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31)화 (31/101)

31화 

“테오도르, 내가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날 선 카일루스의 말에 테오도르가 눈썹을 삐뚜름하게 치켜올렸다. 카일루스는 원래 테오도르가 무슨 짓을 벌이든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생소하다 못해 경악스러웠다.

“그냥 대화만 조금 나눴을 뿐인데 왜 이렇게 과민 반응이야?”

“테오도르.”

이글거리는 황금빛 눈동자에 테오도르는 괜히 장난기가 일었다.

“그래도 나름 즐거웠어.”

테오도르가 살며시 미소를 띠며 일리아를 바라봤다. 마치 절친한 친구를 바라보는 듯한, 상쾌한 미소였다.

일리아는 돌변한 그의 모습에 헛웃음을 흘렸다. 태양을 떨어뜨리겠다며 칼을 갈던 사람이 맞나 싶었다.

“그라니체 경은 저 딱딱한 카일루스의 어디가 좋아서 만나는 거야?”

이어진 테오도르의 장난기 가득한 질문에 일리아는 볼을 긁적이며 카일루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기분 나빠하리라 생각했던 카일루스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묵묵히 침묵을 지키며 일리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 일리아 역시 장난기가 샘솟았다. 솔직히 지금이 아니면 언제 저 지고한 공작 각하를 놀려 보겠는가.

“그러니까…….”

일리아는 배시시 웃었다.

“얼굴이 좋습니다.”

“얼굴?”

“네. 잘생겼잖아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거나 짓궂게 굴 때는 한 대 쥐어박아 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지만, 외모만큼은 정말이지 나무랄 데가 없었다. 흑단 같은 머리카락도, 태양같이 찬란한 황금빛 눈동자도, 미소를 지을 때마다 아름답게 휘는 연홍빛 입술도. 무엇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이 어처구니없는 연인 행세가 더 즐거운 것인지도 몰랐다. 만날 때마다 저 대단한 얼굴로 눈요기를 톡톡히 하는데 재미없을 리가.

“카일루스가 잘… 크흠, 생기기는 했지. 다른 건?”

“목소리도 나름 들어 줄 만한 것 같습니다.”

“또?”

“음, 돈이 많은 점도 좋습니다.”

입술을 움찔거리던 테오도르는 결국 고개를 푹 숙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일리아의 대답이 이어질 때마다 묘하게 일그러지는 카일루스의 얼굴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고작 연인이 생긴 것 하나로 사람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가 있나 싶었다.

“경과 나는 은근히 죽이 잘 맞는 것 같단 말이지.”

“과찬이십니다.”

두 사람의 장난에 고개를 내저은 카일루스가 일리아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갑자기 일리아는 왜 부른 거야? 기다리라고 했잖아.”

“오해하지 마. 내가 부른 게 아니라 하필이면 경이 내 성 앞에서 길을 잃었을 뿐이니까.”

“허튼소리를 한 건 아니겠지.”

“설마. 경과는 오붓하게 마정석 채석장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게 다야. 그렇지?”

카일루스는 난처하게 웃는 일리아를 힐끔 바라보더니 얼굴을 와락 구겼다.

“설마 다 말했어?”

“대충은.”

“일리아는 아무것도 몰라.”

“그런 것 같더군.”

테오도르는 일리아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경도 대충 눈치챘겠지만, 내가 경을 만나려고 한 건 그라니체 가문을 포섭하기 위해서였어.”

“전 그라니체 가문의 가주도, 후계자도 아닙니다만…….”

“알아. 하지만 그 두 사람과는 말이 잘 통하지 않으니 경부터 만나 볼 수밖에. 두 사람이 워낙 고지식해야 말이지.”

테오도르는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경을 먼저 포섭하고, 그들을 설득시킬 생각이었어.”

“…….”

“어때? 내 일에 동참할 생각이 있나?”

“테오도르, 일리아는…….”

“괜찮아요.”

일리아는 못마땅해하는 카일루스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그러고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올곧은 눈빛으로 테오도르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 편한 길을 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가려고 하시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겠죠.”

“뭐, 그렇지.”

“그렇다면 아제로스 제국을 수호하는 드래곤의 후손으로서 그 이유를 직접 확인하고 옳은 선택을 하고 싶습니다. 아제로스의 국민을 위해서라도요.”

“좋은 대답이야.”

테오도르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경이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지. 다음 주 이 시간에 카일루스의 집무실로 와. 그럼 많은 걸 알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가 봐. 경이 나와 뜻을 함께하는 날을 고대하지.”

일리아는 테오도르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성을 나섰다. 긴장이 풀리니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저택까지 데려다줄게.”

“아, 아니에요! 겸사겸사 오라버니나 만나고 가려고요. 근위대 교육이 끝나서 지금은 일반 기사들에게 이종족 교육을 하고 있다고 들었거든요.”

“그럼 기사단 본부까지라도 데려다줄게. 또 길 잃으면 어쩌려고?”

일리아는 뜨끔했다. 안 그래도 길을 잃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테오도르를 만나지 않았던가. 괜히 혼자 나섰다가는 또다시 곤란한 상황에 처할지도 몰랐다. 일리아는 집에 돌아가면 황성 지리부터 외워야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릴게요. 고마워요.”

“별말씀을.”

황태자궁에서 기사단 본부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다. 그러나 카일루스는 마차를 부르는 대신 걷는 쪽을 택했다. 일리아가 천천히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이었다.

일리아는 그런 카일루스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카일루스는 누구보다 황제를 가까이서 보필하고 지켜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황태자와 함께 황위를 노리고 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카일루스, 아까 그 얘기…….”

“쉿. 지금은 듣는 귀가 많아.”

카일루스는 일리아의 손을 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다음 주면 다 알게 될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알겠어요.”

“그나저나 그대가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진지한 카일루스의 물음에 일리아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놀리려고 한 말이었지만 반 정도는 진심이에요. 전에도 말했듯이 카일루스는 정말 잘생겼거든요.”

“그대 때문에 평생 늙지도 못하겠군.”

“에이, 카일루스는 나이가 들어도 멋있을 거예요. 원판은 어디 안 가는 법이거든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그런데 일리아.”

“네?”

“소원의 허용 범위는 어디까지지?”

“소원이라……. 아!”

문득, 채석장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일리아는 그녀가 또 술을 마시고 사고를 칠 것을 염려하는 카일루스에게 ‘또 주사 부리면 소원 하나 들어드릴게요. 어때요?’ 하고 호기롭기 이야기한 바 있었다. 애초부터 과음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춤 내기를 했을 때처럼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채석장의 풍경과 그것을 잃어야만 한다는 아쉬움, 그리고 술이 달게 느껴질 정도로 부드러운 분위기가 일리아의 자제심을 무너뜨렸다. 그 결과 일리아는 또다시 카일루스에게 주사를 부렸고, 전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입장이 되고 말았다.

“이제 기억났어?”

“네…….”

“어디까지 가능한지 말해 주면 최대한 맞춰서 말하도록 하지.”

“하아, 알겠어요. 생각해 볼게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기사단 본부 앞이었다. 카일루스는 호기심 어린 기사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일리아를 클리드의 임시 집무실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여기로 들어가면 돼.”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조심히 들어가.”

“네. 카일루스도 일 힘내요!”

카일루스를 배웅한 일리아는 작게 심호흡을 하며 집무실 문을 열었다.

“클리드!”

그리고 그 순간,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황한 일리아는 숨을 죽이고 집무실 내부를 살폈다. 그러고는 깜짝 놀라며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낯선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아제로스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이사벨라였다. 이사벨라는 심각한 얼굴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복도의 소음과 겹쳐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으로 미루어 보아 예삿일은 아닌 듯했다.

‘나중에 다시 와야겠네.’

몸을 웅크린 일리아는 뒷걸음질을 치며 조용히 문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문을 닫는 과정에서 길게 내려온 로브를 밟고 미끄러지는 바람에 의도치 않게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지고 말았다.

“일리아?”

갑작스러운 소란에 집무실에서 나온 클리드가 눈을 깜박이며 일리아를 부축했다.

“괜찮아? 어디 안 다쳤어?”

“괘, 괜찮아. 그냥 넘어진 것뿐이니까.”

“다행이네. 그런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깜짝 놀랐잖아.”

“그냥 황성에 온 김에 인사나 하고 갈까 했는데 바빠 보여서…….”

“일리아의 방문은 언제나 환영인걸. 들어와.”

클리드는 쭈뼛거리는 일리아를 집무실 안으로 이끌었다.

“어머, 손님이 왔네?”

책상 앞에 서 있던 이사벨라가 일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세상에…….’

일리아는 인사를 해야 한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이사벨라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옅은 백금발에 노을과도 같은 적금색 눈동자를 지닌 그녀는 마치 신학서에 나오는 여신처럼 성스럽고 아름다웠다.

“일리아, 인사해야지.”

일리아가 멍하니 서 있기만 하자 클리드가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 죄송합니다! 일리아 그라니체가 아제로스의…….”

“역시 그랬군요. 어쩐지 클리드와 많이 닮았다 했어요!”

어느새 다가온 이사벨라가 일리아의 손을 덥석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저, 전하?”

“당신이었군요. 제 남편이 될 뻔한 분과 교제한다는 사람이!”

일리아는 순간 심장을 토해 낼 뻔했다.

“그게…….”

“고마워요, 일리아. 덕분에 살았어요. 사실 제가…….”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하시죠. 일리아가 당황하지 않습니까.”

“아, 미안해요. 얼른 앉아요.”

귀여우면서도 위엄 넘치는 이사벨라의 목소리에 일리아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아와 이사벨라가 소파에 앉자 클리드는 두 사람을 살피며 차를 우렸다. 곧, 기분 좋은 라벤더 향이 집무실을 가득 메웠다.

“전 빠져 드릴 테니 천천히 대화 나누시죠.”

“고마워, 클리드.”

클리드가 집무실 한쪽에 있는 책상에 앉자 이사벨라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에스테반 공작과 교제해 줘서 고마워요.”

“전하의 감사를 받을 만한 일은 아닙니다.”

“아니요. 받아 마땅해요. 일리아 덕분에 제가 요새 얼마나 살 만한지 몰라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