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 * *
보름 후, 일리아는 그라니체 가문의 뜻을 전하기 위해 황성을 찾았다. 목적지는 카일루스의 집무실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집무실이 있는 별궁으로 향하려다가 문득 걸음을 멈춰 섰다. 오늘따라 대로가 한적한 탓에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기 때문이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다가 멀지 않은 곳에 정원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일리아는 그대로 그쪽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황성의 중앙 정원은 벌써부터 싱그러운 여름꽃으로 가득했다. 일리아는 향긋한 꽃 내음을 맡으며 고요한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별궁으로 갈까 싶어 정원을 나서려는데,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십여 명의 기사가 정원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갑자기 기사들이 왜…….’
기사들이 한쪽에 도열하자 곧 정원 어귀에서 누군가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바로 이사벨라와 소피아였다.
일리아는 꽃들 사이로 몸을 숨기며 두 사람을 주시했다.
‘무슨 그림이야, 이건?’
랜더 가문은 파산 위기를 겪은 이후로 가세가 크게 기울어 사회적인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랜더 가문의 영애가 황녀와 독대를 하다니. 누군가의 입김이 작용한 게 아니라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로베르트 가문은 아닐 거야.’
랜더 가문과 황실의 접점은 오직 로베르트 가문뿐이었다. 그러나 로베르트 백작은 고작 한미한 자작 가문을 황실과 엮어 줄 만큼 아량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플로라 가문과의 파혼으로 정신없는 와중에 이런 만남을 준비했을 리도 만무하고.
그렇다면 이 두 사람의 만남은 과연 누가 계획한 것일까.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렇게 한창 상념에 잠겨 있는데, 누군가가 일리아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한 일리아는 깜짝 놀라 몸을 퍼덕거렸다. 그와 동시에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는 그녀를 누군가가 단단히 안아 들었다.
일리아는 숨을 들이켜며 눈을 깜박거렸다. 파란 하늘 아래로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카일루스?”
“조심해야지.”
카일루스는 일리아가 바로 설 수 있도록 부축해 주었다.
“하아, 고마워요. 근데 집무실에 있어야 할 사람이 왜 여기 있어요?”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도 안 오길래 마중 나왔지.”
“벌써 그렇게 됐어요?”
“슬슬 더워질 거야. 들어가자.”
“으음, 네.”
일리아는 이사벨라와 소피아를 뒤로한 채 카일루스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정원을 지나 별궁 입구에 들어서자 묘한 시선들이 따라붙기 시작했다. 그 시선들은 복도에서도, 보좌관실 앞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괜히 기분이 이상해진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옆에 숨어 있다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와서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
“다, 다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예요?”
“아마 그날 때문일 거야. 우리가 여기서 잠든 날.”
“설마…….”
“그래. 우리가 밤에 나가는 걸 본 사람이 있는 것 같아.”
일리아는 얼굴을 감싸 안으며 소파에 풀썩 엎어졌다.
“이러다 진짜 혼삿길 다 막히겠어요!”
“걱정하지 마. 내가 책임진다고 했잖아.”
“어떻게 책임지실 건데요!”
“어떻게든.”
“됐어요!”
소파에서 한참을 발버둥 치던 일리아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몸을 일으켰다.
“후우, 그러고 보니 정원에서 황녀 전하를 봤어요. 랜더 영애와 함께 계시던데 어떻게 된 건지 아세요?”
“이번에 랜더 가문이 귀족 대표로 프노이트 왕국의 사절단을 대접하기로 했거든. 아마 그것 때문에 폐하께서 자리를 만드신 걸 거야.”
“대표요? 랜더 가문이? 왜요? 어떻게요?”
“플레타 백작이 직접 부탁했다고 하더군. 랜더 가문과 먼 친척 관계라면서.”
일리아는 얼굴을 묘하게 일그러뜨렸다. 랜더 가문은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데다가 그 짧은 역사 동안 단 한 명의 마법사도 배출하지 못한 가문이었다. 그런데 최고의 마법사를 배출해 낸 플레타 가문과 먼 친척 관계라니. 이렇게 안 어울리는 조합이 또 있을까.
“확실한 거예요?”
“서류상으로는 대충.”
“설마 랜더 가문을 도와준 게 플레타 가문이었나…….”
처음에 일리아는 로베르트 가문이 랜더 가문을 도와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면 랜더 가문을 도와준 익명의 귀족은 플레타 백작이고 두 가문의 관계를 눈치챈 로베르트 백작이 에렉을 이용하여 랜더 가문을 휘어잡으려는 속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왕국의 그저 그런 귀족이라면 모르겠지만 저명한 마법사인 피델리오 플레타와의 연줄은 가볍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랜더 가문이 사절단을 성공적으로 대접하면 황제에게 공치사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영향력 또한 확보하게 될 것이다. 로베르트 백작으로서는 에렉 하나로 플레타 가문과의 연줄과 쓸 만한 수족을 모두 얻을 수 있는 셈이니 남는 장사라고 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신경 쓸 게 많아졌네요.”
“그러니까 그대도 조심해.”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나저나 오늘 왜 보자고 한 거야?”
“아, 그거요…….”
크흠, 하고 작게 헛기침한 일리아는 비장한 얼굴로 그라니체 가문의 뜻을 전했다. 아제로스의 국민이 더는 고통받지 않도록 테오도르에게 힘을 보태겠다고.
“전하는 언제쯤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아마 당분간은 힘들 거야. 지금 황성에 없거든.”
“황성에 안 계시다고요?”
머지않아 황태자가 극비리에 요양을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 *
빌른의 한 저택. 밝은 햇살이 비쳐 드는 창가 앞에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곱슬거리는 보라색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빗어 내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복잡한 골목 사이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였다. 귓가를 울리는 활기찬 소음에 그녀는 멍하니 붉은 눈동자를 두어 번 깜박거렸다.
그때, 복도에서 저벅거리는 낮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는 머지않아 그녀의 방 문 앞에서 멈춰 섰고, 곧 문이 열렸다.
“깨어 있었군.”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아제로스 제국의 하나뿐인 황태자, 테오도르였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에 그녀는 황급히 몸을 돌리며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전하.”
“편하게 앉아, 지젤.”
테오도르가 상석에 앉자 지젤 역시 조심스럽게 그의 왼편에 앉았다.
“한결 나아 보이는군.”
“신경 써 주신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인사치레는 됐어.”
테오도르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찬찬히 지젤을 살폈다. 윤기가 흐르는 보라색 머리카락과 피처럼 붉은 눈동자, 그리고 은연중에 느껴지는 마력까지. 언뜻 보아도 예사 인물은 아니었다.
“이제 충분히 진정된 듯하니 몇 가지 질문을 좀 하고 싶은데.”
“성심껏 대답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지?”
테오도르가 바이에드에게서 처음 명령을 받았던 게 벌써 일 년 전이었다. 그동안 테오도르는 아자카산맥으로 수백 명의 수색대를 보냈지만 붉은 눈의 여자는커녕 사람의 그림자 하나조차 찾아내지 못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이에드의 심기가 가장 어지러운 이때에 모습을 드러내다니.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테오도르의 날카로운 눈빛에 지젤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지하 동굴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밖으로 나온 이유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뵈러 가기 위해서였고요.”
“…부모님은 잘 뵈었나?”
“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테오도르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폐하께서 그대를 찾으시는 이유를 알고 있나?”
‘폐하’라는 호칭에 지젤의 몸이 흠칫 굳었다. 표정을 보아 하니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분노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알고 있습니다.”
지젤은 손을 잘게 떨며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제가 아니라 제 어머니를 찾으시는 걸 테지만요.”
“그대의 어머니를 왜?”
“두 분께서는… 꽤나 복잡한 관계셨거든요.”
지젤은 떨리는 손을 맞잡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때는 이십여 년 전. 바이에드가 황태자에 책봉되기도 전의 일이었다. 아자카산맥에 살던 지젤의 어머니, 제네리아는 어느 날 우연히 산맥으로 사냥을 나온 바이에드를 만나게 되었다. 바이에드는 사냥감을 쫓다가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그런 그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제네리아는 그를 집까지 데려와 치료해 주었다. 그 이후로 바이에드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제네리아를 찾아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천천히 사랑에 빠졌다.
“폐하께서 그대의 어머니와?”
“네. 폐하께서는 황제가 되면 어머니를 황후로 맞이하겠다고 하셨다더군요.”
“그런데 잘 안됐군.”
“…네. 폐하께서는 황태자에 책봉되신 이후로 다시는 어머니를 찾아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고, 아제로스 제국 전역에 새로운 황제를 맞이하는 축제가 열렸다. 황태자였던 바이에드가 수순에 따라 황위를 계승한 것이다.
식재료를 사러 나왔다가 바이에드의 즉위 소식을 들은 제네리아는 혹시라도 그가 자신을 데리러 오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아자카산맥에서 제네리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바이에드가 아니라 서슬 푸른 검을 든 기사들이었다.
“폐하께서 그대의 어머니를 죽이려 했다고?”
“네. 어머니께 들은 바로는 그렇습니다.”
산맥의 지리를 이용해 가까스로 도망친 제네리아는 밤낮을 걸어 황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바이에드를 만나지는 못했다. 그는 이미 고귀한 귀족 영애를 황후로 맞이하여 더없는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상심한 어머니는 죽음을 위장하고 지하 동굴에 숨어 사셨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약초꾼이셨던 아버지를 만나 저를 가지셨고요.”
“잠깐. 죽었다고 믿었던 그대의 어머니를 폐하께서 찾으신다는 건…….”
“어머니의 죽음이 위장이었다는 걸 아신 거겠죠. 저주가 발동했을 테니까요.”
“저주라고?”
“어머니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남은 마력을 모두 이용해 폐하께 저주를 거셨습니다.”
입술을 우물거리며 잠시 망설이던 지젤이 이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폐하께서는 신성이 약하셔서 오래 버티지 못하실 거라고 하시면서…….”
“뭐라고?”
테오도르가 눈을 부릅뜨며 의자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그대의 어머니가 어떻게 신성에 관해 아는 거지?”
테오도르의 싸늘한 눈빛에 지젤은 손을 덜덜 떨면서도 차분하게 대답했다.
“선조로부터 이어진 오랜 기억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마계로 도망치지 못하고 낙오된 마족의 후손이시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