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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26)화 (26/101)

26화 

“프노이트 왕국이?”

“그래.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거절할 명분이 없어. 우리로서도 나쁠 건 없으니까.”

프노이트 왕국은 테멜 왕국의 하나뿐인 동맹국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테멜 왕국과 다시금 전운이 감도는 이런 시기에 화친을 청해 온 것이다. 수상하기 그지없었지만 거절할 명분 또한 없었기에 바이에드는 일단 사절단의 방문을 환영하며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곧 프노이트 왕국과 사절단의 방문 시기에 관해 논의할 예정이야. 최대한 늦출 거긴 하지만, 일단 알아 두라고.”

“염두에 두지.”

“아, 마지막으로…….”

테오도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라니체 경.”

“말씀하십시오.”

“카일루스가 잘해 주나?”

“네, 네? 그럼요. 잘해 주십니다.”

“테오도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일이나 해. 가자, 일리아.”

테오도르에게 쏘아붙인 카일루스가 일리아를 이끌고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의 모습이 거대한 문 너머로 사라지고, 넓은 응접실에 혼자 남겨진 테오도르는 굳게 닫힌 문을 지그시 바라봤다. 찬란한 황금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 * *

일리아는 카일루스와 상의한 끝에 길었던 청소부 생활을 청산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와 맺은 계약이 유명무실해진 것도 있고, 슬슬 마물에 관한 조사도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리아는 마법사 협회의 회원이자 이번 사건의 당사자였기에 생포한 마물을 조사할 권리 또한 가지고 있었다. 카일루스를 통해 황실에 보고도 마쳤으니 이제는 그녀의 일을 할 때였다.

‘하아, 신경 쓸 게 너무 많은걸.’

한숨을 푹 내쉰 일리아는 작은 가방을 들고 저택을 나섰다.

“짐 이리 주세요, 아가씨.”

“고마워.”

에나가 일리아의 짐을 마차에 싣는 동안, 일리아는 가만히 저택을 올려다봤다.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얼마나 막막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카일루스와 올린, 그리고 다른 사용인들 덕분에 제집처럼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을 두고 떠나려니 왠지 후련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왜 그러고 있어?”

그때, 카일루스가 저택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잔뜩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아래로 말끔한 얼굴이 보였다.

‘저 잘생긴 얼굴도 당분간은 볼 일 없겠네.’

그렇게 생각하니 일리아는 괜히 더 아쉬워졌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일리아는 속내를 숨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손.”

카일루스의 말에 상념에 잠겨 있던 일리아는 무심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이제는 익숙해진 온기가 맞닿은 손을 통해 전해졌다.

“오늘은 꽤 고분고분하네.”

“…다른 생각 중이었단 말이에요.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디 있어요?”

“다른 생각을 한 그대 탓이지.”

“갈수록 장난만 느시는 것 같아요.”

“내가? 설마.”

카일루스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도 일리아를 마차까지 에스코트해 주었다.

“아무튼 고마워요. 다음에 봐요, 카일루스.”

“그래. 조심히 가.”

마차에 올라탄 일리아는 마차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곧 마차가 작은 소음을 내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창밖을 바라보며 깊은숨을 내뱉었다. 약 두 달 만의 귀가였다.

* * *

“일리아!”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로비를 서성거리던 클리드가 한달음에 달려 나와 일리아를 맞이했다. 당연히 엘레나 혼자 있을 줄 알았던 일리아는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며 그에게 물었다.

“오라버니가 왜 이 시간에 집에 있어?”

“그놈이 편지를 보냈거든.”

“카… 각하께서?”

“그래. 네가 온다는데 일이 손에 잡혀야 말이지. 그래서 그냥 퇴근했어.”

클리드는 일리아의 등을 토닥이며 부드럽게 웃었다.

“아버지도 와 계셔. 같이 식사나 하자.”

“마침 말씀드릴 게 있었는데 잘됐네.”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일리아는 클리드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넓은 식탁 위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음식들이 펼쳐져 있었다. 레이븐과 엘레나가 상석에 앉은 채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얼른 앉으렴.”

“클리드에게 들었다. 할 말이 있다고?”

“네. 천천히 말씀드릴게요.”

일단 배가 고프거든요.

아침을 먹고 출발했음에도 집에 돌아오니 괜히 허기가 졌다. 일리아는 애피타이저와 메인 요리를 순서대로 먹어 치우고 디저트까지 말끔하게 해치운 후에야 말문을 뗐다.

“저 벌금 내야 돼요.”

“…응?”

“곧 황실에서 공문이 올 거예요. 제가 폐하께서 아끼시는 온실을 부숴 버렸거든요.”

엘레나의 눈이 삐죽 섰다. 곧 잔소리가 터져 나올 기세라 일리아는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사, 사고였어요! 온실에 마계의 마물이 나타났었거든요. 그걸 제압하는 과정에서 그만…….”

“얼마 전에 협회에 인계된 꽃 형태의 마물 말이니?”

“네. 혹시 뭔가 알아냈나요?”

레이븐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조사에 난항을 겪고 있는 모양이더구나.”

“그럼 제가 직접 가서 조사해 볼까요?”

“괜찮겠니?”

“네. 할 일도 많으신데 이런 것까지 아버지께 맡길 수는 없죠. 전 마물과 싸워 본 적도 있으니 뭐든 알아낼 수 있을 거예요.”

잔뜩 걱정하는 레이븐에게 클리드가 넌지시 말을 보탰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알겠다. 조심히 다녀오거라.”

클리드가 함께 간다면 안심이었다. 클리드는 그의 아들이었지만, 같은 마법사로서 경탄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만약 일리아가 마물 때문에 곤혹스러운 상황에 처한다 해도 그라면 능히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작은 문제가 하나 있다면, 클리드가 다른 마법사들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인데.

‘그건 일리아가 어떻게든 해 주겠지.’

레이븐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상념을 털어 냈다.

“할 말은 그게 다니?”

“아뇨. 한 가지 더 있어요.”

일리아는 따뜻한 홍차로 목을 축이곤 말을 이었다.

“곧 프노이트 왕국에서 사절단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프노이트 왕국이라고? 어디서 들은 거니, 일리아?”

“황태자 전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프노이트 왕국이 화친을 청해 왔다고요.”

“수상하긴 하구나. 테멜 왕국의 우방이 먼저 화친을 청해 오다니.”

레이븐은 가만히 턱을 문질렀다.

프노이트 왕국은 세계 최대의 마정석 생산지로, 양질의 마법사가 대거 포진해 있는 마도 왕국이었다. 고작 사절단을 이용해 제국에 분란을 일으킬 정도로 무모한 짓은 하지 않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말해 줘서 고맙구나, 일리아. 미리 준비하도록 하마.”

“조심하세요.”

“그래.”

말을 마친 일리아는 냅킨으로 입을 닦고 식사를 마무리했다.

* * *

이틀 후. 마법사 협회 측에서 그라니체 저택으로 마차를 보내왔다.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다는 편지도 함께였다. 조사에 난항을 겪고 있다고 하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더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클리드와 함께 마법사 협회로 향했다.

외성의 극동 쪽에 있는 마법사 협회의 건물은 일명 ‘검은 숲’이라고도 불리는 넓은 숲과 맞닿아 있었다. 검은 숲은 나무와 풀이 모두 검푸른색을 띠어 붙여진 이름인데, 연구 결과에 따르면 마력의 농도가 지나치게 높아 자연스럽게 변색된 거라고 한다. 마정석처럼 결정을 이룰 만큼 농도가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법을 연구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인 셈이다.

그런 이유로 마법사 협회의 초대 회장은 내성에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는 선황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덕분에 마정석 채석장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나라치고는 아제로스 제국도 마법사의 수준이 꽤 괜찮았다. 물론 클리드의 눈에 찰 정도는 아니었지만.

클리드는 마법사 협회에 방문할 일이 생기면 늘 ‘그 수준 낮은 것들을 또 봐야 한다고?’라며 신랄하게 비난하곤 했다. 지금도 그랬다. 클리드는 일리아가 옆에 있음에도 미간을 잔뜩 구긴 채 언짢다는 티를 팍팍 냈다. 정말이지 애가 따로 없었다. 일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드디어 오셨……!”

“기다리고 있었습……!”

마법사들은 한달음에 달려 나와 일리아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들의 환한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의 뒤로 뾰로통한 클리드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클리드의 말간 얼굴을 확인한 마법사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썩은 사과처럼 거무죽죽해졌다.

“…클리드 님께서도 오신 겁니까?”

“왜? 반갑지 않은가 보지, 테드?”

테드는 기겁을 하며 언성을 높였다.

“반갑기는요! 이렇게 수준 낮은 곳에 걸음하면 멍청함이 옮는다며 매번 욕이나 하시는 분을 어떻게 반가워합니까!”

“그래서 따라온 거야. 우리 일리아한테 네 멍청함이 옮을까 봐 걱정돼서.”

클리드의 대꾸에 테드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처럼 천재로 태어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그러니까 빨리 돌아가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안내나 해.”

“…따라오십시오.”

클리드가 일리아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에스코트했다. 잔뜩 구겨져 있던 미간은 이미 말끔하게 펴진 지 오래였다.

“여깁니다.”

테드가 문을 열자 키에에엑! 하는 괴성이 들려왔다.

일리아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철창에 갇힌 마물이 뿌리를 휘두르며 위협해 왔지만, 마법사들에 의해 반쯤 잘린 뿌리는 그녀에게 닿지 못했다.

“마물은 마물이구나. 뿌리가 잘리고도 살아 있다니.”

“본질은 식물이야. 마계의 환경이 이 꽃을 마물로 만든 것뿐이지.”

“오라버니는 이 마물이 마계에서 왔다고 확신하는 거야?”

“그래. 잘 봐, 일리아.”

뒤에 도열해 있던 마법사들이 슬금슬금 클리드의 뒤로 자리를 옮겼다. 클리드는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설명을 이어 갔다.

“마계의 영향을 받은 것들은 모두 똑같은 특이점을 가지고 있어.”

“특이점?”

“그래. 바로 마력이야.”

클리드가 잘린 뿌리를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그러자 마수는 괴성을 내지르며 정제되지 않은 마력을 마구 방출해 댔다.

“자세히 봐.”

일리아는 심호흡을 하며 감각을 집중했다. 얼마 있지 않아 투명한 마력이 유형화되어 눈앞에 아른거렸다. 마물의 마력은 이전에 사로잡았던 테멜의 마법사처럼 불온한 검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마력의 성질과 빛깔이 완전히 달라.”

“맞아. 같은 예로 마족 역시 이런 마력을 가지고 있어. 마족은 마계에서 만들어진 종족이거든.”

“그런데 왜 인간계로 넘어온 거야?”

“마계는 한 종족이 터를 잡고 번식하기에는 상당히 척박해. 마력의 농도가 이상할 정도로 높아서 식물이 자라기 힘들거든. 무슨 종족이든 먹어야 살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럼 이 마물, 아니, 꽃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마물화했다는 거야?”

“정확해. 역시 내 동생이야.”

클리드는 흐뭇하게 웃으며 일리아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마력을 숨기는 데 능한 것도 다 생존의 일환이었던 거구나.”

“맞아. 그런 식으로 다른 마물을 유인해 잡아먹으면서 살아온 거지.”

그것도 오늘로 끝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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