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이쪽이에요!”
분주하게 주변을 살피던 일리아는 카일루스를 이끌고 막다른 골목 안으로 숨었다. 그러고는 숨을 죽이고 에렉과 노란 드레스의 영애를 지켜봤다.
옷깃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참이나 두리번거리던 에렉은 아무도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슬쩍 매무새를 정리했다.
“오늘따라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에렉이 소매를 탁탁 털자 그의 앞에 서 있던 영애 역시 부채를 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재미있었어요. 하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다음부터는 여기서 만나요.”
“그러는 게 낫겠어.”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일리아는 눈을 부릅떴다.
“소피아 랜더? 어떻게 두 사람이…….”
“흥미로운 조합이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랜더 영애는 플로라 영애의 친구라고요. 이럴 수는 없어요!”
당장 크리스틴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일리아는 주먹을 부들거리며 골목에서 뛰쳐나갔다. 아니, 뛰쳐나가려고 했다. 카일루스가 막지만 않았다면.
일리아는 의아해하는 얼굴로 카일루스를 올려다봤다.
“카일…….”
“쉿.”
카일루스가 에렉과 소피아를 응시하며 작게 속삭였다.
“이쪽으로 오고 있어.”
“뭐, 뭐라고요?”
카일루스의 말대로, 에렉과 소피아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이 숨어 있는 골목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당황한 일리아는 발을 동동 구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어떡해요!”
“들키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네. 그런데 어떻게…….”
일리아의 귓가에 ‘소리 내지 마.’ 하고 속삭인 카일루스는 조용히 몸을 틀더니 그녀를 골목 안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러고는 막다른 골목에 기대어 선 일리아의 허리를 감싸 안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순식간에 카일루스의 품에 안기게 된 일리아는 멍하니 눈만 깜박거렸다. 조각상 같은 얼굴을 바로 앞에서 마주하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고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옷깃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근육과 그늘진 황금빛 눈동자가 마치 각인처럼 눈에 박혀 들었다.
“쉿.”
카일루스의 따뜻한 숨결이 일리아의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일리아는 정신이 쏙 빠질 정도로 유혹적인 그의 모습에 손만 바르작거렸다.
그때였다. 골목 어귀에서 쯧, 하고 혀를 차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별게 다 설치는군.”
에렉은 괜히 언성을 높였다.
“어이, 거기. 여기는 사유지야. 그런 짓은 다른 데 가서…….”
“잠시만요.”
소피아가 골목으로 들어서려는 에렉을 만류하며 작게 속삭였다.
“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어요.”
“왜? 여긴 엄연히 내 저택 앞이라고.”
“옷차림을 봐요. 아무래도 고위 귀족인 것 같아요.”
골목 안쪽이 어둑하게 그늘져 있어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언뜻 보이는 의복의 재질이 상당히 고급스러웠다. 귀족들이 인적 드문 민가나 술집에서 방탕한 놀이를 즐긴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괜히 방해했다가 고위 귀족이기라도 하면 나중에 필시 경을 칠 터였다.
“가요. 어차피 가려던 참이었잖아요.”
“후우, 그래. 일단 가자.”
에렉과 소피아의 발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일리아는 그들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참았던 숨을 한 번에 토해 냈다. 잔뜩 긴장한 탓에 다리가 절로 휘청거렸다.
“괜찮아?”
“네, 네…….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일단 들키지는 않은 것 같아. 우리도 가자.”
“네…….”
카일루스의 손에 이끌려 근처에 있던 사설 마차에 올라탄 일리아는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쿵쿵거리는 맥동이 아직까지도 귓가를 울렸다.
에렉에게 들킬까 봐 마음 졸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카일루스의 돌발 행동에 놀랐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 강렬한 눈빛에 매료되었기 때문인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동요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자, 내려.”
“저택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요?”
“진정 좀 하고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일리아는 얌전히 마차에서 내렸다.
“여기는…….”
이번에 도착한 곳은 중앙 광장 오른편에 있는 거대한 온실이었다. 일리아는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유리 돔을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설마 여기도 처음 와 보는 거야?”
“네. 지나가다 본 적은 있지만 이렇게 와 보는 건 처음이에요.”
“나름 볼만할 거야.”
온실 안으로 들어선 일리아는 손을 맞잡으며 탄성을 내질렀다. 불투명한 유리를 투과해 비쳐 든 밝은 햇살이 이국적인 식물들을 환히 비추었다. 마치 그림과도 같은 그 모습에 일리아는 절로 마음이 벅차올랐다.
“마음에 들어?”
“네. 여기도 진작 와 볼 걸 그랬어요.”
“천천히 구경해.”
일리아는 카일루스와 함께 곧게 뻗은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자박자박 밟히는 모래의 감촉이 꽤 기분 좋았다.
“관리가 엄청 잘되어 있네요?”
“황제 폐하께서 특별히 아끼시는 곳이거든.”
이곳은 바이에드 황제가 십오 년 전에 타계한 리안나 황후와 백년가약을 맺은 장소로도 유명했다. 그래서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데이트 장소로 손꼽히곤 했다.
“어쩐지 커플이 많이 보인다 했더니…….”
“연인 행세를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라고 할 수 있지.”
“확실히 그렇긴 하네요.”
일리아는 은근하게 따라붙는 시선들을 무시하며 화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시니 향긋한 꽃 내음이 폐부 가득히 들어찼다.
“향이 정말 좋……. 어?”
그때, 일리아의 감각에 묘한 기운이 걸렸다.
“왜 그래?”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서요.”
일리아는 마력 탐지까지 해 가며 화원을 샅샅이 살폈다. 그리고 만개한 참나리꽃 사이에서 비슷하면서도 다르게 생긴 꽃 한 송이를 찾아냈다.
“이거 때문인가 봐요.”
일리아가 손으로 가리킨 꽃은 참나리꽃처럼 검은 반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꽃잎이 칼날처럼 길쭉하게 뻗어 있었으며 이파리 또한 달랐다. 게다가 미약하게나마 마력도 느껴졌다. 아무래도 외국에서 들여온 다른 품종이 참나리꽃 사이에 섞여서 재배된 듯했다.
“식물이 마력을 품고 있는 건 처음 봐요. 고서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는데.”
일리아가 눈을 반짝이며 꽃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그 순간, 꽃이 바람을 맞은 듯, 가볍게 살랑거렸다.
그에 알 수 없는 위기감을 느낀 카일루스는 일리아의 어깨를 감싸며 꽃을 경계했다. 왠지 가까이 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조심하는 게 좋겠어, 일리아.”
“괜찮아요. 그렇게 위험해 보이지도 않는데……. 으앗!”
어깨를 으쓱이던 일리아는 꽃잎이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자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저, 저게 뭐야!”
이리저리 꿈틀거리던 꽃은 이내 엄청난 양의 마력을 방출하며 꽃잎을 사방으로 뻗쳤다. 거대한 칼날이 되어 뻗어 나간 꽃잎은 곧 주위에 있는 것들을 닥치는 대로 베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나무들이 바닥에 쓰러지고, 찢어질 듯한 비명이 온실을 가득 울렸다. 일리아는 카일루스가 빠르게 당겨 안은 덕분에 꽃잎에 베이지 않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미처 피하지 못한 귀족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일리아는 밭은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녹색 식물과 붉은 선혈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어 시야에 박혀 들었다. 마치 마물에게 삼켜지던 별동대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듯했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과거의 기억에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일리아!”
그때, 카일루스가 일리아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며 말했다.
“정신 차려. 괜찮아?”
“괘, 괜찮아요.”
카일루스의 품에서 벗어난 일리아는 서서히 뿌리를 들어 올리는 꽃을 보며 얼굴을 굳혔다.
“어쩐지 익숙하다 했어요.”
“또 마계의 마물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요.”
카일루스는 꽃을 주시하며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지금 쓸 만한 전력은 그대뿐인 것 같군.”
“맡겨 주세요.”
“다치지 마.”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며, 일리아는 온실 전체에 결계를 쳤다. 꽃, 아니, 마물이 온실 밖으로 도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다친 귀족들은 카일루스가 지켜 줄 테니 그녀는 눈앞에 있는 마수만 처리하면 될 터였다.
후우, 하고 심호흡을 한 일리아는 양손에 불꽃을 피워 올렸다. 마계의 마물이라고 한들 본질적으로는 식물이었다. 태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어디, 얼마나 버티나 볼까.’
일리아는 땅으로 장벽을 세워 마물의 퇴로를 막고 붉은 꽃잎 위로 불꽃을 쏘아 보냈다. 이도 저도 못 하고 뿌리만 흔들거리던 마물은 꽃잎에 불이 붙자 소름 끼치는 괴성을 내지르며 타들어 가는 꽃잎을 잘라 냈다. 그러고는 무수히 떨어지는 불꽃의 비를 피해 땅속으로 몸을 숨겼다. 거대한 뿌리가 땅속을 이리저리 들쑤실 때마다 바닥이 크게 요동쳤다.
겨우 중심을 잡은 일리아는 흙을 감옥처럼 뭉쳐 마물을 사로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지상에 있을 때와는 달리 마물의 움직임이 매우 민첩해 잡기가 쉽지 않았다.
“어떤 것 같아?”
카일루스가 사방에서 솟구치는 뿌리를 쳐 내며 일리아에게 다가왔다.
“사람들은 어쩌고 저한테 오세요?”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어. 상황은?”
“생포하려고 했는데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일리아는 카일루스와 상황을 공유하며 계속해서 마물을 몰아붙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마물은 땅속으로 숨거나 다른 식물의 생명력을 흡수하여 치유하는 등 일리아의 공격에 점차 유연하게 대처하기 시작했다. 마치 공격에 대한 학습을 하는 듯했다.
일리아는 슬슬 머리에 열이 올랐다. 온실을 최대한 보존하면서 마물을 생포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열받게 하네, 저게!”
“다른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마물을 생포하는 것에만 집중해.”
“하지만…….”
카일루스는 날아드는 꽃잎과 뿌리를 쳐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 부숴도 상관없어.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알겠습니다!”
일리아는 짙게 웃으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곧, 웅혼한 마력이 온실 안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일리아를 중심으로 소용돌이를 이루기 시작한 마력은 머지않아 거대한 불기둥이 되었고, 선홍빛 불기둥은 순식간에 마물을 집어삼켰다.
거대한 화마가 온실을 뚫고 하늘 높이 치솟았다. 다시 한번 땅속으로 파고들려던 마물은 숨 막히는 열기에 찢어질 듯한 괴성을 내질렀다.
“진작 이렇게 할걸. 괜히 고생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