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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39)화 (39/101)

39화 

“와아, 부럽다. 좋겠네요. 예쁜 사랑 하세요.”

일리아의 성의 없는 대꾸에 소피아가 눈을 부라렸다.

“그라니체 영애께서는 요즘 어떠신가요? 그러고 보니 최근에는 그 무성하던 소문도 많이 잠잠해진 것 같네요.”

“각하께서 많이 바쁘셔서요.”

“어머, 그래요? 혹시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니고요?”

소피아가 턱을 치켜들며 한껏 비웃었다. 정말 일관성 있게 시비를 걸어온다 싶었다.

“자기 일에나 신경 쓰는 게 어때요, 랜더 영애? 떳떳하지 못한 관계는 오래갈 수 없는 법이잖아요. 조심하셔야죠.”

“그, 그라니체 영애!”

소피아가 몸을 파르르 떨며 언성을 높이려던 순간이었다. 연미복을 입은 시종이 정원으로 들어오더니 커다란 목소리로 이사벨라의 입장을 알렸다. 일리아는 붉으락푸르락해진 소피아를 뒤로한 채 예법에 따라 고개를 숙였다.

곧 사박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붉은 드레스를 입은 이사벨라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의 앞에 선 이사벨라는 꽃같이 화사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고개 들어요.”

이사벨라는 정원에 모인 영애들의 면면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다들 흔쾌히 참석해 줘서 고마워요. 오늘은 여러분과 친해지고 싶기도 하고, 겸사겸사 새로 사귄 친구도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했어요.”

이사벨라가 정원 어귀를 향해 손짓하자 푸른 드레스를 입은 영애가 쭈뼛거리며 정원 안으로 들어왔다. 이국적인 외모와 곱슬거리는 보라색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영애였다.

“인사해요, 지젤.”

“지젤 아르투아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지젤이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예법을 급하게 배운 듯, 엉성하기 그지없는 동작이었다.

“줄곧 영지에만 있느라 수도는 처음이라고 해요. 다들 친절하게 대해 줬으면 좋겠어요.”

좌중을 둘러보던 이사벨라가 방긋 웃으며 악단에게 눈짓을 했다. 이내 아름다운 선율이 정원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그럼 편하게 즐기다 가요.”

이사벨라는 지젤을 데리고 곧장 일리아에게 다가왔다.

“일리아,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네. 잘 지냈습니다. 전하께서도 무탈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오늘 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사실 두 사람을 꼭 인사시켜 주고 싶었거든요.”

이사벨라는 지젤을 힐끔 바라보더니 일리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지젤은 무려 오라버니께서 공들이고 계시는 영애거든요.”

“…황태자 전하께서요?”

“그렇다니까요!”

지젤의 정체를 모르는 이사벨라는 볼까지 발그레 물들이며 주절주절 두 사람의 첫 만남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첫눈에 반하신 게 틀림없어요!”

이번에는 목소리가 조금 컸다. 이사벨라의 호들갑에 주위에 있던 영애들이 작게 수군거리며 지젤을 힐끔거렸다. 그에 부담을 느낀 지젤이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그, 그런 거 아닙니다, 전하. 저는 그저 의사로서…….”

“알죠, 알죠. 잘 알죠!”

“전하…….”

“하하, 어쨌든 인사 나눠요.”

이사벨라에게서 시선을 돌린 일리아가 옅게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때 약제실은 잘 찾아갔어요?”

“네.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그라니체 영애.”

두 사람이 알은체하자 이사벨라의 적금색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서로 만난 적이 있는 거예요?”

“전에 길을 잃으셨다기에 시종을 불러 드렸었거든요.”

“어머, 이런 인연이 다 있네요!”

지젤이 볼을 발그레 물들이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편하게 지젤이라고 불러 주세요.”

“그럴게요. 지젤도 저를 편하게 일리아라고 불러요.”

“네, 그라니… 일리아.”

이사벨라는 흐뭇하게 웃으며 일리아와 지젤을 바라봤다. 오라버니의 연인(이 될 사람)과 친척 오라버니의 연인이 한자리에 있는 모습은 가히 감동 그 자체였다. 벌써부터 한 가족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사벨라는 전쟁이 완전히 끝나면 꼭 가족 모임을 열리라 다짐하며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어깨를 흠칫 떨었다. 한 영애가 부채를 꼭 쥔 채로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선의 주인공은 바로 소피아 랜더였다.

최근에 바이에드의 명령으로 만남을 가졌던 게 화근이었다. 그 이후 소피아는 별다른 용건이 없음에도 틈만 나면 독대를 요청해 왔다. 그저 플레타 가문에 대한 정보를 술술 불 것 같아 억지로 만남을 가졌던 것뿐인데 뭐라도 된 듯이 구니 이사벨라로서는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사벨라는 계속해서 입술을 달짝거리는 소피아를 뒤로한 채 크리스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여기 계신 영애께서는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크리스틴 플로라입니다.”

“아, 그 유명한 플로라 가문의 후계자로군요? 반가워요, 크리스틴.”

“영광입니다, 전하.”

이사벨라는 한참이나 크리스틴과 대화를 나눴다. 옆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소피아를 완전히 무시한 채로.

그리고 파티가 끝날 무렵, 일리아는 시종에게 아티팩트를 전달했다. 부디 이사벨라가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이사벨라의 파티가 끝나기 무섭게 사교계가 한바탕 들썩였다. 파티의 주최자였던 이사벨라가 ‘낭만적인 첫 만남이었다’, ‘첫눈에 반한 게 틀림없다’라며 테오도르와 지젤을 멋대로 엮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지젤은 연일 귀족들의 화두에 올랐다. 미래의 황태자비, 아니, 황후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 아니던가. 귀족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너도나도 아르투아 자작에게 초대장과 선물을 보냈다. 어차피 지젤의 신분은 가짜였으니 다 소용없는 일이었지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낮은 목소리가 상념을 갈랐다. 그에 일리아는 ‘아니에요’ 하고 대답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옅은 햇살이 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찬란하게 비쳐 들었다. 햇살을 후광처럼 두른 카일루스는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니.”

“…지젤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어요.”

“아, 그 여자.”

카일루스는 심드렁하게 대답하며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카일루스도 만나 봤어요?”

“물론이지.”

“눈동자가 검은색이던데 어떻게 된 거예요?”

“어머니의 강요로 어렸을 때부터 훈련했다더군.”

“그런 마법이 있다니……. 생각도 못 했어요.”

미지의 마법을 마주하니 괜히 탐구심이 불타올랐다. 일리아는 집에 있는 마법서를 다시 한번 살펴봐야겠다고 다짐하며 말했다.

“좋은 분인 것 같더라고요.”

“좋은 분이라고?”

“네. 반마족이라고는 생각도 못 하겠던걸요. 특유의 불온한 기운도 없었고.”

일리아가 지젤과 나눴던 대화 내용을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었지만, 카일루스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서류만 뒤적거릴 뿐이었다. 괜히 기분이 나빠진 일리아는 하던 말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왜 그래요?”

“내가 뭘.”

“뭐 때문에 그래요? 혹시 지젤이 마음에 안 드는 거예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딱 보면 알죠. 지금의 카일루스를 보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걸요?”

일리아의 말을 가만히 곱씹던 카일루스는 눈썹을 삐뚜름하게 올리며 대답했다.

“그대 말을 듣고 보니 마음에 안 드는 게 맞는 것 같아.”

“왜요? 지젤이 반마족이라서요?”

“그것도 그렇고, 그냥 별로야, 느낌이.”

카일루스는 온실에서 마계의 마물을 마주했을 때도 기민하게 반응했었다. 어쩌면 마계의 마력에 유독 예민한 체질일 수도 있었다.

일리아는 불쑥 튀어나오려는 호기심을 애써 접어 두며 말했다.

“그래도 티는 내지 말아요. 안 그래도 신경 쓰고 있을 텐데.”

“그 정도는 알아.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카일루스는 미지근해진 차를 한 번에 비워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얘기는 됐고, 가자.”

“갑자기 어딜요?”

“기분 전환 하러.”

* * *

카일루스가 일리아를 데려온 곳은 바로 중앙 광장의 산책로였다. 이 산책로는 사시사철 아름다운 꽃으로 가득해 볼거리가 풍부한 데다가 광장 외곽의 호수와 맞닿아 있어 많은 귀족들이 찾는 데이트 명소 중 하나였다.

이미 여름이 완연해진 탓인지 산책로 주변은 싱그러운 여름꽃으로 가득했다. 일리아는 꽃을 좋아하는 편이었기에 평소였다면 향긋한 꽃 내음을 맡으며 산책을 즐겼겠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지고한 공작 각하께서 직접 양산을 들고 그녀를 호위하듯 따라 걷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인들이나 할 법한 행동을 귀족이, 그것도 공작 각하께서 하고 계시니 구경거리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 일리아는 귀족들의 수군거림을 애써 무시하며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연인이 햇볕을 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중이지.”

“그러니까 왜요!”

일리아의 사나운 눈초리에 카일루스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보고받았어. 파티에서 소피아 랜더와 시비가 붙었다고.”

“시비라고 할 것도 없었어요.”

“무슨 문제가 생긴 건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다던데?”

“…상세히도 보고받으셨네요. 근데 정말 별거 아니었어요. 한 방 먹여 주기도 했고요.”

카일루스가 햇살에 밝게 물든 일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감쌌다.

“그대는 괜찮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야. 우리 관계가 예전 같지 않다는 소문이라도 돌면 폐하께서 또다시 황녀 전하를 들이미실지도 모를 일이니까.”

“들이미신다니……. 황녀 전하가 무슨 짐짝이에요?”

“적어도 나한테는.”

일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걸음을 옮겼다.

긴 산책로 끝에 다다르자 푸른 호수가 한눈에 들어왔다. 밝은 햇살이 수면에 비쳐 보석처럼 반짝이고, 잔잔한 물소리가 아름다운 선율이 되어 귓가를 울렸다. 일리아는 호숫가에 다가서며 눈을 빛냈다.

“와, 정말 아름다워요!”

“물가는 미끄러우니까 조심해.”

“에이, 제가 애도 아니고 그 정도도 모를…….”

그때, 무언가가 일리아의 발목을 세게 잡아당겼다. 일리아는 재빨리 몸을 뒤로 물렸지만 이끼를 밟고 미끄러지는 바람에 그대로 물속으로 끌려 들어가고 말았다.

“일리아!”

수많은 물방울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일리아는 숨을 꾹 참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나풀거리는 드레스 자락 사이로 검붉은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온실에서 보았던 마물의 뿌리와 비슷한 형태의 촉수였다.

‘어떻게든 수면 위로 올라가야 하는데…….’

물속은 저항력 때문에 운신이 어려운 데다가 마력의 흐름 또한 일정하지 않아 마법을 사용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마물이 자꾸만 발목을 잡아당기는 통에 드레스가 이리저리 나풀거려 시야마저 어지러웠다.

일리아는 드레스를 입는 게 아니었다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발목을 감고 있는 마물의 촉수를 꽉 붙잡고 체내의 마력을 한 번에 터뜨렸다. 푸른 불빛이 밝게 점멸하면서 어둑한 물속을 환하게 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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