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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28)화 (28/101)

28화 

파견 임무가 있는 날이면 일리아는 꼭 시간을 쪼개어 파견지 곳곳을 구경하러 다녔다. 마법사단은 황실 산하 기관으로서 수도를 지킬 의무가 있었기에 그럴 때가 아니면 여행은 고사하고 외출 허락을 받는 것 또한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리아는 어렸을 때부터 가만히 기다리는 것에는 소질이 없었다. 일을 다 마쳤음에도 귀환 시간까지 숙소에 처박혀 있는다는 것은 그녀에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그래서 한 번씩 작은 일탈을 일삼으며 혼자만의 여행을 즐겼다. 그러다 보니 술도 늘게 된 것이고.

“술은 끊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조금씩 줄이고 있어요.”

일리아는 모른 체하며 마차에 올라탔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수도를 벗어나고도 장장 세 시간 이상을 달리고 나서야 완전히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거대한 산맥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카일루스는 어둑한 산맥을 한 번, 일리아를 한 번 바라보다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혹시 내가 뭘 잘못했나?’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이런 곳에 그를 데리고 올 리 없지 않겠는가. 어둑한 산맥은 당장 사람 하나를 묻어도 들키지 않을 것처럼 음침하기 그지없었다.

“카일루스, 뭐 해요?”

“아무것도 아니야.”

일리아는 딱딱하게 굳어 있는 카일루스를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손 주세요. 길이 꽤 복잡하거든요.”

“어디 가는 건데?”

“가 보면 알아요.”

여관에서 산 술과 빵을 허리에 단단히 동여맨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손을 꼭 붙잡고 산속으로 향했다. 이동 중에 해가 지는 바람에 사위가 금세 어두워졌지만, 일리아는 망설임 없이 우거진 수풀을 헤치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삼십여 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일리아가 환하게 웃으며 카일루스의 손을 잡아당겼다.

“다 왔어요!”

카일루스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확실히 이건 예상 범위 밖이었다.

“어때요? 엄청나죠?”

깎아지른 절벽 아래에는 엄청난 규모의 채석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평범한 채석장은 아닌 듯했다. 카일루스는 달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는 채석장을 바라보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대는 특이한 게 맞는 것 같아.”

“제가 뭘요. 그것보다 아름답지 않아요?”

일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채석장을 내려다봤다.

“그냥 채석장이 아니에요.”

“설마 마정석인가?”

“맞아요!”

“국내에서 마정석이 나는 줄은 몰랐군.”

“저도 길을 잃었다가 우연히 발견한 거예요.”

일리아는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이 많은 마정석을 모두 채석해서 판다면 분명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마정석은 자연계의 마력이 결정화된 돌이었다. 주로 마법사의 성취를 올리거나 아티팩트를 만들 때 사용되며, 마력의 농도가 짙은 곳에서밖에 생성되지 않기 때문에 가격 또한 매우 비쌌다. 즉, 이 채석장 하나만 가지고 있다면 평생 놀고먹을 돈을 벌 수 있다는 것!

일리아의 원대한 꿈에 무심코 웃음을 터뜨린 카일루스가 채석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안됐지만 그 꿈은 접어야겠어.”

“왜요?”

“마정석은 법적으로 국가에서 관리하게 되어 있거든.”

“뭐, 뭐라고요?”

“사유 재산으로 인정하기에는 워낙 가치 있는 물건이라.”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일리아는 입을 떡 벌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설마요!”

“사실이야. 신고한다면 포상 정도는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그럴 수가…….”

일리아는 바닥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부자가 되어 사치스럽게 살겠다는 원대한 꿈이 순식간에 박살이 났다. 한숨이 터져 나올 정도로 아쉽기는 했지만, 법이 그렇다는데 뭐 어쩌겠는가. 일리아는 울적한 얼굴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럼 할 수 없죠. 지금이라도 많이 봐 둬야지…….”

“아름답기는 하네.”

마정석이 잔잔하게 박혀 있는 채석장은 달이 구름을 넘나들 때마다 푸른빛을 띠기도, 보랏빛을 띠기도 했다. 마치 너른 들판에 또 하나의 밤하늘이 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일리아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쳤다.

“카일루스도 앉아요. 여기서의 마지막 밤일 텐데 알차게 즐겨야죠.”

씩 웃은 일리아는 허리에 매어 둔 주머니를 풀어 술과 빵을 꺼냈다. 그러고는 마정석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밤하늘을 감상하며 술을 쭉 들이켰다.

“크으, 좋다!”

일리아가 생글생글 웃으며 빵을 우물거리자 카일루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왜 그러세요?”

“그냥 신기해서.”

“뭐가요?”

카일루스가 일리아의 옆에 앉으며 술병을 빼앗아 들었다.

“술 때문에 사고를 친 게 불과 몇 달 전인데 아직도 술 마실 생각이 드나?”

“이런 풍경을 눈앞에 두고 어떻게 참아요?”

“참을 수 있어.”

“그리고 전에는 카일루스가 직접 가져다줬잖아요. 이제 와서 왜 이러세요?”

“그때는 딱 한 잔이었잖아. 이건 한 병이고.”

입을 삐죽거린 일리아가 카일루스의 손에서 술병을 되찾아와 재차 술을 들이켰다.

“천천히 마셔.”

“괜찮아요. 과거의 제가 아니라고요.”

“내가 불안해서 그래.”

“정말 괜찮다니까요. 믿어 보세요.”

그럼에도 카일루스의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은 풀릴 줄을 몰랐다. 당연했다. 만약 일리아가 술에 취해 사고를 친다면 그 몫은 오롯이 그가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카일루스는 토사물에 처참하게 버무려졌던 옷가지들을 떠올리다 세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

“정말 걱정도 많으시네요.”

잠시 고민하던 일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을 이었다.

“또 주사 부리면 소원 하나 들어드릴게요. 어때요?”

“내가 무슨 소원을 얘기할 줄 알고 그런 약속을 덜컥 해?”

“그만큼 자신 있다는 거죠.”

일리아는 발그레 물든 얼굴로 술병을 작게 흔들었다.

“자, 카일루스도 마셔요, 마셔!”

【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

“일리아, 너무 마시는 거 아니야?”

“이 정도는 괜찮…….”

“조심해.”

겉옷을 벗어 일리아의 어깨에 걸쳐 준 카일루스는 한 손으로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쌌다. 절벽이 꽤 높아 자칫 잘못했다가는 크게 다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지금 일리아는 완벽하게 취한 상태였다. 그녀의 주사가 얼마나 심한지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더욱 조심해야 했다.

“카일루스.”

그때, 일리아가 카일루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작게 웅얼거렸다.

“후회하지는 않으세요?”

“뭘?”

“그냥,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요.”

술기운 때문인지 이런저런 생각이 일리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만약 그날 일리아가 술에 취해 에렉을 찾아 나서지 않았다면, 아니, 애초에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이렇게 카일루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의도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카일루스를 구설에 오르게 한 것도, 그로 인해 그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도 일리아였다. 지금은 황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인 행세를 하고 있지만, 일리아는 혹시라도 카일루스가 자신과 얽힌 것을 후회하고 있지는 않은지 항상 걱정했다. 그리고 그 걱정은 지금도 마찬가지였고.

찰나의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맴돌았다. 가만히 일리아의 말을 곱씹던 카일루스는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후회한 적 없어.”

“…정말요?”

“내키지 않았다면 진작 모른 척했겠지.”

카일루스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일리아를 내려다봤다.

“하여간 내 귀염둥이는 쓸데없는 걱정을 너무 많이 한다니까.”

“어쩔 수 없잖아요. 시작부터 좋지 않았으니까요.”

일리아는 빈 술병을 톡톡 건드리며 말을 이었다.

“저는 카일루스를 만난 이후부터 좋은 일이 엄청 많이 생겼는데 카일루스는 저 때문에 매번 안 좋은 일에만 휘말리니까…….”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고? 예를 들면?”

“음……. 얼마 전에 플로라 영애와 화해했어요.”

“잘됐네.”

“그리고 또…….”

일리아는 눈을 느릿하게 깜박거렸다. 생각해 보면 에렉에게 화끈하게 쏘아붙일 수 있었던 것도 카일루스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때 카일루스가 직접 개입했더라면 에렉은 더욱 쉽게 물러났겠지만 정작 일리아는 하고 싶었던 말을 하나도 하지 못한 채 찝찝한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래서 고마웠다. 괜히 참견하지 않고 혼자서 해결할 수 있도록 기다려 줘서. 덕분에 얼마나 후련했는지 모른다.

“에렉과의 일도 그렇고……. 아, 작위를 받은 일도요.”

“그건 그대가 공을 세운 덕분에 받은 거잖아.”

“제가 공을 세울 수 있도록 믿고 맡겨 준 건 카일루스잖아요.”

일리아는 작게 웃으며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처음 술을 마시고 카일루스의 막사에 쳐들어갔던 일, 승전 기념 파티 때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빌었던 일, 함께 오페라를 보고, 빌른의 축제를 구경한 일 등. 물론 온실에서의 사건을 생각하면 항상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새롭고 즐거운 경험들이었다.

“고마워요, 카일루스. 그러니까…….”

일리아가 고개를 돌려 카일루스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자색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제 더는 죄책감 갖지 말아요.”

일리아의 말에 카일루스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멍하니 입만 벙긋거렸다.

“저를 봐요. 여기 카일루스가 구한 사람도 있어요.”

하얀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촉촉한 눈동자와 조화를 이룬 그 미소는, 가슴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니까 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사실 일리아는 그날 본 것을 모두 잊으려고 했다. 유족에 대한 보상 문제는 카일루스가 선택한 일이고, 오롯이 그의 의지에 맡겨 두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괜히 카일루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카일루스가 이따금씩 보여 주는 죄책감 어린 얼굴이 일리아의 마음을 움직였다. 일리아는 이렇게 버젓이 구원받은 사람이 있음에도 죽음만을 보는 카일루스가 안쓰러웠다. 그래서 더는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일리아가 사랑하는 가족들과, 그리고 카일루스와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그가 이루어 낸 결과물이 아닌가. 부디 그 사실을 그가 모르지 않길 바랐다.

“그대는 정말…….”

카일루스가 날카로운 눈매를 한껏 늘어뜨리며 웃었다.

“가끔씩 놀랍도록 예리할 때가 있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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