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일리아는 도시의 불빛이 완전히 사그라들기 직전까지 빌른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축제를 즐겼다. 이미 반파된 온실에 관해서는 완전히 잊은 듯한 모습이었다.
“정말 즐거웠어요!”
고요한 언덕 위로 올라온 일리아는 잔디에 털썩 주저앉으며 도시를 내려다봤다. 선선한 봄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칠 때마다 향긋한 꽃 내음이 풍겨 왔다. 일리아는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방긋 웃었다.
“또 와 보고 싶을 정도예요.”
“다행이네. 황성에 끌려가기 전에 기분 전환이라도 해서.”
“…잊고 있었는데.”
“그렇게 큰 사고를 잊으면 안 되지.”
일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법사단에서 잘리는 건 아니겠죠?”
“어느 정도 처벌은 내려지겠지만, 잘리지는 않을 거야.”
사실 카일루스는 일리아가 의상실에서 옷을 갈아입는 동안 가게 주인을 통해 편지를 한 통 보낸 참이었다. 수신인은 황태자인 테오도르였다. 편지에는 온실 사건의 전말과 함께 일리아의 과한 대처에 대해 정상 참작 해 달라는 내용을 담았다. 마물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일리아가 경상을 입었다는 거짓을 섞어서.
그러니 진실을 고한다고 한들 그렇게 큰 처벌을 받지는 않을 것이었다. 테오도르가 어떻게든 해결할 테니까.
그러나 카일루스는 그 사실을 일리아에게 알려 주지 않기로 했다. 전전긍긍하는 일리아의 모습이 꽤 귀여웠기 때문이다.
‘이러다 습관 들겠군.’
일리아는 그런 카일루스의 속도 모르고 조금씩 어두워져 가는 빌른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솔직히 혼자 싸운 것치고는 피해가 크지 않았잖아요. 사망자도 없었고요. 그러니까 괜찮을 거예요. 응, 그럴 거예요. 아니, 그래야만 해요…….”
“그만 중얼거리고 이리 와. 곧 있으면 시작할 거야.”
“뭐가요?”
카일루스는 시간을 가늠하며 까만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그 순간, 작은 소음과 함께 붉은 불빛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와!”
솟아오른 불빛은 팡! 하고 터지며 하늘에 찬란한 불꽃을 피워 냈다. 일리아는 눈을 빛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꽃처럼 피어난 붉은 불꽃은 승전 기념 파티에서 봤던 것만큼 환상적이었다.
“전에 좋아한다고 했잖아. 불꽃놀이.”
“맞아요!”
일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붉은 불꽃이 사그라드는 것과 동시에 파랗고 노란 불빛이 뒤이어 솟아올랐다. 색색의 불꽃이 연달아 터지면서 까만 하늘이 금세 오색으로 물들었다.
“앉아서 봐. 오늘 많이 걸었잖아.”
“괜찮아요.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걸요.”
일리아의 말에 카일루스는 픽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불꽃놀이에 푹 빠진 일리아는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색색으로 물든 하얀 얼굴에 절로 시선이 갔다.
‘이 기분은 대체 뭐지.’
처음에는 순전히 죄책감 때문에 잘해 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일리아가 그런 끔찍한 참사를 겪은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런데 요새는 일리아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기 그지없었다. 항상 마음속에 드리워져 있던 죄책감마저 잊을 정도로 말이다.
기한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 이 연인 행세는 머지않아 끝나겠지만, 카일루스는 왠지 일리아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일리아가 또다시 에렉 같은 남자를 만나 마음 아파할 생각을 하니 괜히 속이 뒤틀렸다. 카일루스는 이게 무슨 감정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그새 정이 많이 들었구나.’ 하고 생각할 뿐.
“아, 벌써 끝나 버렸네요.”
카일루스가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하늘을 가득 물들이던 불꽃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일리아는 다시금 어둑해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삐죽거렸다.
“조금만 더 해 주지.”
“다음에 또 보러 오면 되지.”
일리아는 그에게 시선을 돌리며 살며시 웃었다.
“또 같이 와 주실 거예요?”
“물론이지.”
“알겠어요. 그럼 다음에 다시 보러 와요.”
일리아와 카일루스는 찬란하게 빛나는 추억을 뒤로한 채 저택으로 향했다.
* * *
“마음의 준비는 되셨어요?”
“아, 아, 아니…….”
“이제 슬슬 출발하셔야죠.”
“아니, 아니야. 난 못 가!”
방 안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던 일리아는 이를 악물며 창가에 올라섰다.
“나, 나는 지금 여기 없는 거야!”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잖아요. 얼른 다녀오세요.”
“하, 하지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다고!”
일리아가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려고 하자 에나가 양팔을 활짝 벌려 그녀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여기서 떨어지면 다치실 거예요.”
“나 마법사야, 에나!”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전 아가씨를 지킬 의무가 있는걸요.”
“내가 마법사인 건 중요한 게 맞거든?!”
일리아와 에나가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미리 나와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카일루스는 귓가를 울리는 소란에 후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활짝 열린 창문 너머에서 일리아와 에나의 목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카일루스는 눈썹을 들썩거리는 엘리엇을 뒤로한 채 후원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당장이라도 창문 밖으로 뛰어내릴 것처럼 몸을 허우적거리는 일리아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일리아?”
“카일루스?”
그때였다. 에나가 일리아의 허리를 붙들고 있던 팔을 휙 풀어 버린 것은. 덕분에 뛰어내릴 준비를 하던 일리아는 중심을 잃고 창밖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녀의 귓가로 ‘조심히 다녀오세요.’ 하는 에나의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아가씨를 지킬 의무가 있다고 할 때는 언제고!
“비, 비켜요!”
당황한 일리아는 마법을 쓸 새도 없이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곧 이어질 충격을 대비하며 일리아가 눈을 꾹 감는데, 밑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카일루스가 팔을 뻗어 일리아의 몸을 받아 들었다. 일리아는 무심코 카일루스의 목덜미를 끌어안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렸다.
“하아, 깜짝이야…….”
“그대는 정말 질리지도 않고 또 사고를 치는군.”
“에, 에나가 갑자기 손을 놓는 바람에!”
일리아가 이를 갈며 위쪽을 쳐다봤지만, 에나는 이미 자리를 뜬 지 오래였다.
“에나!”
“하녀는 이따 찾고 일단 가자. 황태자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셔.”
“전하께서요?”
“그래.”
일리아를 조심스럽게 내려 준 카일루스는 마차로 향하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몸이 좋지 않으시다면서 전하께 그대에 대한 처분을 일임하셨거든.”
“좋은 거예요?”
“폐하를 상대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
“그건 그렇네요.”
마차에 훌쩍 올라탄 일리아는 카일루스와 함께 황성으로 향했다. 거대한 성이 조금씩 가까워져 오자 괜히 속이 메슥거렸다.
“후우, 토할 것 같아요…….”
“긴장할 것 없어. 금방 끝날 테니까.”
마차가 멈춰 서자 푸른 머리의 시종이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람을 안내했다.
그를 따라 알현실 안으로 들어간 일리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웅장하기 그지없는 제좌 아래로 테오도르의 모습이 보였다.
테오도르가 싸늘한 눈빛으로 기사들을 둘러봤다.
“다 나가.”
“하지만 전하의 안위가…….”
“에스테반 공작 앞에서 내 안위를 걱정하는 건가?”
“…죄송합니다.”
알현실을 지키던 기사들이 밖으로 나가고, 테오도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번쩍이는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근엄하게 입을 열었다.
“일리아 그라니체 준남작.”
일리아는 한 손을 가슴에 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네, 전하.”
“현장에 있던 귀족들에게 들었다. 그대가 마물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온실을 부쉈다지.”
“죄송합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아니야. 고개 들어. 죄를 물으려는 게 아니니까.”
“…네?”
테오도르는 턱을 괴며 씩 웃었다. 입술은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사실 마음에 안 들었거든, 그 온실. 그라니체 경 덕분에 속이 얼마나 시원한지 몰라.”
나긋한 목소리에서 옅은 살기가 느껴졌다. 일리아는 몸을 흠칫 굳혔다.
“원인이었던 마물도 생포했으니 처벌은 가벼운 걸로 내리지. 으음, 그래. 대충 벌금형이 좋겠군.”
“…감사합니다.”
“조만간 그라니체 저택으로 공문을 보낼 테니 확실하게 지불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럼 공적인 이야기는 이쯤 해 두고, 나머지 이야기는 내 거처에서 마저 할까.”
테오도르가 따라오라고 손짓하며 알현실을 나섰다. 그에 일리아는 지레 겁을 먹었다. 그녀는 이제 막 처벌을 받은 참이었다. 그런데 황태자와 따로 이야기까지 하게 생겼으니 어떻게 태연할 수 있겠는가.
“저, 저 또 뭐 잘못했어요?”
“아니.”
“나머지 이야기라고 하셔서…….”
“별거 아닐 거야. 일단 가자.”
일리아는 카일루스와 함께 테오도르의 뒤를 따랐다.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복도를 지나 정원으로 나오자 백금으로 만든 황태자궁이 보였다. 황태자궁은 알현실이 있던 황제궁 못지않게 화려하고 웅장했다.
“편하게 앉아.”
일리아와 카일루스가 맞은편에 앉자 시종이 차를 내왔다. 오묘한 빛깔의 블루맬로였다.
일리아는 차를 마시는 척하며 테오도르를 힐끔거렸다. 알현실에서는 겁에 질려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어쩐지 카일루스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사한 점이라고는 태양처럼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 하나밖에 없었음에도.
“그날 온실에 있었던 게 마계의 마물이라고?”
“그렇습니다.”
“딱딱하게 굴기는. 평소처럼 해, 카일루스.”
테오도르가 실소를 터뜨리자 카일루스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체통 지켜, 황태자 전하.”
“뭐 어때, 네 연인인데.”
“시끄러워.”
카일루스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테오도르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더니 화제를 돌렸다.
“사실 얼마 전에 보고가 있었어. 테멜의 왕이 폐하께 독대를 청했다더군.”
“갑자기?”
“그래. 폐하께서는 당연히 거절하셨고.”
“테멜의 동향은?”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어. 다만, 공교롭게도 어제 그런 일이 생겨 버린 거지.”
테오도르는 따뜻한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독대를 거절한 보복이라고 생각하면 나름대로 그럴듯하지 않아?”
만약 테오도르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상황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테멜 왕국의 뒤에 숨어만 있던 마족이 대놓고 경고를 해 온 상황이지 않은가. 아직 지난 전쟁에서의 피해를 완전히 수습하지 못한 아제로스 제국으로서는 껄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테오도르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프노이트 왕국이 화친을 청해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