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저게 대체 뭐야?’
마력의 폭발을 등불 삼아 호수 밑바닥을 살핀 일리아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바닥에 단단히 뿌리 내린 마물이 수많은 이빨을 번뜩이며 긴 촉수를 휘두르고 있었다.
일리아는 매섭게 덤벼드는 촉수를 쳐 내며 이를 악물었다.
‘하다못해 검이라도 있었으면!’
물장구를 치다 보니 점차 손끝이 무뎌졌다. 일리아는 숨을 꾹 참으며 드레스 자락을 손으로 잡아 뜯었다. 그러고는 체내의 마력을 이용해 나풀거리는 실크 드레스를 빳빳하게 벼렸다. 레이스가 잔뜩 달린 드레스 자락은 곧 날카로운 검이 되었고, 일리아는 그것을 휘둘러 촉수를 잘라 냈다.
‘됐어. 이대로 올라가기만 하면 돼.’
일리아는 계속해서 덤벼드는 촉수를 쳐 내며 빠르게 물을 찼다.
그렇게, 햇살이 손에 잡힐 정도로 수면에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마물이 갑자기 캬악! 하고 소름 끼치는 괴성을 내지르며 높이 튀어 올랐다. 꽃잎처럼 활짝 펼쳐진 이빨들이 일리아를 씹어 삼킬 듯이 꿈틀거렸다. 일리아는 황급히 숨을 토해 내며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마력과 섬뜩한 이빨이 충돌하며 거센 빛을 터뜨렸다. 이빨이 몇 개 부서지기는 했으나 저항력이 워낙 강했던 탓에 치명상은 입히지 못했다. 촉수를 꿈틀거리며 부서진 이빨을 만지작거리던 마물은 잠시 주춤하는가 싶더니 더욱 광폭하게 덤벼들었다.
‘카일루스가 올 때까지만 버티면 되는데…….’
일리아는 다시금 검을 곧추세우며 숨을 참았다.
휘몰아치는 마물의 촉수를 쳐 내며 몸을 피하려는데 문득, 어지러운 시야로 붉은 목걸이가 둥실 떠올랐다.
‘맞아. 이게 있었지!’
일리아는 목걸이를 움켜쥐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간단한 방어 마법이 걸려 있다고 했으니 덤벼드는 촉수 정도는 쉽게 막아 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곧, 목걸이에 달린 핏빛 보석이 밝게 빛나며 거센 마력 폭발을 일으켰다. 시전자인 일리아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지만 그녀를 씹어 삼킬 듯이 덤비던 마물은 폭발에 휘말려 갈가리 찢기고 말았다.
‘방어 마법이라며……!’
일리아가 당황하는 사이, 마력 폭발 때문에 하늘 높이 치솟았던 물이 일시에 떨어져 내렸다. 곧 거대한 물의 압력이 일리아의 몸을 거세게 내리눌렀다. 이미 진이 다 빠져 있었던 일리아는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물보라에 휩쓸렸다. 이제 한계였다. 일리아는 마지막 숨을 토해 내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때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물속으로 들어왔다. 그는 다급하게 일리아의 허리를 감싸 안더니 그대로 일리아에게 입을 맞췄다. 이내 신선한 공기가 일리아의 폐부에 가득 들어찼다. 일리아는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옷깃을 붙잡고 단비 같은 공기를 받아들였다. 차갑게 굳어진 입술 사이로 작은 물방울이 알알이 피어올랐다.
‘몸이 너무 차가워.’
옷깃을 붙잡고 있던 하얀 손이 스르륵 미끄러지자 그는 일리아의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서둘러 수면 위로 향했다.
“일리아! 정신 차려, 일리아!”
다급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일리아는 물을 울컥 토해 내며 중얼거렸다.
“저는 괜찮, 괜찮아요…….”
곧, 시야가 완전히 암전되었다.
* * *
“일리아!”
일리아가 짙푸른 호수 속으로 사라지자 당황한 카일루스는 서둘러 그녀를 구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다급하게 호수에 뛰어들려던 찰나에 숲 안쪽에서 비수가 날아들었다.
몸을 살짝 물려 비수를 피한 카일루스는 사색이 되어 뛰어다니는 귀족들을 뒤로한 채 숲속으로 내달렸다. 일리아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지만, 그녀를 구하기 위해 호수로 뛰어든다면 최악의 경우 양쪽에서 공격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적의 숫자나 전력을 확실하게 모르는 이상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일리아.’
카일루스는 일리아가 버텨 주기를 바라며 우거진 수풀 사이를 헤치고 들어갔다.
잠시 후 카일루스는 호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에서 검은 로브를 두른 괴한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한눈에 보아도 매우 불온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마치 일리아를 데려가려고 했던 그자처럼.
카일루스는 얼굴을 굳히며 낮게 말했다.
“그때 별동대를 기습했던 자로군.”
카일루스의 말에 그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철판을 바늘로 긁어내듯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였다.
“용케 기억하고 있었군.”
“죽으려고 찾아왔나?”
“내가 죽는 게 빠를까, 그 여자가 죽는 게 빠를까?”
카일루스는 이를 갈며 품 안에서 호신용 단검을 꺼내 들었다. 마력을 주입하자 곧게 뻗은 은빛 검날에서 푸른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괴한은 ‘오호.’ 하고 짧게 감탄하더니 몸을 뒤로 물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 검은 연기를 두른 커다란 새가 튀어나왔다.
검은 새는 탁한 마력을 내뿜으며 카일루스에게 날아들었다. 거대한 부리와 검날이 몇 차례나 맞부딪치면서 끼긱거리는 소음을 냈다.
카일루스는 얼굴을 와락 구기며 몸을 뒤로 물렸다. 마계의 마물로 추정되는 그 새는 검과 맞닿을 때마다 무서운 기세로 카일루스의 마력을 먹어 치웠다. 덕분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음에도 점차 숨이 차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네가 죽는 게 가장 빠를 것 같군.”
검은 로브의 괴한이 마물과 사투를 벌이는 카일루스를 향해 재차 비수를 날렸다. 그러나 그 비수는 카일루스를 꿰뚫지 못했다. 카일루스의 단검에 어려 있던 푸른 마력이 잠시 사그라드는가 싶더니 곧 눈처럼 새하얗게 타올랐기 때문이다.
마치 태양을 닮은 듯한 그 기운은 괴한의 비수를 불태우고 마물의 거대한 부리를 베어 냈다. 강한 일격에 바닥을 구르며 몸서리를 치던 마물은 이내 검은 연기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카일루스는 옷을 거칠게 털어 내곤 이번에는 괴한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단검과 비수가 부딪치며 거센 마력의 폭발이 일어났다.
괴한은 카일루스의 검기에 비수가 불타 없어질 때마다 새로운 비수를 만들어 가며 그를 상대했다. 일견 대등해 보였지만, 실제로 밀리고 있는 것은 괴한 쪽이었다. 카일루스의 단검을 여차저차 막아 내고 있기는 하나 그는 무기 다루는 솜씨가 매우 형편없었다.
카일루스는 이 기회에 괴한을 생포해서 그의 정체를 낱낱이 밝혀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만 포기해. 너한테 승산은 없어.”
“확실히 그런 것 같군. 근접전은 영 서툴러서 말이야.”
“하나만 묻지. 그때 일리아는 왜 데려가려고 한 거지?”
“내가 그걸 말해 줄 것 같나?”
괴한은 낮게 웃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마물이 사라질 때와 마찬가지로 검은 연기를 피워 올리며 모습을 감췄다.
단검을 휘휘 휘둘러 연기를 날려 보낸 카일루스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빠르게 몸을 돌렸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괴한을 놓친 것은 아쉬웠지만, 일단은 일리아를 구하는 게 먼저였다.
“일리아!”
거세게 출렁이는 호수에 가슴 한편이 선득해진 카일루스는 부리나케 호수에 뛰어들었다. 그 이후로는 무슨 정신이었는지 몰랐다. 카일루스는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으려는 일리아의 허리를 끌어안고, 서둘러 숨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현재. 일리아를 저택으로 데려온 카일루스는 괴로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안색은 돌아왔지만 일리아는 벌써 몇 시간째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마물에게 끌려가 익사할 뻔했는데 그 충격이 오죽하겠는가.
“엘리엇.”
카일루스의 차가운 목소리에 엘리엇이 흠칫 몸을 떨었다.
“…하명하십시오.”
“대륙을 모두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찾아내.”
“알겠습니다.”
작은 단서조차 없는 상황이었지만, 엘리엇은 굳이 첨언하지 않았다. 그만큼 카일루스는 위태로워 보였다.
“으음…….”
그때, 일리아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카일루스의 기세가 순식간에 눈에 띄게 사그라들었다. 그 엄청난 변화에 엘리엇은 또다시 어깨를 떨었다.
“일리아?”
“숨, 숨 막혀…….”
일리아가 얼굴을 찌푸리며 목을 긁어내렸다. 거친 손짓에 하얀 목이 금세 붉게 부어올랐다. 깜짝 놀란 카일루스는 일리아의 양손을 붙잡아 그대로 침대에 내리눌렀다.
“편하게 숨 쉬어, 일리아.”
“흐윽, 윽…….”
“천천히. 괜찮으니까.”
카일루스의 부단한 노력에도 일리아는 끝내 숨을 쉬지 못했다. 일리아의 안색이 급격하게 창백해지기 시작하자 카일루스는 ‘젠장.’ 하고 욕을 읊조리더니 단숨에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따뜻한 숨결이 전해졌다. 일리아는 물속에서와 마찬가지로 카일루스의 옷깃을 붙잡기 위해 손을 바르작거렸다. 카일루스는 일리아를 결박하고 있던 손을 놓으며 그녀가 조금 더 편하게 숨을 쉴 수 있도록 자세를 바꿨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일리아의 호흡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됐겠지.’
안도한 카일루스가 입술을 떼려고 하자 일리아가 힘없이 늘어져 있던 손을 들어 올려 그의 옷깃을 잡아끌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더욱 깊게 맞물리고, 차갑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일리아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카일루스의 옷깃을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마치 마지막 남은 생명줄을 틀어잡기라도 하듯 간절한 몸짓이었다.
‘미치겠군.’
그 무의식적인 행동에 속이 타는 건 카일루스였다. 카일루스는 속으로 국법을 줄줄 외며 일리아의 서툰 입맞춤에 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카일루스도 슬슬 참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을 무렵, 마침내 일리아가 눈을 번쩍 떴다.
일리아는 눈을 느릿하게 깜박거렸다. 흐릿한 시야로 태양 같은 황금빛 눈동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이게 대체 무슨…….’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얼마나 오랫동안 입을 맞추고 있었던 것인지 카일루스의 입술에 옅은 핏기가 어려 있었다.
1초, 2초, 3초.
짧은 침묵 끝에 일리아는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카일루스의 옷깃을 놓았다.
“죄, 죄, 죄송……!”
일리아가 입을 떼기 무섭게 카일루스가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카, 카일루스?”
“하아, 다행이야. 깨어나서 다행이야, 일리아…….”
두근거리는 박동이 그의 숨결을 통해 오롯이 전해졌다. 일리아는 허우적거리던 팔을 내려 카일루스의 등을 가볍게 토닥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