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따뜻한 차로 입술을 축인 이사벨라는 본격적으로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그렇잖아요. 아무리 피가 옅어졌다고는 하지만 에스테반 공작과 저는 한 가족인데 어떻게 결혼을 하겠어요? 그런데 법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어찌나 성화시던지. 아주 곤란해 죽는 줄 알았어요.”
“네에…….”
“들어 봐요, 일리아. 저는 황녀이기 이전에 꿈 많은 열다섯 살 소녀라고요.”
이사벨라의 말에 클리드가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런 클리드를 잠시 노려본 이사벨라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저보다 열 살 이상이나 많은 친척 오라버니와 결혼을 할 수 있겠어요? 저는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그럼요. 안 될 말이죠.”
일리아는 대충 맞장구를 쳤다.
“저도 잘 알아요. 황족은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제국을 위해야 한다는 것을요. 하지만 공작과의 결혼이 제국을 위한 일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공작을 억누르기 위한 수단일 뿐이잖아요. 공작도, 저도 괴롭기만 할 거예요.”
일리아는 침울해하는 이사벨라를 보며 측은지심을 느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지고한 위치에 있으면서 정작 본인의 인생은 마음대로 못 하는 처지라니. 이렇게 보면 황족이라는 고귀한 태생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닌 듯했다.
“그래서 다리라도 분지르고 칩거할까 생각하던 차였는데 일리아가 딱 나타나 준 거예요. 정말 가뭄에 단비가 내리는 것 같았죠!”
“…전하의 다리를 지킬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
“다리뿐만이 아니에요. 일리아는 제 인생을 구했어요.”
이사벨라는 두 손을 꼭 모으고 일리아를 바라봤다.
“저한테는 한 가지 소박한 꿈이 있거든요.”
“꿈이요?”
“네. 제 꿈은 황성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면서 모두를 지켜보는 거예요. 전에는 그러지 못했거든요.”
“전이요?”
“폐, 폐하께서 결혼을 종용하시기 전이요! 그 이후로 생각을 고쳐먹게 되었어요. 다른 가문에 팔려 가 썩는 것보다는 황성에서 사는 게 더 좋잖아요. 하하!”
어색하게 웃은 이사벨라는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혼자 잘 먹고 잘 살려고 요새는 검술도 배우고 있답니다.”
“검술이요?”
“네. 뒤늦게 시작하긴 했지만 성취가 나름 괜찮아요. 그렇지, 클리드?”
“네, 뭐…….”
괜히 호기심이 생긴 일리아는 이사벨라에게 넌지시 물었다.
“전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전하의 마력로를 좀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얼마든지요.”
일리아는 이사벨라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탐지 마법을 시전했다. 곧 은은하게 피어오른 푸른 마력이 이사벨라를 감싸며 그녀의 마력로를 살폈다.
‘이건… 엄청난데.’
이사벨라는 열다섯 살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농후한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마력로는 노련한 마법사가 수십 년을 고생하여 연마한 것처럼 완벽하게 트여 있었다. 그야말로 신이 내린 체질이었다.
“꾸준히 배우시면 제국 최고의 기사가 되실 수도 있겠는데요.”
“어머, 정말요?”
“네. 정말 완벽한 체질을 타고나셨습니다.”
일리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마법을 거두었다.
그런데 일리아의 마력이 완전히 사그라들기 직전에 이사벨라의 단전 부근에서 이질적인 기운 하나가 감지되었다. 푸른 마력을 이불 삼아 잠든 그 기운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고, 깨끗했다. 일리아는 눈을 부릅뜨며 이사벨라를 바라봤다.
“저, 전하, 이 기운은…….”
“역시 클리드의 동생답네요. 신성이 잠들어 있는 것까지 파악하다니.”
“신성이라고요?”
“네. 신성이요. 건국 신화에도 많이 나오잖아요.”
신성(神聖). 그것은 말 그대로 신이 부여한 성스러운 힘이었다. 건국 신화에 따르면 초대 황제인 엘리시오가 아제로스 제국을 세울 때 오염된 땅을 정화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이때 사용한 힘이 바로 신성이었다. 대체로 ‘정화했다’든가 ‘악을 몰아냈다’ 등 추상적인 표현으로밖에 나오지 않아 일리아는 그것이 그저 전설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존하는 힘이었다니.
이사벨라는 입을 떡 벌리는 일리아를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일리아가 드래곤의 힘을 계승하는 것처럼 황족도 신성을 계승해요. 물론, 이건 기밀이지만요.”
“…함구하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벌써 가시려고요?”
“남매간의 오붓한 시간을 이 이상 방해하기는 싫은걸요. 나중에 또 봐요, 일리아.”
드레스를 대충 정돈한 이사벨라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소란스러웠던 집무실이 순식간에 고요해지고, 굳게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클리드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해, 일리아. 많이 놀랐지?”
“난 괜찮아. 그런데 신성이라는 게 진짜 존재하는 힘인 줄은 몰랐어.”
“황족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기밀이거든.”
“왜 공표하지 않는 거야?”
아제로스 제국의 건국 신화는 주변국 사이에서도 꽤 유명했다. 마족에게 핍박받던 그들의 선조를 구한 것 역시 엘리시오였기 때문이다. 만약 신성의 존재를 공표한다면 황권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변국의 복종 또한 손쉽게 받아 낼 수 있을 터였다. 혹시 모르지 않는가. 테멜 왕국의 배후에 있는 마족마저 꼬리를 내릴지.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클리드가 난처하다는 듯이 시선을 돌리자 일리아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곤란한 거면 말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그렇게 궁금한 것도 아니고.”
“이해해 줘서 고마워, 일리아.”
픽 웃으며 일리아의 옆에 앉은 클리드가 손끝으로 찻잔을 툭 쳤다. 그러자 미지근했던 차가 다시 끓어오르면서 은은한 열기를 피워 올렸다.
“그런데 황성에는 무슨 일로 온 거야? 아직 휴가 중이잖아.”
“아, 그게…….”
일리아는 클리드의 귓가에 은밀하게 속삭였다.
“예전에 발견한 마정석 지대를 신고하러 왔다가…….”
“마정석 지대?”
“응. 켈른산맥에서 우연히 발견했거든.”
“켈른산맥에서……. 응, 그래서?”
일리아는 토지 신고를 하러 왔다가 우연히 길을 잃어 테오도르를 만나게 되었고 그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는 것을 모두 말해 주었다.
“태양을 떨어뜨린다라…….”
“오라버니는 어떻게 생각해?”
일리아의 물음에 클리드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별생각 없어. 황제가 누구든 별로 관심 없거든.”
“오, 오라버니!”
“정말이야. 내 생각은 됐으니까 일리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지금의 황제를 지키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든 난 무조건 네 선택을 존중할 거니까.”
“정말……. 아버지께서 아시면 경을 치실걸?”
“그럼 혼나지, 뭐.”
확고한 클리드의 눈빛에 일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일단 알겠어. 그럼 오라버니 얼굴도 봤으니까 이만 가 볼게.”
“데려다줄까?”
“괜찮아. 혼자 갈 수 있어. 나오지 마!”
일리아는 따라 나오려는 클리드를 만류하고 서둘러 그의 집무실을 나섰다.
* * *
그로부터 일주일 후. 이른 아침부터 일어난 일리아는 느긋하게 목욕을 마치고 치장을 시작했다. 옅은 화장에 화려한 드레스까지 꺼내 입으니 영락없는 귀족 영애다웠다.
일리아는 부채를 팔락거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일리아가 이렇게 눈에 띄는 차림을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휴가 중인 일리아가 황성에 자주 드나들면 괜한 의심을 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눈길을 끌어 동선을 드러내고 의심을 피하려는 것이었다. 황성에는 황제의 눈이 사방에 깔려 있으니 이 정도만 해도 알아서 보고가 들어갈 터였다.
“후우, 에나, 나 잘할 수 있겠지?”
“그럼요.”
일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거울을 노려봤다. 이번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연기력이었다. 일리아는 반드시 ‘연인을 열렬히 사랑하는 귀족 영애’처럼 보여야 했다. 그래야 누구도 그녀가 카일루스와 작당 모의를 하기 위해 만나는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 황성에서 일하는 귀족들은 의외로 눈치가 빨랐다. 한 치의 어색함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티 나면 안 될 텐데…….”
“공작 각하를 달콤한 오페라케이크라고 생각해 보세요. 케이크 좋아하시잖아요.”
“…그게 되겠냐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일리아는 작게 심호흡을 하며 저택을 나섰다.
마차는 약 사십 여분을 달려 황성에 도착했다. 카일루스가 미리 언질을 해 놓은 것인지, 문지기는 묘한 눈초리를 보이면서도 빠르게 일리아를 통과시켜 주었다.
마차에서 내려선 일리아는 카일루스가 설명해 준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영애가 느긋하게 복도를 거닐자 보좌관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힐끔거렸다.
“저기…….”
부담스러운 시선들을 애써 무시하며 집무실을 찾고 있는데, 한 보좌관이 일리아에게 다가왔다.
“어느 분을 뵈러 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곳은…….”
“각하를 뵈러 왔어요.”
“네?”
“에스테반 공작 각하요.”
일리아는 자가 최면을 시작했다.
나는 지금 연인을 열렬히 사랑하는 귀족 영애다! 카일루스는 달콤한 오페라케이크다!
속으로 거듭해서 중얼거린 일리아는 만면에 그린 듯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제 사랑스러운 연인이 너무나 보고 싶어져서요.”
마치 싱그러운 여름꽃 같은 그녀의 미소에 보좌관은 멍하니 얼굴을 붉혔다.
“그, 그, 그러셨군요!”
“혹시 각하의 집무실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저쪽입니다!”
“고마워요.”
일리아는 보좌관을 지나쳐 카일루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문을 두드리니 집무실 안쪽에서 ‘잠시만 기다려.’ 하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있지 않아 집무실 문이 열리고, 하얀 셔츠를 느슨하게 풀어 헤친 카일루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왔어?”
일리아는 평소와 달리 잔뜩 흐트러져 있는 카일루스의 모습에 잠시 멈칫했다.
“카일루스, 꼴이 그게……. 크흠, 못 쉬었어요?”
“일이 많았거든.”
“아무리 바빠도 잠은 푹 주무셔야죠.”
일리아는 보좌관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조심스럽게 카일루스의 옷깃을 어루만졌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하얀 셔츠 사이로 탄탄한 근육이 언뜻언뜻 보였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일리아는 티 나지 않게 숨을 들이켰다. 과거에 에렉이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봤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갑자기 왜 이렇게 의식하게 되는 것인지.
작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리던 일리아는 이어지는 카일루스의 목소리에 그만 소리를 내지를 뻔했다.
“그대가 재워 줘.”
“네, 네?”
카일루스는 당황하는 일리아의 손을 잡아당기며 매혹적으로 웃었다.
“사실 피곤해 쓰러질 지경이거든. 그대가 함께 있어 준다면 푹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등 뒤에서 온갖 탄성이 들려왔다. 그들의 적나라한 반응에 부끄러워진 일리아는 카일루스를 집무실 안쪽으로 떠밀며 눈을 꾹 감았다.
“…알겠어요. 재워 줄 테니까 얼른 들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