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잘 해결되길 바랄게요.”
“고마워요.”
“아, 그러고 보니 요새 랜더 영애는 어떻게 지내요?”
“소식 못 들었어요?”
“무슨 소식이요?”
크리스틴은 랜더 가문이 어떻게 되었는지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얼마 전 채권자들이 랜더 저택에 들이닥쳐 온 집 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영지까지 빼앗길 상황에 내몰렸으나 익명의 귀족이 돈을 빌려준 덕분에 겨우 급한 불은 껐다고.
일리아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아쉬워졌다. 이렇게 기사회생할 줄 알았다면 그 망할 입이라도 한 대 때려 줄 것을.
“아마 지금은 그라니체 영애를 생각할 여유도 없을 거예요.”
“그건 다행이네요.”
일리아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크리스틴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섰다.
“이만 가 봐야겠네요. 사과 받아 줘서 고마워요, 그라니체 영애.”
“네. 또 봐요, 플로라 영애.”
크리스틴을 배웅한 일리아는 방으로 올라와 가볍게 채비를 했다.
“벌써 가시려고요?”
“곧 돌아올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럼 다녀올게.”
로레인이 아쉬워하는 티를 냈지만 일리아는 단호하게 손을 흔들며 저택을 나섰다.
무려 말도 없이 일주일이나 자리를 비우지 않았던가. 그럴 일은 없겠지만, 카일루스가 그녀가 계약을 이행하기 싫어서 도망쳤다고 생각하면 어쩌나 염려되었다.
“저 왔…….”
“드디어 탕아가 돌아왔군.”
“하, 하하. 저도 반가워요, 카일루스.”
카일루스는 일리아가 자리를 비운 게 내심 못마땅했던 것인지 한동안 더욱 짓궂게 장난을 쳐 댔다. 결국 폭발한 일리아가 언성을 높이면서 상황은 일단락되었지만, 이후로도 카일루스는 며칠 동안이나 툭툭거렸다.
‘어쩌다 이렇게 변하신 거지?’
일리아는 무섭지만 카리스마 있었던 과거의 카일루스를 그리워하며, 슬그머니 빗자루를 들었다.
【 드리워지는 그림자 】
에스테반 저택을 청소하는 일도 어느덧 막바지에 달했다.
처음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청소에 임했던 일리아였지만, 요새는 게으름을 피우며 카일루스의 집무실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슬슬 청소하는 게 지루해진 탓이다. 매일 같은 행동만 반복하다 보니 질리다 못해 좀이 쑤셨다. 카일루스 역시 일리아가 마지막까지 열심히 할 것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그녀가 갑자기 집무실에 찾아와도 별다른 말 없이 맞이해 주었다.
“카일루스, 맨날 그렇게 일만 하면 지루하지 않아요?”
카일루스의 집무실에 앉아 쿠키를 집어 먹던 일리아가 미동도 없이 서류를 훑어보고 있는 그를 보며 말했다.
“재미도 없고, 몸도 찌뿌둥하고 그럴 것 같은데.”
“일을 재미로 하는 사람도 있나?”
“그건 아니지만 쉬는 것도 중요한 일 중 하나라고요. 벌써 며칠째 그러고 계시잖아요.”
언뜻 듣기에는 카일루스를 걱정하는 말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저 심심해 죽겠어요.’ 하는 투정에 가까웠다.
포상 휴가를 받은 이후로 일리아는 승전 기념 파티에 참석하고 플로라 저택에 다녀오는 등 나름대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최근에는 특별한 일정도 없는 데다가 카일루스마저 일 못 해 죽은 귀신이 붙은 것처럼 일만 하는 바람에 아주 심심해 죽을 지경이었다.
일리아가 계속해서 주절주절 말을 걸어오자 카일루스는 결국 깃펜을 내려놨다.
“알겠어. 나가자.”
“정말요?”
“최근에는 대외 활동도 뜸했으니까. 슬슬 사람들에게 함께 있는 모습을 보여 줘야지.”
간단하게 외출 준비를 하고 저택을 나선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번화가로 향했다.
“어디 가는 거예요?”
“사람 많은 곳.”
마차는 거대한 오페라 하우스 앞에서 멈춰 섰다. 카일루스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는 웅장한 오페라 하우스를 올려다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저 여기 처음 와 봐요!”
일리아는 명망 높은 귀족 가문의 자제였지만 단 한 번도 이렇다 할 취미 생활을 즐겨 본 적이 없었다. 일 년에만 크고 작은 임무가 수십 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인지라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취미는 사치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오페라 하우스를 앞에 두니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음에 들어?”
“완전요!”
“그럼 들어가자.”
“네!”
오페라 하우스의 지배인은 두 사람을 에스테반 가문의 전용석으로 안내했다. 무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명당이었다.
일리아는 눈을 반짝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번쩍거리는 내부 시설과 넓은 무대가 마치 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시작한다.”
마법으로 만든 오색의 조명이 무대를 비추고, 드디어 1막의 막이 올랐다.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화려한 옷을 입은 가수들이 무대 위로 올라와 노래하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존재도 잊은 채 완전히 오페라에 빠져들었다.
카일루스는 가수들의 노래와 연기 하나하나에 웃고 탄식하는 일리아를 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저 사람이 많을 법한 곳을 떠올린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좋아해 주니 그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너무 재미있어요!”
한 시간가량의 무대가 끝이 나고, 2막이 오르기 전까지 약 20분의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일리아는 의자에 편하게 기대어 앉으며 환하게 웃었다.
“오페라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와 볼 걸 그랬어요.”
“볼만해?”
“그럼요! 카일루스는 별로였어요?”
“아니. 나도 재미있었어.”
이미 수도 없이 본 오페라였지만, 카일루스는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나름대로 흥미로운 것을 목격하기도 했고.
“사실 아까 더 재미있는 걸 보긴 했는데.”
“더 재미있는 거요?”
“저기.”
카일루스를 따라 고개를 돌린 일리아는 헉, 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그의 시선 끝에 있는 것은 바로 에렉 로베르트였다. 저택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던 그는 노란 드레스를 입은 영애와 진한 포옹을 나누고 있었다.
“저, 저, 저……!”
“에렉 로베르트 맞지?”
“맞아요!”
에렉은 오페라 하우스가 공공장소라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실실 웃으며 영애의 손을 지분거렸다.
“어우, 왜 저래, 진짜!”
“새삼스럽게.”
“내가 저런 거랑 결혼할 생각을 했었다니.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됐었나 봐요.”
입술을 달싹이며 소리 없는 욕을 중얼거리던 일리아는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2막의 막이 올랐다. 사위가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일리아는 무대에 집중하기 위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나 1막을 볼 때처럼 완전히 극에 몰입할 수는 없었다. 에렉이 계속해서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에게 미련이 남아서는 아니었다. 그저 크리스틴을 두고 대체 어떤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것인지 궁금할 뿐이었다.
‘저게 누구……. 헉!’
호기심에 다시금 그들을 힐끔거리던 일리아는 눈을 부릅떴다. 에렉이 이름 모를 영애의 허리를 잡아끌더니 그대로 입을 맞춘 탓이다. 농밀하기 그지없는 그들의 모습에 일리아는 잔뜩 붉어진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왜 그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시만요. 잠시만…….”
카일루스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일리아는 심호흡을 하며 방금 본 장면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머리는 마치 고장 난 영상석처럼 같은 장면만을 반복하여 상기할 뿐이었다.
‘어떻게 공공장소에서 저런 남사스러운 행동을……!’
급기야 카일루스의 팔까지 꼭 붙든 일리아는 결국 오페라가 끝날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괜찮아?”
“…네. 괜찮아요.”
“무슨 일인데?”
“그게… 에렉이 함께 있던 영애와 입, 입을…….”
“입?”
“그러니까 이, 입…….”
끝내 말을 마치지 못한 일리아가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카일루스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냈다. 웬만한 일에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던 일리아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까지 큰 반응을 보이는 건 처음이라 그런지 나름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 입이 어쨌는데?”
“입을……. 이, 이걸 어떻게 제 입으로 말해요!”
일리아가 눈만 빼꼼 내놓으며 울먹거렸다. 순간, 카일루스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발그레 달아오른 얼굴과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눈동자, 그리고 가느다란 목소리까지. 평소와는 확연하게 다른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일렁거렸다.
당황한 카일루스는 ‘내가 귀여운 걸 좋아했었나.’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대충 알아들었어. 일단 일어나. 나가자.”
“네에…….”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손을 잡고 오페라 하우스를 나섰다. 신선한 바람을 쐬며 마음을 가라앉히자 이제는 에렉과 입을 맞추던 영애가 누구인지 확인하지 못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일리아는 마차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근처 골목으로 방향을 틀었다.
“왜 그래?”
“확인할 게 있어서요. 카일루스도 얼른 이쪽으로 와요!”
일리아가 손을 휘휘 흔들었다. 잠시 고민하던 카일루스는 마지못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인적이 완전히 드물어졌을 무렵, 오페라 하우스 안에서 에렉과 노란 드레스의 영애가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은 세간의 시선을 의식한 것인지 각각 옷깃과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사악하게 웃은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팔을 잡고 조용히 그들을 미행하기 시작했다.
“나중에 조사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냥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그래요.”
사실 일리아는 상대를 확인하고 나면 이 모든 사실을 크리스틴에게 고자질할 생각이었다. 크리스틴도 파혼을 고려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분명 큰 도움이 될 터였다.
“마차를 타려는 것 같은데?”
“그럼 저희도 타요!”
일리아는 마차 대여소로 가 그럭저럭 탈 만한 마차를 빌렸다. 에스테반 가문의 마차는 지나치게 크고 화려해 미행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편하긴 하겠지만, 들키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저 마차 따라가요. 절대 놓치면 안 돼요!”
“아, 알겠습니다.”
마차가 삐걱거리는 소음을 내며 천천히 움직였다. 일리아는 창문에 딱 달라붙어 전방을 주시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돼?”
“그럼요. 플로라 영애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일리아는 주먹을 꾹 쥐며 전의를 불태웠다.
“다 고자질할 거예요. 바람을 피웠으면 대가를 치러야죠!”
“하아, 누군지 확인만 하면 가는 거야.”
“네!”
중앙 광장을 벗어나 삼십 여분을 달린 마차는 수도 외곽의 작은 저택 앞에서 멈춰 섰다.
일리아는 마부에게 값을 치르고 주위를 둘러봤다. 저택 주변은 지나칠 정도로 한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