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얼마 후, 불기둥은 조금씩 사그라들며 반쯤 타 버린 마물을 밧줄처럼 옭아맸다.
“끝난 거야?”
“네. 이제 기사단에 인계하고 조사만 끝내면…….”
“그런데 일리아.”
카일루스가 흩날리는 재를 휘휘 날려 보내며 말했다.
“조금 과한 거 아니야?”
“으음, 열이 받아서 그만…….”
“어느 정도는 부숴도 된다고 했지, 이렇게 날려 버리라고 하지는 않았는데.”
일리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반파된 온실을 둘러봤다.
“마물도 잡았으니까 봐주시지 않을까요?”
“무슨 일이십니까!”
그때, 한 무리의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며 온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오, 온실이……!”
“이 온실은 황제 폐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곳인데!”
“감히 누가 이런 짓을!”
“당장 수사부터 시작……. 으악! 이건 또 뭐야!”
분주하게 주변을 살피던 기사가 불꽃에 묶여 있는 마물을 보며 몸서리쳤다. 갈색 잔뿌리가 잘게 꿈틀거리는 모습이 징그럽기 짝이 없었다.
“꽃, 아니, 마수인가?”
“대체 누가…….”
기사들의 말에 일부 귀족들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기사들은 그들을 따라 고개를 쓱 돌렸다.
“저분은……!”
그러고는 눈을 부릅뜨며 검을 내렸다.
졸지에 기사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카일루스는 긴장으로 굳어 있는 일리아를 등 뒤로 숨기곤 태연하게 말했다.
“수고가 많군.”
“각하!”
카일루스는 일리아를 힐끔 바라보더니 괜히 기사들을 타박했다.
“대체 수도 경비를 어떻게 서는 거지? 온실에 마계의 마물이 숨어들다니.”
“마, 마계의 마물이라고요? 정말 죄송합니다!”
“벌은 나중에 내릴 테니 일단 저것부터 마법사 협회로 가져가.”
“알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한 기사가 눈치를 살살 보더니 넌지시 말했다.
“혹시 각하께서 온실을…….”
“그렇다만?”
기사는 귀족들이 고개를 세차게 내젓고 있는 것도 모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 일단은 함께 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이 온실은 폐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장소라…….”
일리아는 사색이 되었다. 생략된 뒷말은 듣지 않아도 뻔했다.
‘각하가 아니었다면 사형이 내려졌을 겁니다!’
지레 겁을 먹은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손을 붙잡더니 그대로 냅다 도망을 쳤다.
“일리아?”
“이, 일단 가요! 이대로 끌려가서 죽고 싶지는 않단 말이에요!”
일리아는 높은 구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덕분에 기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온실에서 멀리 도망칠 수 있었다.
카일루스는 숨을 몰아쉬는 일리아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이렇게 도망칠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폐하께서 가장 아끼시는 곳이라면서요! 전 분명 죽을 거예요!”
“괜찮아.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잖아.”
“목격자도 버젓이 있는데 어떻게 각하께 맡기겠어요. 제가 가야죠. 그런데 일단 오늘은 아니에요. 겁나 죽겠다고요!”
카일루스는 울적해하는 일리아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내일 가. 같이 가 줄 테니까.”
“고마워요…….”
일리아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마물이 어떻게 온실에 있었던 걸까요?”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세 가지야. 마족, 마족의 사주를 받은 테멜인, 그리고 마족과 내통하는 제국인.”
“마지막 가능성은 별로 고려하고 싶지 않네요.”
“동감이야.”
일리아는 마지막에 들었던 소름 끼치는 비명을 떠올리며 몸을 잘게 떨었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그나저나… 여기는 어딜까요?”
고개를 휘휘 내저어 상념을 털어 낸 일리아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봤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생소했다.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길을 잘못 든 모양이었다.
“아마 빌른인 것 같은데.”
“비, 빌른이요?”
일리아는 사색이 되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빌른은 수도 내에서 악명 높은 무법 지대로 유명했다. 황실에서도 빌른의 범죄자들을 통제하지 못해 골머리를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리아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악명 높은 범죄자라고 해 봤자 평범한 사람이 아니던가. 고작해야 잡배에 불과한 그들이 아제로스 제국의 전도유망한 마법사인 그녀를 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현재 일리아가 걱정하고 있는 진짜 문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귀,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는 곳이잖아요!”
일리아의 말에 카일루스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귀신이라고?”
“저는 심각하다고요!”
일리아가 이렇게까지 귀신을 무서워하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바로 과거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일리아는 어렸을 때 마력이 폭주하는 바람에 목숨을 잃을 뻔한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기가 약해진 탓인지 악몽을 자주 꾸곤 했다. 그때마다 눈을 떠도 헛것이 보여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일리아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매사에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던 에나마저 눈물을 줄줄 쏟을 정도였으니 오죽했겠는가.
그 이후로 일리아는 귀신에 관한 것이라면 질색을 하며 듣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하필 귀신에 관한 소문이 무성한 빌른에 오게 된 것이다. 기구한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팔을 잡고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항상 거침없던 그녀와는 상반되는 모습에 카일루스는 괜히 장난기가 치솟았다. 그는 도망치려는 일리아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씩 웃었다.
“그럼 진짜 귀신이 나오는지 확인 한번 해 볼까?”
“뭐, 뭐라고요?”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카일루스!”
일리아는 결국 카일루스의 손에 이끌려 빌른의 깊은 곳에까지 발을 들이고 말았다.
카일루스의 팔에 딱 붙어서 마지못해 걸음을 떼던 일리아가 불안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어디… 어디 가는 거예요?”
“옷 갈아입으러.”
“옷은 왜요?”
“이렇게 화려한 차림은 표적이 되기 십상이거든. 사람한테도, 귀신한테도.”
“노, 놀리지 마요!”
카일루스는 근처 의상실에 들러 무난한 옷과 로브를 샀다. 품질은 별로였지만 악명 높은 도시답게 가격은 무지하게 비쌌다.
갈아입은 셔츠를 탁탁 털어 주름을 편 일리아는 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봤다. 괜히 마음이 초조해졌다. 귀신은 대체로 어두운 밤에 나타나는 법 아닌가.
“슬슬 해가 질 거예요.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그게 제일 걱정이거든요?”
카일루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일리아의 로브를 여며 주었다.
“일단 가자. 보여 줄 게 있어.”
카일루스가 일리아를 데려간 곳은 넓게 뻗어 있는 번화가였다.
“와, 이게 다 뭐예요?”
일리아는 눈을 빛내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빌른은 현재 축제가 한창이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오색의 불빛이 반짝거렸다.
“이 정도면 귀신도 도망가지 않겠어?”
“…놀리지 말라니까요. 저는 심각하다고요.”
“놀리다니.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여 주는 건데.”
“됐어요. 그건 그렇고 여기서 축제가 열리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아까 불꽃이 터지는 걸 봤거든. 자주 와 보기도 했고.”
카일루스는 고개를 숙여 일리아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사실 그 귀신 소문, 황태자 전하야.”
“네?”
“여긴 황실의 감시가 덜한 곳이라 종종 나와서 놀곤 했거든.”
“그럼…….”
“눈에 안 띄려고 최대한 은밀하게 다녔는데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지나간 자리마다 이상한 소문이 돌더군.”
카일루스의 말에 일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귀신이 사는 게 아니라면 더는 빌른을 무서워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 괜찮아졌어?”
“네. 일단은요.”
“그럼 가자. 구경시켜 줄게.”
카일루스는 일리아에게 빌른의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주었다.
빌른은 같은 수도 내에 있음에도 중심지인 아로스와는 많은 것이 달랐다. 고급스러운 카페나 아름다운 정원은 없었지만 건물들이 투박하면서도 멋스러워 나름대로 볼만했다.
“빌른의 축제는 항상 이런가요?”
“대체로. 아로스와는 많이 다르지?”
“네. 그래도… 좋네요. 생기가 느껴져요.”
일리아는 살며시 웃으며 거리를 둘러봤다. 빌른의 축제는 잔잔하고 화려한 아로스의 축제와 달리 떠들썩하고 자유로웠다. 빌른의 사람들은 골목에 한데 모여 앉아 술을 마시거나 길거리 한복판에서 춤을 추는 등 아로스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들을 서슴없이 했다. 그러나 그것이 나쁘게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생기가 느껴져 살아 있다는 느낌이 여실히 들었다.
일리아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검푸른 하늘과 오색의 불빛, 그리고 사람들의 활기찬 목소리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아직 볼 게 많아. 가자.”
다음 행선지는 야시장이었다. 일리아는 넓은 광장에 빼곡하게 들어찬 간이 천막들을 보며 눈을 빛냈다. 색색의 천막들은 낡고 빛이 바랬지만 그 아래에서 파는 것들은 눈이 돌아갈 정도로 흥미로웠다. 손수 만든 공예품부터 고가의 미술품까지. 이 작은 야시장에서는 아로스의 모든 가게를 모아 놓은 것보다 더욱 다양한 것들을 팔고 있었다.
“천천히 구경해 봐.”
“네!”
일리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천막 사이사이를 누볐다.
‘어? 저건…….’
그렇게 야시장을 반 바퀴쯤 돌았을 때였다. 무언가가 조잡한 가판대를 대충 훑던 일리아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건 바로 백금의 프레임에 황금빛 토파즈가 박힌 커프 링크스였다. 짙은 밤하늘 아래에서도 태양처럼 빛나는 모습이 왠지 카일루스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리아는 다른 가판을 살펴보고 있는 카일루스를 힐끔 바라보다가 가판대로 다가가 조용히 값을 치렀다. 물론, 악명 높은 도시답게 무지하게 비쌌다.
“카일루스.”
“왜?”
“줄 거 있어요.”
“뭔데?”
손수건 위에 작은 커프 링크스를 올려놓은 일리아는 그것을 카일루스에게 내밀었다. 황금빛 토파즈가 도시의 불빛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거렸다.
“이건…….”
“그동안 제 무례를 넘어가 준 답례예요.”
“무례였던 건 잘 아네.”
일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재차 커프 링크스를 내밀었다.
“그럼요. 그러니까 드리는 거예요.”
“됐어. 답례는 무슨.”
“비싸게 주고 산 거니까 받아 주세요. 아까 분명히 반품 불가라고 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꼭 받으셔야 해요.”
단호한 일리아의 말에 카일루스는 옅게 미소 지으며 커프 링크스를 받아 들었다.
“어쩔 수 없지.”
그러고는 기존에 착용하고 있던 푸른 커프 링크스를 빼고 일리아가 선물해 준 황금빛 커프 링크스를 착용했다.
“지, 지금 착용해 달라는 말은 아니었어요!”
“마음에 들어서 그래.”
“마음에 들어요?”
“그래.”
하얀 셔츠와 황금빛 커프 링크스는 마치 한 세트처럼 아주 잘 어울렸다. 그에 괜히 기분이 좋아진 일리아는 방긋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저쪽으로 가 봐요. 다른 곳도 구경하고 싶어요!”
“알겠으니까 천천히 가, 일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