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일리아는 얼른 저택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카일루스가 그녀의 어깨에 스르르 머리를 기댔다.
“카, 카일루스?”
“조금만 잘게.”
“제대로 누워서 자요!”
카일루스가 자신을 밀어내려는 일리아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 할 일 많아. 제대로 누워서 잤다가 못 일어나면 큰일 난다고.”
“다음에 하면 되잖아요.”
“오늘까지 끝내야 할 것도 많아.”
“…왜 카일루스의 일정 때문에 제 어깨가 희생되어야 하는 건데요?”
“왜냐하면, 그대는 내 귀염둥이니까.”
“으으, 정말!”
일리아가 입을 삐죽거리자 카일루스는 낮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조금만.”
“하아, 어쩔 수 없죠. 깨워 줄 테니까 일단 자요.”
“고마워.”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거리는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는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다 카일루스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진짜 피곤하셨나 보네.’
은근한 무게감과 함께 조각상 같은 얼굴이 한눈에 들어왔다. 커튼처럼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 위로 검은 머리카락이 아른거렸다.
일리아는 무심코 한 손을 들어 올려 카일루스의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넘겼다. 순간 그의 눈가가 잘게 떨렸지만, 다행히 규칙적인 숨소리는 여전했다.
‘입만 다물면 천사인데 말이야.’
카일루스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던 일리아는 돌연 얼굴을 굳히며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저도 모르게 음습한 마음이 들 뻔해서였다.
“하아, 왜 이렇게 잘생겨서는…….”
재차 한숨을 내쉰 일리아는 아릿한 허벅지를 문지르며 억지로 눈을 감았다.
* * *
“으으, 뻐근해.”
얼마나 지났을까. 일리아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아무래도 카일루스를 재우다가 함께 잠들어 버린 모양이었다.
‘몇 시지?’
일리아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나 몽롱한 시야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어렴풋한 달빛이 다였다.
“망했네. 빨리 집에 가야……. 앗!”
몸을 일으키려던 일리아는 어깨 쪽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다시금 주저앉았다. 고개를 돌리니 새근새근 잠든 카일루스의 얼굴이 보였다. 잠시 고민하던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팔을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카일루스.”
그러나 카일루스는 입술을 우물거리기만 할 뿐 일어나지 않았다.
“이 사람이 일어나야 내가 집에 갈 수 있는데…….”
일리아는 오랜 시간 붙잡혀 있느라 따뜻하다 못해 뜨거워진 오른손을 살살 흔들었다.
“카일루스. 일어나요.”
“으음…….”
“너무 오래 잤어요. 이제 일어나야 돼요.”
일리아가 계속해서 손을 흔들자 카일루스는 마지못해 눈을 떴다. 그는 나른하게 눈꺼풀을 깜박거리더니 어두운 집무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얼마나 잔 거지?”
“대충 많이요. 봐요. 벌써 어두워졌잖아요.”
“목소리가 잠겨 있는 것을 보니 그대도 잠들었던 모양이지?”
“카일루스 때문이잖아요. 누가 그렇게 곤히 자래요?”
“자라면서.”
“그, 그건 그거고요! 아무튼 일어나셨으면 얼른 비켜 주세요. 팔 아파요.”
일리아의 말에 카일루스는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삐딱한 자세로 자는 바람에 허리가 뻐근하긴 했지만 정신을 짓누르던 묵직한 피로감은 신기하게도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카일루스는 일리아를 보며 씩 웃었다.
“가끔 같이 잘까.”
“무, 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말 그대로. 그대가 있으면 왠지 잠이 잘 오는 것 같아서.”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어야지!
머쓱해진 일리아는 괜히 시선을 돌리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저 베개 아니거든요? 그리고 이 손도 좀 놓아주세요.”
이번에 당황한 사람은 카일루스였다. 그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일리아의 손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멍하니 입술을 벌리며 손을 놓았다.
진하게 맴돌던 온기가 허공에 아스라이 흩어졌다.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전 이제 가 볼게요.”
일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퍼뜩 정신을 차린 카일루스가 얼른 겉옷을 챙겨 들었다.
“데려다줄게.”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늦었잖아. 가자.”
“…정말 괜찮은데.”
일리아는 못 이기는 척, 카일루스의 옆에 섰다. 아무래도 마부에게 사과할 일이 하나 더 늘어날 듯했다.
매번 혼자 보내서 미안해, 솔로.
* * *
깊은 밤. 모든 것이 어둠에 물들어 있을 시간이었지만 아자카산맥만큼은 소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기사들이 황명을 수행하기 위해 우거진 숲속을 샅샅이 수색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과 횃불을 든 기사들은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붉은 눈의 여자’를 찾아다녔다. 벌써 수색에 접어든 지 일 년이 훌쩍 지났으나 아직까지 이렇다 할 소득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무려 백만 골드라는 포상금이 걸려 있었던 탓이다. 그 정도 포상금이라면 일이 년쯤은 흔쾌히 구를 수 있었다.
“근데 진짜 있기는 한 거야?”
“설마 없는 사람을 찾으라고 하시겠어? 그것도 백만 골드나 걸고?”
“없으니까 거셨을 수도 있지.”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제대로 찾기나 해.”
처음에 불만을 제기했던 기사는 횃불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건성으로 수풀을 훑었다.
그런데 그 순간, 측면에 있던 수풀이 바스락거리는 소음을 냈다. 마치 덩치가 작은 동물이 몸을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듯한 소리였다.
기사는 횃불을 고쳐 잡고 조용히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수풀을 걷어 내니 하얀 다리가 삐죽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횃불을 더욱 가까이 가져다 대며 그곳에 시선을 집중했다.
‘빙고!’
하얀 다리의 주인은 그들이 애타게 찾던 ‘붉은 눈의 여자’였다. 그녀는 몸을 덜덜 떨며 수풀 사이로 숨으려고 애쓰고 있었는데, 기사들이 설치해 놓은 덫에 발이 걸렸는지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던 기사는 횃불을 끄더니 그녀의 몸에 낡은 모포를 덮어씌웠다. 그러고는 신속하게 하얀 다리를 옭아매고 있는 덫을 끊고 버둥거리는 그녀를 안은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위험이 가까워 오다 】
일리아가 황성에 다녀오고 며칠이 지났다. 이제 슬슬 여름이 오려는 것인지 바람에서 옅은 열기가 느껴졌다. 일리아는 창가에 삐뚜름하게 걸터앉아 날짜를 세어 보다 곧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휴가가 벌써 두 달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테오도르와의 일도 가족들에게 이야기하지 못한 데다가 빌어먹을 에렉 로베르트도 손봐 주지 못했다. 그런데 쉴 날이 고작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니!
일리아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얀 구름 위로 테오도르를 닦달하던 바이에드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후우, 그래. 오늘 말씀드리자.”
마치 금기의 상자를 연 판도라가 된 것처럼 마음이 복잡했다.
일리아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더니 창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마음 정리에는 역시 그거지.”
서랍에서 하얀 천을 꺼내 든 일리아는 머리를 질끈 올려 묶고 서재를 나섰다. 그러고는 하녀들 틈에 섞여 천천히 계단 난간을 닦기 시작했다.
이렇게 청소를 하는 것은 에스테반 저택에 다녀온 뒤로 생긴 일리아의 작은 취미였다. 아직 청소에 완전히 익숙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무언가를 집중해서 닦다 보면 마음이 절로 차분해지는 듯했다. 물론 평온한 일리아와 달리 하녀들은 사색이 되었지만.
“아가씨! 청소는 저희가 할 테니 들어가 계세요!”
“맞아요. 그거 이리 주시고 얼른 들어가 쉬세요!”
“괜찮아. 내가 할게.”
일리아는 하녀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신나게 난간을 닦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일리아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슬금슬금 계단을 닦고 있는데 로비 쪽에서 레이븐을 맞이하는 엘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는 얼른 몸을 일으켜 로비로 뛰어 내려갔다.
“다녀오셨어요, 아버지!”
“잘 다녀왔다. 그런데…….”
레이븐이 묘한 눈빛으로 일리아의 손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손에 쥐고 있는 축축한 천을. 일리아는 엘레나의 눈치를 살피며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색한 일리아의 미소에 엘레나가 눈을 부라렸다.
“일리아, 또 설교를 듣고 싶은 거라면…….”
“저, 저,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아주 중요한 이야기예요!”
“중요한 이야기라고?”
“네. 그러니까 거실로 가 계세요. 어머니도요! 저도 금방 따라갈게요.”
두 사람의 등을 떠민 일리아는 깨끗한 물로 손을 씻고 거실로 향했다.
“중요한 이야기가 뭐니, 일리아?”
레이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에 가만히 손만 내려다보던 일리아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아까는 긴장한 탓에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제 보니 레이븐의 눈가가 눈에 띄게 거뭇했다. 레이븐은 마법사 협회의 중진으로서 모든 황실 소속 마법사를 관리하고 있는 데다가 마법 연구와 수도의 경비에도 힘을 쓰고 있었다. 테멜 왕국의 도발과 함께 프노이트 사절단의 내방까지 겹쳐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터. 일리아는 그런 아버지에게 또 다른 고민을 안겨 줘야 한다는 생각에 못내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가족들에게 모든 사실을 숨긴 채 독단으로 역모라는 엄청난 일에 가담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일리아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피곤하실 텐데 죄송해요.”
“아니다. 중요한 이야기라는데 쉬는 게 대수겠느냐.”
“별게 아니라면 설교부터 들어야 할 거야, 일리아.”
“중요한 이야기는 맞아요. 그러니까…….”
일리아는 황성에서 보고 들었던 것들을 하나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바이에드의 실체에 관한 것부터 테오도르가 역모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까지.
충격적인 내용들이 계속해서 이어졌지만 두 사람은 얼굴을 굳힐 뿐 놀라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마치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일리아는 허탈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다 알고 계셨네요.”
“…그래.”
“저한테는 왜 숨기셨어요?”
“미안하구나. 일리아 너만은… 아무것도 몰랐으면 했단다.”
레이븐은 착잡해하는 얼굴로 손을 마주 잡았다.
사실 레이븐은 일리아에게 검은커녕 마법조차 가르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녀가 마력의 폭주로 목숨을 잃을 뻔한 일이 뇌리에 깊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리고 약한 일리아만큼은 그라니체 가문의 의무에서 벗어나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길 바랐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녹록지 않은 법이었다. 폭주를 이겨 내고 마력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게 된 일리아는 마법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소식은 바이에드의 귀에도 들어갔고, 결국 일리아는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바이에드의 추천을 받아 마법사단에 입단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