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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38)화 (38/101)

38화 

일리아는 초대장을 서랍에 넣어 두고 세실라와 함께 저택을 나섰다. 이사벨라의 선물을 사기 위해서였다. 개인적으로 인사까지 나눈 마당에 빈손으로 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뭐라도 선물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는데, 번화가에 도착한 일리아는 생각지도 못했던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전하께서 뭘 좋아하실까, 세실라?”

“글쎄요. 보석은 어때요?”

“그건 이미 많이 가지고 계실 거야.”

“그럼 꽃은요?”

“황성 정원에 꽃이 얼마나 많은데.”

일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동안 선물이라고는 가족들 것밖에 사 본 적이 없던 일리아다. 황족인 이사벨라의 취향을 가늠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아, 큰일이네.”

일리아가 연거푸 한숨만 내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세실라가 그녀의 어깨를 콕콕 찔렀다.

“아가씨. 저기요.”

“응?”

세실라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막 마법용품점에서 나오는 클리드의 모습이 보였다. 항상 으르렁거리던 마법사, 테드와 함께인 것으로 보아 마법사 협회의 일 때문에 나온 듯했다.

일리아는 북풍한설처럼 싸늘하게 굳은 클리드의 얼굴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클리드는 이사벨라와 사사로이 만남을 가질 정도로 그녀와 가까운 사이였다. 그러니 취향 정도는 꿰고 있을 터였다.

“오라버니!”

일리아가 손을 흔들자 클리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부드럽게 풀어졌다. 자신을 대할 때와는 전혀 다른 그의 모습에 테드가 ‘웩!’ 하고 소리 없이 헛구역질을 했다.

“여기까지는 웬일이야, 일리아?”

“잠깐 선물 사러. 오라버니는?”

“이 멍청한 마법사가 아티팩트 좀 봐 달라길래. 근데 선물이라니? 혹시 그놈한테 주려는 건…….”

“아, 아니야! 황녀 전하께 드리려고.”

일리아는 클리드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볼일 끝났으면 선물 고르는 것 좀 도와줘, 오라버니.”

“아무거나 사. 전하께서는 선물이 뭔지보다 준비한 사람의 정성을 더 기꺼워하는 분이시거든.”

“그래도. 기왕이면 좋아하시는 걸로 드리고 싶단 말이야.”

“음, 정 그러면 아티팩트를 만들어 보는 건 어때?”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검을 배우고 있긴 하지만, 원래 이사벨라의 꿈은 마법사였다.

물론 그 꿈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클리드였다. 클리드는 평소에 마법으로 차를 끓이고 인위적으로 바람을 일으켜 온도를 조절하는 등 실용적인 마법을 많이 구사했다. 그 모습에 매력을 느낀 이사벨라는 한동안 클리드를 따라다니며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조르곤 했다. 안타깝게도 타고난 체질 때문에 마법을 익힐 수는 없었지만.

기사와 마법사는 마력을 운용하는 방법이 판이하게 달랐다. 기사는 내재된 마력을 순환시켜 신체나 무기를 강화하는 게 다였지만, 마법사는 체내의 마력을 자연계의 마력과 결합시켜 초자연적인 힘을 불러일으켰다. 순환과 방출, 즉 마력로의 형태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마법사가 되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다 마법사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소리였다.

그래서 클리드는 아티팩트라는 대안을 꺼냈다. 마력을 가진 이들 모두가 영상석을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체내와 자연계의 마력을 잇는 아티팩트를 만들면 기사 역시도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이건 가설일 뿐이고 실제로 성공한 사례도 없지만, 클리드는 일리아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으리라 믿는 듯했다.

“전하께서는 마법사가 아니시니 아티팩트를 드린다고 한들 마법 수식까지 계산하는 건 힘드실 거야. 그러니까 일단은 간단하게 방어 마법부터 새겨 봐. 일리아는 방어 마법에 일가견이 있으니까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거야.”

“그, 그게 가능이나 한 겁니까?”

두 사람의 대화를 경청하던 테드가 입을 떡 벌렸다.

“너 같은 멍청이는 못 하겠지만, 우리 일리아는 할 수 있어.”

“…늘 말씀드리지만 저도 협회에서는 수재 소리 듣는 사람입니다.”

“하, 수재가 다 죽었군.”

클리드의 비아냥거림에 울컥한 테드가 일리아에게 쪼르르 다가가 말했다.

“일리아 님! 클리드 님은 대체 뭘 드시고 저렇게 못되지셨습니까?”

“못된 게 아니라 지나치게 솔직한 거야.”

“정말 너무하십니다!”

일리아는 까르르 웃으며 테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앞으로도 오라버니 잘 부탁해, 테드.”

“하아, 하는 수 없죠. 지성인인 제가 참을 수밖에.”

“테드, 또 기어오르지?”

“난 이만 가 볼 테니까 두 사람도 조심히 들어가.”

일리아는 또다시 으르렁거리기 시작한 그들을 뒤로한 채 걸음을 옮겼다.

* * *

저택으로 돌아온 일리아는 파티가 열리는 날까지 아티팩트 연구에 열을 올렸다. 다행히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마정석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볼 수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진척은 없었지만.

마정석에 성질을 부여하는 작업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까다로웠다. 마정석을 매개체로 쓰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식을 이용하여 성질을 바꿔야만 했는데 마정석이 일리아의 마력을 견디지 못하고 자꾸만 부서졌기 때문이었다.

일리아는 새삼 고대 룬어의 소실이 아쉬워졌다. 고대 룬어는 마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들어 주는 마법 문자였다. 만약 아직까지도 고대 룬어가 남아 있었다면 마정석으로 아티팩트를 만드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일리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반쯤 부서진 마정석을 노려봤다.

“혹시 마정석 품질이 문제인 건가?”

바이에드가 일리아에게 하사한 마정석은 좋게 봐 줘야 중하품이었다. 다시 말해 상품 마정석에 비하면 내포되어 있는 마력의 질이 현저히 떨어진다는 것.

잠시 고민하던 일리아는 서랍에서 작은 마정석 조각을 꺼냈다. 세실라가 귀환 선물로 주었던 켈른산맥의 마정석이었다.

켈른산맥의 마정석은 바이에드가 하사한 마정석보다 품질이 월등하게 좋았다. 개수가 적어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 없다는 게 흠이었지만, 성공하기만 하면 이사벨라에게는 최고의 선물이 될 터였다.

일리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곧, 푸른 마력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마정석 안으로 흡수되어 사라졌다.

“서, 성공했다…….”

일리아는 작은 수정 조각을 조심스럽게 책상에 내려놨다. 검은 수정 안에서 푸른 글자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실로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마정석의 품질이 아티팩트 제작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 마정석은 이상할 정도로 일리아의 마력과 상성이 좋았다. 그 덕분에 성공 확률이 대폭 상승한 듯했다.

‘마정석에도 상성이 있나?’

잠시 고민하던 일리아는 이내 뿌듯한 얼굴로 완성된 아티팩트를 집어 들었다.

* * *

이윽고 파티가 열리는 날이 다가왔다. 채비를 마친 일리아는 작은 상자를 들고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곧 속력을 높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황성 앞에 다다랐다.

황성 앞은 검문을 기다리는 마차들로 혼잡했다. 일리아는 차례를 기다리며 여유롭게 창밖을 내다봤다. 번쩍거리는 마차가 줄지어 서 있는 모습이 꽤나 장관이었다.

“일리아 그라니체 님. 확인되었습니다. 통과하십시오!”

짧은 기다림 끝에 성문이 열렸다. 일리아를 태운 마차는 긴 대로를 달려 마침내 황녀궁 앞에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는 작은 상자를 가방에 넣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파티가 열리는 황녀궁의 정원은 무척이나 호화로웠다. 특히나 암석을 깎아 만든 거대한 분수대와 황금으로 만든 조각상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굉장했다. 일리아는 혀를 내두르며 정원을 둘러봤다.

그때, 인파 한쪽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어요, 그라니체 영애?”

“그라니체 영애가 아니라 일리아요.”

“…네, 일리아.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요.”

크리스틴의 볼이 옅은 분홍빛을 띠었다. 일리아는 무심코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생각했던 것보다 사람이 많네요.”

“황녀 전하께서 직접 주최하신 파티인데 초대를 마다할 영애가 있을까요.”

“그건 그렇네요.”

일리아는 크리스틴과 대화를 나누며 정원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분수대 쪽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일리아가 고개를 슬쩍 돌려 확인해 보니 소피아 랜더가 일당들을 이끌고 분주하게 인사를 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일리아는 피델리오 플레타를 떠올리며 작게 헛웃음을 쳤다.

“얼굴 좋네요.”

“투자를 받은 이후로 사업이 잘 풀리고 있다고 들었어요. 랜더 가문으로서는 다행인 일이죠.”

“그러게요.”

일리아는 크리스틴의 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며 소피아를 주시했다. 그러다 문득, 소피아와 눈이 마주쳤다. 소피아는 일리아를 빤히 쳐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알 수 없는 미소를 띠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랜만이에요, 그라니체 영애.”

“반가워요, 랜더 영애. 이런 데서 마주칠 줄은 몰랐네요.”

마치 ‘네가 이런 파티에 참석할 자격이나 있어?’ 하고 말하는 듯한 어투였다. 소피아는 순간 울컥했지만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가라앉히며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아만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나서며 언성을 높였다.

“어머, 소피아, 못 보던 반지네요!”

소피아 역시 미리 짜 놓은 대본을 읽듯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 이거요? 제 연인께서 선물로 주신 거예요.”

“이렇게 크고 영롱한 보석은 처음 봤어요. 세공도 정말 아름답고…….”

“그렇죠? 저도 받고서 깜짝 놀랐다니까요.”

“그분께서 소피아를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아이, 참. 부끄럽네요.”

소피아가 볼을 감싸 쥐며 일리아와 크리스틴을 힐끔거렸다. 승리를 확신하는 듯한 묘한 눈빛에 일리아는 실소를 흘렸다.

사실 소피아의 손가락에 무게 추처럼 달려 있는 저 흉물은 과거에 일리아 역시 선물받은 적이 있는 것이었다. 선물한 이는 물론 에렉 로베르트였다.

당시 에렉은 무식하게 커다란 루비 반지를 일리아의 손가락에 끼워 주며 이렇게 말했었다.

- 역시 내 연인에게는 이런 게 어울리지. 앞으로도 많이 사 줄 테니까 자잘한 보석들은 당분간 넣어 둬.

그 말에 웃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에렉은 미적 감각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남자였다. 보석이라면 무조건 크고 반짝이는 게 최고라고 생각했으며 세공의 기본도 몰랐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좋아서 저 흉물을 끼고 돌아다녔었는지.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당장 그 자리에서 부숴 버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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