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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29)화 (29/101)

29화 

“저도 눈으로 보지 않았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거예요. 티를 내셔야 말이죠.”

“뭐 좋은 거라고 티를 내?”

“카일루스가 전에 그랬죠? 이럴 때는 주인한테 의지하라고요.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요. 앞으로는 혼자서 힘들어하지 말고 저한테 의지하세요.”

일리아의 자색 눈동자가 마치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전 카일루스의 하나뿐인 귀염둥이잖아요. 이럴 때나 써먹으시란 말이에요.”

일리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카일루스의 손에 살며시 힘이 들어갔다.

“그대는 정말 못 당하겠군.”

“당연하죠. 제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요.”

“덕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어. 고마워, 일리아.”

“…뭘요.”

카일루스가 일리아의 겉옷을 여며 주며 말했다.

“그건 됐으니까 이제 다른 이야기도 좀 해 봐. 기왕 왔으니까 즐기자며.”

“다른 이야기라. 으음, 뭐가 있을까요?”

가만히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던 일리아는 문득 클리드를 떠올렸다.

“아, 맞아. 저 사실 어렸을 때는 오라버니랑 안 친했어요.”

“전혀 안 그랬을 것 같은데.”

“오라버니께서 저를 별로 안 좋아하셨거든요. 그래서 어린 마음에 오라버니와 치고받고 싸우기도 했어요.”

일리아는 어렸을 때 마력의 폭주를 겪은 이후로 바쁜 레이븐을 대신해 클리드에게서 마력을 제어하는 법을 배웠다. 그때만 해도 클리드는 일리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말만 툭툭 던지는 게 얼마나 얄미웠던지. 매일을 참고 참던 일리아는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클리드의 머리채를 쥐어뜯었다. 그리고 그 사소한(?) 다툼이 두 사람의 관계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

“지금 오라버니의 태도를 보면 상상도 못 할 이야기죠?”

“그러게. 클리드 그라니체의 동생 사랑은 황성에서도 꽤 유명한데 말이야.”

“저도 왜 그게 계기가 됐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냥 그 이후로 오라버니가 달라졌거든요.”

“흥미롭네.”

“그리고 아카데미에 들어갔을 때는…….”

그 이후로도 일리아와 카일루스는 한참이나 대화를 나눴다. 주로 일리아가 말을 꺼내면 카일루스가 반응을 보이는 식이었다. 사적인 것부터 공적인 것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그들 사이를 오갔다.

그렇게 밤이 완전히 무르익었을 무렵, 한참을 재잘거리던 일리아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일리아?”

카일루스의 품이 따뜻하기 때문이었을까. 일리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들어 올리며 웅얼거렸다.

“저 졸린 것 같아요.”

“그럼 이제 슬슬 갈까.”

“조금만 잘게요. 이따 깨워 주세요…….”

“잠깐. 여기서 자면 안 돼.”

몽롱한 의식 사이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일리아는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 * *

“에나, 물…….”

잠에서 깨어난 일리아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로 손만 휘적거렸다. 오랜만에 독한 술을 마셨기 때문인지 속이 메슥거렸다.

“물 좀 줘…….”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에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평소였다면 진작 물컵을 손에 쥐여 주며 무심하게 잔소리를 해 댔을 텐데. 참다못한 일리아는 결국 이불을 휙 걷어 내며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내가 물 달라고……. 어?”

흐릿한 시야로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순간,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내 방은 아닌 것 같은데…….”

“당연하지.”

“깜짝이야!”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일리아는 침대에서 일어나려다가 그대로 굴러떨어졌다. 바닥에 폭신한 카펫이 깔려 있어 다치지는 않았지만, 무지하게 창피했다.

“괜찮아?”

쓰라린 허리를 문지르며 고개를 슬쩍 드니 한껏 당황한 카일루스의 얼굴이 보였다. 일리아는 눈을 느릿하게 깜박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카일루스?”

“이제 정신이 들어?”

“제가 왜 여기 있죠?”

“기억 안 나?”

“술을 마시고 잠든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그 뒤는?”

일리아는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머릿속은 흐리멍덩하기만 할 뿐,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기억 안 나요. 혹시 제가 또 무슨 사고라도 쳤어요?”

일리아의 말에 카일루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품속에서 영상석을 꺼내 들었다. 순간, 일리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대가 무슨 짓을 했는지 같이 보면 되겠군.”

카일루스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바로 영상석을 발동시켰다. 곧 짙푸른 색의 수정이 밝게 빛나며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재현해 냈다.

- 흐어엉, 카일루스. 글쎄, 들어 봐요. 제 인생이 말이죠. 흐흑, 이렇게 서러워요!

흔들리는 마차 안. 영상 속의 일리아는 눈물을 펑펑 쏟아 내며 하소연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카일루스의 허리를 억세게 끌어안은 채로.

- 에렉 이, 이 자식이… 이 나쁜 새끼가 말이죠. 글쎄 저를, 흐어어엉…….

쾅!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일리아는 전장에서의 그때처럼 영상석을 세게 내리쳐 부숴 버렸다.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정말 무지하게 창피했으니까!

“저택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저러고 있었어.”

“…….”

“네 시간 정도였지, 아마?”

카일루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일리아의 하소연이 심각한 내용이었다면 카일루스 역시 주의 깊게 들으며 그녀를 달래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리아는 엉엉 울면서 에렉의 뒷담화를 하거나 지난주에 저녁으로 먹었던 스테이크가 질겨서 서러웠다는 등 실없는 소리만 늘어놨다. 심지어 한 시간이 지난 이후부터는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기까지 했다. 얼마나 고역이었는지 모른다.

카일루스가 끔찍했던 지난밤을 상기하며 얼굴을 굳히자 일리아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제가 원래 술버릇이 없는 편인데…….”

“없는 편이라고?”

“조, 조금밖에 없는 편이라고요…….”

일리아가 쭈뼛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카일루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앞으로는 술 끊어. 확실하게.”

“넵! 알겠습니다!”

“배고플 텐데 식사부터 하자.”

“괜찮아요. 일단 저택으로 돌아가야…….”

일리아는 밀려드는 창피함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기 위해 몸을 돌린 순간, 꼬르륵하는 적나라한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울렸다.

‘망할!’

일리아는 슬쩍 배를 감싸 안았다.

“부, 분명히 안 고팠는데…….”

카일루스는 애써 웃음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준비하고 나와. 기다릴 테니까.”

“네에…….”

간단하게 씻고 준비를 마친 일리아는 카일루스와 함께 식당에 내려왔다. 넓은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들이 한가득 펼쳐져 있었다.

자리에 앉은 일리아는 언제 부끄러워했냐는 듯이 공격적으로 음식을 해치웠다. 전에도 느꼈지만, 에스테반 저택의 요리사는 솜씨가 정말 좋았다. 숙취 따위는 한 번에 날려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음식이 맛있다고 마냥 좋아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리고 있을 엘레나를 떠올리니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외박을 한 게 아니라 밤늦게 귀가한 것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엘레나는 크게 화를 냈었다. 그 이후로 일리아는 외곽 지역으로 파견을 나가는 게 아니면 해가 떨어지기도 전에 집에 돌아가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무려 카일루스와 함께 외박을 하지 않았던가. 하인들이 일리아가 카일루스와 저택을 나서는 모습을 모두 보았으니 엘레나 역시 보고를 받아 알고 있을 터였다. 집에 돌아가면 불호령이 떨어질 게 틀림없었다.

“왜 그래?”

“어머니께 혼날 생각을 하니 겁나서요.”

“걱정하지 마. 다 처리해 놨으니까.”

“처리요?”

카일루스가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플로라 저택에서 잠든 걸로 말을 맞춰 놨어.”

“카일루스……!”

“일단 차부터 마셔. 데려다줄 테니까.”

“네!”

* * *

일리아를 플로라 저택에 데려다준 카일루스는 플로라 후작과 한 번 더 말을 맞춘 후에야 황성으로 마차를 돌렸다. 엘리엇에게 얼핏 듣기로는 아주 중요한 회의가 있다고 한 것 같았는데 어쩐지 민폐를 끼친 것 같아 미안했다.

“잘 다녀와요!”

마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든 일리아는 작게 심호흡을 하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로 들어서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하인이 일리아를 크리스틴의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어서 와요.”

“플로라 영애!”

일리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크리스틴의 앞에 풀썩 주저앉았다.

“살려 줘서 고마워요!”

“빚을 갚은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일어나요.”

“그래도요! 정말 고마워요!”

“…일어나라니까요.”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이다 겨우 일어난 일리아는 화려한 드레스를 나풀거리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걱정거리를 덜어 내니 슬슬 잠이 쏟아졌다.

“플로라 영애, 저 조금만 자고 가도 돼요?”

“안 돼요. 휴가 중인 그라니체 영애와는 달리 전 할 일이 아주 많거든요.”

“아쉽다. 지금 자면 딱 좋을 것 같은데.”

일리아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돌연 몸을 일으키며 탄성을 내질렀다. 아주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갑자기 왜 그래요?”

“깜빡하고 있었어요. 플로라 영애한테 해 줄 말이 있었다는 걸!”

“해 줄 말이요?”

“얼른 심호흡해요. 충격받으면 안 돼요.”

“대체 뭐길래 그래요?”

일리아는 비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실 얼마 전에 제가 뭘 봤거든요. 그러니까…….”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봐요.”

“에렉 로베르트가 바람피우는 모습이요. 제가 똑똑히 봤어요!”

“바람이요?”

크리스틴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얼굴을 굳혔다.

“상대가 누군지 알아요? 무려 랜더 영애였어요. 소피아 랜더요!”

“…랜더 영애요?”

크리스틴은 서류 귀퉁이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현재 플로라 가문은 로베르트 가문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소문을 이유로 파혼을 요구했음에도 극구 부인하며 응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가문의 약혼은 이미 황제의 인가를 받은 상황이었다. 황제를 납득시킬 만한 귀책사유가 있지 않은 이상은 일방적으로 파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타이밍 좋게 일리아가 에렉의 바람에 관한 소식을 들고 왔다. 그러한 부정행위는 아주 중대한 귀책사유이니 이번에는 로베르트 가문 역시 어찌할 도리가 없을 터였다.

딱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이 소식을 전한 사람이 일리아라는 것이었다. 일리아는 에렉과 연인 사이였던 데다가 최근까지 그와 좋지 않은 소문에 휘말리지 않았던가. 만약 일리아를 증인으로 내세운다면 소문에 대한 보복을 하는 거라며 잡아뗄 가능성이 다분했다. 확실한 증인이나 증거가 또 있다면 모를까, 일리아만 믿고 밀어붙이기에는 빠져나갈 구멍이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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