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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33)화 (33/101)

33화 

“잠시만.”

카일루스는 언제 웃었냐는 듯이 얼굴을 싹 굳히고는 보좌관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절대 들어오지 마.”

“아, 알겠습니다!”

집무실 문이 닫히고, 일리아는 서둘러 카일루스에게서 떨어졌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세차게 뛰었다.

“그러다 들키면 어쩌려고?”

“가, 갑자기 그렇게 웃으시니까 그렇죠!”

“그렇게? 그렇게가 어떻게인데?”

“진짜 잘생기면 단가!”

픽 하고 웃음을 흘린 카일루스는 나른하게 하품을 하며 눈을 깜박거렸다. 피곤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많이 피곤해요?”

“괜찮아. 일단 가자. 곧 있으면 약속 시간이야.”

“밖에 사람이 저렇게 많은데 어떻게 가요?”

“다 방법이 있지.”

겉옷을 챙겨 입고 책장 앞에 선 카일루스가 ‘검의 기원’이라고 적혀 있는 책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러자 거대한 책장이 작은 소음을 내며 스르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비밀 통로예요?”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이런 게 왜 카일루스의 집무실에 있어요?”

“황성이 지어질 때부터 있었던 것 같아. 자세히는 모르지만, 지금 테오도르가 쓰고 있는 황태자궁이 과거에는 다른 용도였을지도 모르지.”

“정말 별게 다 있네요, 황성에는.”

“황성이니까. 가자.”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손을 잡고 어두컴컴한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평소에도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 좁은 통로는 비교적 깨끗했다.

“일리아.”

“네?”

“오늘 뭘 보게 되든 판단은 그대 몫이야.”

“…겁나게 왜 그래요.”

“겁낼 건 없어. 대신 너무 놀라지는 마.”

두 사람은 마침내 통로의 끝에 다다랐다. 카일루스가 단단하게 막혀 있는 벽을 두어 번 두드려 장치를 작동시켰다. 머지않아 문이 열리고, 순식간에 환한 햇살이 통로 안으로 비쳐 들었다.

“여기는…….”

일리아는 눈을 깜박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밝은 햇살 사이로 호화로운 침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커튼의 재질과 벽의 장식들로 미루어 보아 예사 인물의 방은 아닌 듯했다.

“테오도르의 침실이야.”

“뭐라고요? 그, 그런데 제가 와도 되는 거예요?”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카일루스는 일리아를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이끌었다.

“대체 뭘 보여 주시려는 거예요?”

“곧 알게 될 거야.”

카일루스가 벽에 걸려 있던 거대한 태피스트리를 걷어 냈다. 곧이어 빛바랜 상아색 벽이 나타났다. 벽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작은 창이 하나 나 있었다.

“저기서는 이쪽이 보이지 않으니까 안심하고 봐.”

일리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작은 창 앞에 섰다. 특수 처리가 되어 있는 유리 너머로 응접실이 한눈에 보였다.

넓은 응접실 안에는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바로 황태자인 테오도르와 황제인 바이에드였다. 일리아는 눈을 부릅뜨며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바이에드가 언성을 높이며 들고 있던 찻잔을 벽에 집어 던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국고가 비었어, 국고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길래 나라가 이 모양인 게야! 내가 이런 꼴을 보려고 너를 황태자로 책봉한 줄 알아?”

“테멜 왕국과의 전쟁으로 국경 근처의 민가가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그들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끄럽다! 그딴 버러지들을 위해 감히 내 돈을 쓰다니!”

바이에드가 이를 갈며 테오도르의 멱살을 잡아챘다.

“당장 마수를 풀고 국방세를 더 걷어. 한 달 안으로 국고를 다시 채워 놓지 않으면 황위는 이사벨라에게 물려줄 것이다. 알아듣겠느냐?”

“…알겠습니다.”

테오도르가 마지못해 대답하고 나서야 바이에드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테오도르를 밀쳤다.

“후, 그건 그렇고, 지난주에 그라니체 가문의 여식은 왜 만난 거지?”

“의도한 만남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길을 잃었다기에…….”

“허튼소리를 한 건 아니겠지?”

“별다른 대화는 없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발을 세차게 구른 바이에드가 테오도르에게 쏘아붙였다.

“기왕이면 백작의 여식은 전장에서 죽었으면 했는데. 테오도르, 혹시라도 백작이 자식들을 등에 업고 황권을 노려 오면 어떻게 할 테냐.”

“그라니체 백작은 충성심이 높은 자입니다.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충성심이 높다는 자가 여식의 출정은 왜 그렇게 반대했겠느냐. 가문의 전력이 사라질까 염려한 것이었겠지.”

테오도르는 실소했다. 그의 아버지는 정말 상식이라는 게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가족이기 때문이겠지요.”

“헛소리는 집어치우고 아자카산맥에 대한 거나 보고해.”

“수색은 계속하고 있지만, 아직 발견된 건 없습니다.”

“무능한 놈.”

테오도르를 노려보던 바이에드가 자신의 오른팔을 으스러뜨릴 듯이 부여잡으며 이를 갈았다.

“그년을 찾으면 당장 내 앞으로 끌고 와. 저항한다면 사지를 잘라서라도!”

“알겠습니다, 폐하.”

마지막으로 테오도르에게 욕설을 퍼부은 바이에드가 씩씩거리며 응접실을 나섰다. 쾅! 하는 거친 문소리를 끝으로 사위가 완전히 조용해졌다.

‘대체 내가 뭘 본 거지?’

일리아는 창에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그녀는 경악을 금할 수가 없었다. 국민을 지켜야 할 황제가 마수를 풀어 희생자를 만들고 그것을 이용해 세금을 걷으려고 한 데다가 지금껏 목숨 바쳐 충성한 그라니체 가문을 모욕하기까지 하다니. 무엇 하나 충격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다.

“대체 이게…….”

“이게 폐하의 실체야.”

“말도 안 돼…….”

“이제 알겠지, 그라니체 경?”

그때, 테오도르가 옷깃을 탁탁 털어 내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는 매년 각지에서 사로잡은 마수를 민가에 풀어 국방세를 걷으셨다. 마수를 사로잡지 못했을 때는 용병을 고용해 습격을 명하기도 하셨지.”

“그럴 수가…….”

“이미 피해 사실이 파악된 도시가 몇 개 있어. 멜베른, 글렌, 웬포드 등. 아마 이 외에도 더 있겠지.”

일리아는 거센 충격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경은 이상하다고 생각한 적 없나? 그라니체 가문은 아제로스 제국의 개국 공신인데 어째서 가진 거라고는 재력뿐인 로베르트 가문보다 대우받지 못하는지.”

“…선대 백작께서 황실을 등지고 칩거하셨기 때문이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라니체 가문은 드래곤의 후손이자 아제로스 제국의 개국 공신이었지만 귀족 사회에서의 영향력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선대 황제 때부터 계속해서 황실의 견제를 받아 왔기 때문이었다.

먼 과거부터 아제로스의 국민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제국을 위해 싸우는 그라니체 가문의 마법사들을 선망하고 경외했다. 개중에는 그라니체 가문만을 위한 행사를 열 정도로 열정적인 이도 있었다. 그렇다 보니 황제는 자연스럽게 그라니체 가문을 멀리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지금의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당시 그라니체 가문의 가주였던 라비타 그라니체 백작은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자신의 충심을 증명했지만 황제는 눈과 귀를 막고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목숨을 건 충성심 끝에 돌아온 것은 그가 황권을 위협한다는 차디찬 시선뿐. 라비타 그라니체가 설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에 회의감을 느낀 라비타는 결국 칩거를 선언했고, 그렇게 그라니체 가문은 차츰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에 종지부를 찍은 게 지금의 폐하시지.”

선대의 영향을 많이 받은 바이에드는 그라니체 가문이 명맥을 유지하는 것조차 꺼렸다. 그래서 아이기스를 해독하여 그라니체 가문의 필요성을 없애려고 하는 한편, 그라니체 가문의 전력을 꺾기 위한 계략을 세웠다.

그것의 시작이 바로 일리아의 죽음이었다. 일리아가 지금까지 지나칠 정도로 외부 파견이 잦았던 건 다 그 때문이었다. 물론 모든 것이 바이에드의 뜻대로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정말이지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리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사실을 알고 나니 입 안이 썼다.

“전하, 혹시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아자카산맥에서 대체 누굴 찾고 계시는 겁니까?”

“그건 나도 몰라. 그저 ‘붉은 눈의 여자’를 찾으라고 명받았을 뿐이니까.”

“붉은 눈의 여자라…….”

아자카산맥은 과거에 마족이 기거하던 땅이었다. 초대 황제가 마족을 몰아낸 이후부터는 무법 지대가 되어 완전히 폐쇄되었다고만 들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서 사람을 찾고 있었다니.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내가 보여 줄 건 이게 다야. 판단은 경과, 경의 가문에 맡기도록 하지.”

“고심해 보겠습니다.”

“그래. 오늘은 이만 돌아가 봐. 조금 피곤하군.”

일리아와 카일루스는 다시금 비밀 통로를 통해 집무실로 돌아왔다.

어두운 통로를 걷는 동안, 일리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카일루스 역시 구태여 말을 걸지 않았다. 예삿일이 아니니 천천히 생각을 마칠 수 있도록 기다려 주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카일루스.”

비밀 통로가 완전히 닫힌 것을 확인한 일리아가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제가… 아니, 그라니체 가문이 어떤 선택을 하는 게 옳은 걸까요?”

“판단은 그대 몫이야. 내가 답을 줄 수는 없어.”

카일루스가 겉옷을 책상 위에 대충 벗어 두고 일리아의 옆에 앉았다.

“하아, 아버지께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솔직하게 말해도 돼. 그라니체 백작도 대충은 알고 있을 테니까.”

“아버지께서도요?”

“그래.”

카일루스가 하품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테멜 왕국과의 전쟁 이후로 그라니체 백작의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거든. 폐하의 의도를 알고 있는 눈치였어.”

“그럴 수가…….”

“그대와 그대의 가문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나와 전하는 전적으로 존중해 줄 거야. 그러니 충분히 상의해 봐.”

“알겠어요. 고마워요. 그런데 카일루스?”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카일루스를 바라봤다. 그는 드디어 한계에 달한 것인지 날카로운 눈매를 한껏 늘어뜨리며 연신 하품을 해 대고 있었다.

“주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슬슬 그래야 할지도.”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일정 있어?”

“그건 아니지만, 제가 있으면 불편하잖아요. 편하게 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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