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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35)화 (35/101)

35화 

그 이후로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일리아는 마법사단의 일원으로서 전국 각지에 파견을 다니며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를 치렀다. 레이븐은 그런 일리아를 위태롭게 지켜보며 바이에드가 더는 그라니체 가문에 악의를 보이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어느 날. 그의 바람은 한낱 먼지처럼 부질없이 흩어졌다. 테멜 왕국의 갑작스러운 선전 포고로 인해 전쟁이 터지면서 일개 단원에 불과했던 일리아가 갑자기 마법사단의 부단장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심지어 부단장으로서 마법사단을 이끌고 출정하라는 황명까지 떨어졌다.

레이븐은 당연히 일리아의 출정을 반대했다. 자잘한 파견 임무만 다니던 그녀가 어떻게 그런 엄청난 전쟁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바이에드의 뜻은 강경했고, 결국 레이븐은 남은 가족들과 그라니체 가문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딸을 사지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때라도 말씀해 주셨어야죠.”

“안 그래도 힘들 텐데 어떻게 네게 그런 짐까지 짊어지게 하겠니.”

레이븐은 자조했다. 남들이야 일리아가 무사히 살아 돌아온 데다가 혁혁한 공까지 세웠으니 이만한 경사가 어디 있겠냐고 하겠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일리아의 생환은 분명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전장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쳤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바이에드의 견제가 더욱 심해졌다.

레이븐은 바이에드가 필시 보복을 해 오리라 생각했다. 일리아를 참혹한 전장에 내몰았던 그때처럼. 그래서 지금까지 최대한 숨을 죽이고 바닥에 바짝 엎드려 바이에드의 비위를 맞췄건만, 그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에는 많이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폐하께서는 성군의 재목이 아니셨단다. 황자 시절부터 소문이 자자했지.”

“그런데 어떻게 황제가 되신 거예요?”

“성정과는 별개로 실력만큼은 확실하셨으니까.”

선황은 언제나 ‘강한 자만이 아제로스 제국을 이끌 자격이 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에 여덟 명의 황자는 치열하게 경쟁하며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했고, 몇 년의 대결 끝에 결국 바이에드가 황위를 거머쥐게 되었다. 바이에드는 북부를 지배하던 마수 왕, 디노발리우드를 토벌하여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강함을 증명해 냈다. 명실상부 제국의 일인자로 떠오른 것이다.

“일리아, 명심하거라.”

따뜻한 차로 입술을 축인 레이븐이 얼굴을 굳히며 말을 이었다.

“사실 폐하의 성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단다. 어차피 아제로스 제국의 태양은 폐하시고, 폐하와 아제로스의 황족을 지키는 것이 그라니체 가문의 의무니까.”

그 말은 곧, 바이에드와 테오도르 사이에서 내전이 벌어진다 해도 그라니체 가문은 어느 한쪽의 편을 들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들 중 하나에게 칼날을 겨누는 순간 아제로스의 황족을 지켜야 한다는 뿌리 깊은 맹약을 깨는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이븐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아제로스 제국을 지키는 것 또한 그라니체 가문의 의무 중 하나란다. 폐하께서 스스로 제국을 망치고 계시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차라리 더 늦기 전에 손을 쓰는 편이 나을 수도 있어.”

“그 말씀은…….”

레이븐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전하께 힘을 보태는 것이 제국을 위한 길이겠지.”

“아버지!”

“하지만, 이건 순전히 내 의견일 뿐이다. 네 어머니와 클리드의 의견도 들어 봐야지.”

레이븐과 일리아의 시선에 엘레나는 옅게 웃었다.

“뭘 물어요. 그라니체 가문의 주인은 당신인데.”

“오라버니도 모두의 의견에 따르겠다고 했어요.”

“…그럼 결정이 났군.”

레이븐이 일리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폐하의 눈을 피하기가 쉽지 않으니 당분간은 네가 수고해 줘야겠구나. 미안하다, 일리아.”

“괜찮아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조건 도와야죠.”

“그래. 그게 바로 그라니체의 마음가짐이지. 그런데 일리아?”

엘레나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인자한 미소였지만, 일리아는 어쩐지 피부가 따끔거렸다.

“귀족 영애의 마음가짐은 또 어디다 팔아먹은 거니?”

“그, 그게…….”

“따라오렴.”

일리아는 간절한 눈빛으로 레이븐을 바라봤다. 그러나 레이븐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만 슥 돌릴 뿐이었다. 그 역시 엘레나가 무서웠기 때문이다. 괜히 나섰다가는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

“아버지!”

“네 아버지는 왜 찾아? 잔말 말고 따라와.”

결국 일리아는 새로 생긴 취미 덕분에 또다시 한 시간가량의 설교를 들어야만 했다.

* * *

이튿날. 간단하게 점심을 먹은 일리아는 세실라와 함께 플로라 저택으로 향했다. 종일 따라붙는 엘레나의 따가운 눈초리를 피하고 싶기도 했고, 로베르트 가문과의 파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크리스틴은 일리아의 갑작스러운 방문 요청을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응. 이따 봐, 세실라.”

세실라와 짧은 인사를 나누고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는 마중 나온 하인의 뒤를 따랐다.

넓은 복도를 지나자 머지않아 호화로운 응접실에 다다랐다. 하인은 문을 두드리며 정중하게 일리아의 방문 사실을 알렸다. 곧 ‘들어와요.’ 하는 차분한 목소리가 응접실 안쪽에서 흘러나왔다.

“왔어요?”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요, 플로라 영애.”

“아니에요. 앉아요.”

소파에 앉은 일리아는 배시시 웃으며 선물로 준비한 티 박스를 내밀었다.

“다르질링이에요. 전에 마시던 걸 본 것 같아서요.”

“…고마워요.”

크리스틴은 티 박스를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고 준비해 온 차를 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윽한 히비스커스 향이 응접실을 가득 메웠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그럼요. 그라니체 영애 덕분에요.”

“파혼 문제는 잘 해결했나 보네요!”

“네. 조금 애먹기는 했지만 잘 끝냈어요. 곧 재판이 열릴 거예요.”

예상했던 대로, 로베르트 백작은 플로라 가문의 파혼 요청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식의 통보는 부당하다며 언성을 높이기까지 했다.

플로라 후작은 최대한 좋게 해결하려고 했으나 계속되는 설전에 인내심이 바닥났고, 결국 일리아와 카일루스의 증언을 들이밀어 로베르트 백작의 입을 막았다. 증인이 일리아 하나였다면 어떻게든 무마했을 테지만 카일루스까지 끼어 있었던 터라 로베르트 백작은 마지못해 플로라 후작의 파혼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며칠 후면 위자료 배분에 관한 재판이 열린다. 크리스틴과 에렉은 비로소 완전한 남이 되는 것이다.

“정말 다행이에요.”

“그라니체 영애 덕분이에요.”

“그건 아니죠. 전 그 망할 놈의 실체를 알려 준 게 다인걸요. 결정은 플로라 영애가 한 거잖아요.”

“…아무튼 고마워요. 그런데 그 거친 언행 좀 어떻게 할 수 없어요?”

일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없어요. 그리고 고마우면 앞으로는 약혼자를 고를 때 사업적인 요소에만 너무 치중하지 말고 사람 됨됨이도 잘 살펴요.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잖아요.”

“가문에 해가 되지 않는다면 누구든 상관없어요. 어차피 결혼도 사업에 불과한걸요.”

“저기요, 플로라 영애. 지금도 잘나가는 가문을 얼마나 더 키울 셈이에요?”

자세를 바로잡고 앉은 일리아는 ‘플로라 영애는 플로라 가문의 외동딸이니 조금 더 신중하게 상대를 고를 필요가 있어요.’라든가 ‘그렇게 일만 하다가는 언젠가 머리가 다 빠져 버리고 말 거예요.’ 같은 실없는 잔소리를 늘어놨다. 그 모습이 어쩐지 친근하게 느껴져, 크리스틴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까지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던 사람이 있었던가.

크리스틴은 플로라 가문의 독녀로서 가문의 후계자로 인정받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거듭해 왔다. 그 결과 사교계에서는 뭇 영애들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사교계의 꽃’으로, 정계에서는 유일한 ‘여성 소후작’으로 공고히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만한 지위를 쌓았음에도 크리스틴은 행복하지 않았다. 때로는 외롭기도 했다. 인정받겠다는 일념 하나로 너무 열심히 달려온 탓에 마음이 맞는 친구를 하나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애들은 ‘사교계의 꽃’과 같은 무리가 되기를 바라면서도 크리스틴을 어려워했고, 영식들은 후작 가문의 독녀인 크리스틴을 통해 권력욕을 충족하려고 했다. 그렇다 보니 크리스틴은 사람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게 습관이 되었다.

모순적이게도 유일하게 그 거리를 좁혀 온 건 그녀가 가장 불편해했던 일리아였다.

일리아는 ‘그라니체’라는 역사 깊은 가문에서 태어나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마법사가 되었음에도 귀족의 의무나 가문의 사명에만 짓눌려 있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질투했는지도 모른다. 일리아는 항상 명예나 평판에 목말라 있던 자신과는 달리, 자유롭고 당당한 사람이었으니까.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아니에요. 그냥… 전부터 느꼈지만 그라니체 영애는 저를 별로 어려워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

“어려울 게 뭐가 있어요. 더 어려운 사람도 잘만 만나고 있는걸요.”

일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최근에는 공작인 카일루스와 더불어 황족인 테오도르와도 말문을 튼 그녀였다. 이제 와서 크리스틴이 어려울 리 만무했다.

“그러고 보니 공작 각하와 정식으로 교제하신다고요.”

“네, 뭐…….”

“축하해요.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은데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시니까…….”

“…안 좋아하지는 않아요. 주시면 감사히 받을게요.”

일리아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크리스틴을 찬찬히 살폈다. 그녀의 입가에는 드물게도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모습이 꽤나 인상 깊어, 일리아는 무심코 한 가지 제안을 하고 말았다.

“플로라 영애.”

“네?”

“우리 서로 이름으로 부르는 건 어때요?”

일리아의 돌발 발언에 크리스틴이 흠칫 어깨를 굳혔다.

“이름으로요?”

“네. 화해의 증표로요. 어때요?”

“…전 상관없어요.”

“그럼 됐네요!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크리스틴.”

일리아가 배시시 웃자 크리스틴 역시 볼을 발그레 물들이며 미소 지었다.

“그렇게 웃으니까 보기 좋네요. 자주 웃어요.”

“…낯간지러운 말을 잘도 하시네요.”

“더한 것도 할 수 있어요. 어디 한번 들어 볼래요, 크리스틴?”

“됐어요. 징그러워요.”

그 이후로도 두 사람은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다. 크리스틴은 일리아의 말에 열심히 맞장구를 치며 두 손을 꼭 맞잡았다. 어쩐지 항상 부족하던 무언가가 가득 채워진 듯한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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