리드는 ‘당장 그 쓰레기를 이 세상에서 소멸시켜 버리겠어!’라고 외치며 뛰쳐나간 이후로 벌써 이틀째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분명 마법사 협회의 마법사들에게 붙잡혀 이리저리 착취당하고 있을 것이다. 정말 사서 고생하는 오라버니가 아닐 수 없었다.
‘뭐, 곧 오겠지.’
어깨를 으쓱거린 일리아는 소파에 드러누워 부채를 팔락거렸다.
호수에서 익사할 뻔한 이후로 일리아는 저택에 처박혀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잠을 자려고 눕기만 하면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 숨이 막혔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밤을 지새우다 보니 기력이 하나도 없어 움직일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아가씨, 편지 왔어요.”
그때 에나가 일리아에게 하얀 편지 봉투를 내밀었다. 노란 봉랍으로 봉인되어 있는 봉투에는 ‘카일루스 블레어 에스테반’이라는 이름이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고마워, 에나. 이리 줘.”
편지는 꽤 길었다. 일의 진행 상황과 마정석 채석장의 채석 현황, 그리고 잘 쉬고 있는지에 관한 안부 인사가 총 세 장의 편지지에 가득 담겨 있었다. 일리아는 자꾸만 위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 내리며 헛기침을 했다.
“편지지랑 깃펜 좀 가져다줘.”
“네, 아가씨.”
뭉그적거리며 몸을 일으킨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답장을 썼다.
* * *
그렇게 시간은 흘러, 일리아가 마법사단에 복귀하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목욕을 마친 일리아는 금사로 장식되어 있는 푸른 제복을 입고 왼쪽 어깨에 망토를 걸쳤다.
가슴에 직급을 나타내는 금색 배지까지 달고 나니 문득 출정식 때가 떠올랐다. 큰 전쟁은 처음이라 잔뜩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상처 없이 돌아온 게 천운이었지.’
일리아는 그때의 참혹했던 지옥도를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었던가. 억겁의 시간이 흐른다 해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번에는 다를 거야.’
주먹을 꾹 쥐며 마음을 다잡은 일리아는 비장한 얼굴로 저택을 나섰다.
‘그나저나 새로운 단장이라…….’
마차에 탄 일리아는 손등을 톡톡 두드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병환으로 휴가를 냈던 휴스턴 백작이 최근에 사임 의사를 밝히면서 마법사단의 단장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마법사단의 단장은 수만에 이르는 단원들을 통솔하는 중한 자리였기에 수개월의 논의를 거쳐 선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휴스턴 백작의 사임 신청으로부터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새로운 단장이 선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소식을 가져온 이는 레널드 메이헴이었다. 그는 단장 임명 소식에 길길이 날뛰며 ‘당연히 부단장님께서 단장이 되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어디서 굴러먹었는지도 모를 놈을 단장으로 모셔야 한다니요!’라며 한참이나 역정을 내다가 세실라에게 쫓겨났다.
일리아라고 레널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괜히 단장이 되어 황제에게 견제당할 바에는 지금처럼 적당한 위치에 남아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안 그래도 전장에서 공을 세운 일로 미운털이 잔뜩 박힌 상태였다. 또다시 미움을 살 필요는 없었다.
‘요새 켕기는 일이 많기도 하고.’
일리아는 점차 가까워지는 황성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분홍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높지 않은 단상 위로 올라서며 말했다.
“오스카 헤이스팅스다.”
때마침 넓은 연무장으로 햇살이 비쳐 들면서 오스카를 환하게 비추었다. 그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만큼 그의 외모는 보통이 아니었다. 커다란 눈망울에 오뚝한 콧날, 그리고 앵두 같은 입술까지. 그윽한 미성만 아니었다면 귀족 영애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엄청난 외모였다.
“이번에 휴스턴 백작님의 뒤를 이어 마법사단의 단장을 맡게 되었다.”
일리아는 오스카의 고운 얼굴을 올려다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어쩐지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헤이스팅스라니. 거물이 왔네.’
헤이스팅스는 드래곤과 함께 엘리시오의 곁을 지킨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변방의 소수 민족이었던 그들은 엘리시오의 용맹함에 이끌려 스스로 무기를 들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마족을 토벌하고 아제로스 제국을 세운 엘리시오는 헤이스팅스 일족을 수도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선조의 터전으로 돌아가길 원했고, 엘리시오는 헤이스팅스 일족에게 작위와 영지를 하사하는 것으로 공치사를 마쳤다.
그리고 현재, 초대 황제 때부터 이어진 황실과 헤이스팅스 가문의 인연은 그라니체 가문과는 달리 아직까지도 견고했다.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과 혼사로 맺어진 완벽한 관계가 바이에드의 마음을 누그러뜨린 것이었다.
로웰 헤이스팅스 후작은 바이에드의 요구에 따라 늦둥이 여동생을 황제의 절름발이 동생과 혼인시켰다. 고작 여식의 출정을 막겠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던 그라니체 백작과는 충성심의 정도가 다르다는 말이다.
아무튼, 헤이스팅스 가문의 명성은 그만큼 대단했다. 게다가 최근 몇십 년 동안은 전도유망한 마법사도 많이 배출해 내지 않았던가. 일리아는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생각했다. 다른 단원들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