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하여간 안 어울리게 섬세하시다니까.”
“누가?”
“깜짝이야!”
일리아는 펄쩍 뛰며 먼지떨이를 내던졌다.
“기, 기척 좀 내고 다녀요!”
“두 번이나 불렀어.”
“…그랬어요?”
카일루스가 바닥에 떨어진 먼지떨이를 일리아의 손에 쥐여 주며 물었다.
“어디 가는 길이야?”
“그냥 쉬러요. 오늘 치 청소는 다 했거든요.”
“그럼 잠깐 시간 좀 내지. 할 말 있어.”
일리아를 응접실로 데려온 카일루스는 들고 있던 종이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건 바로 황실의 공문이었다. 공문에는 다음 달부터 대대적으로 이종족에 관한 교육을 시행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된 거예요?”
“그래.”
“잘됐네요!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오라버니가 책임지고…….”
뿌듯하게 웃던 일리아는 돌연 숨을 들이켰다.
“왜 그래?”
“오, 오라버니한테 미리 얘기한다는 걸 깜빡했어요…….”
불과 얼마 전에도 저택에 다녀왔는데 이걸 깜빡하다니!
“바로 다음 달부터 교육에 들어가야 하는데?”
“…잠시 저택에 다녀와도 될까요?”
“얼마든지.”
“최대한 빨리 다녀올게요!”
일리아는 마차를 타고 서둘러 그라니체 저택으로 향했다.
“오라버니!”
서재 문을 벌컥 열어젖힌 일리아는 숨을 고르며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일리아?”
“내가……. 허억, 내가…….”
“앉아서 천천히 말해. 숨 좀 고르고.”
“후우, 급하게 오느라. 내가 아주 중요한 걸 깜빡하는 바람에…….”
“혹시 이거?”
클리드는 낮게 웃으며 하얀 종이를 팔락거렸다. 그것은 카일루스가 보여 줬던 것과 같은, 황실의 공문이었다.
“마, 맞아, 그거!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각하께서 쓸 만한 의견이 없다고 하시길래 이종족에 관한 교육이라도 받으면 낫지 않을까 싶어서…….”
“네가 직접 제안한 거야?”
“응. 모두에게 서고에 있는 고서를 빌려줄 수는 없으니까 오라버니가 직접 교육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어. 멋대로 굴어서 미안해.”
일리아는 고개를 살짝 숙여 사과의 뜻을 전했다. 생각해 보니 클리드는 현재 황성의 아이기스를 관리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바쁜 레이븐을 대신하여 엘레나를 돕고 있었다. 그런 클리드에게 이종족 교육과 같은 장기 업무까지 떠넘겨 버린 것이 아닌가. 자칫 잘못하다가는 클리드가 과로로 쓰러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더욱 미안해졌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정말 미안해, 오라버니.”
“아니야. 사과할 필요 없어, 일리아. 이 오라버니는 정말…….”
“미…….”
“감격했단다. 네가 나를 그렇게까지 믿고 있었다니.”
클리드는 진심으로 감격한 것인지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그에 일리아는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그, 그럼! 오라버니가 아니면 누굴 믿겠어!”
“그건 그렇지.”
“이번 일도 오라버니가 맡아 주면 정말 기쁠 거야. 가문의 명예이기도 하고!”
“알겠어. 내가 할게. 아 참, 일리아.”
한참 감격에 젖어 있던 클리드가 돌연 얼굴을 굳히더니 일리아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기왕 왔으니까 하는 얘긴데, 가짜 연애를 하는 건 좋지만 너무 휘말리지는 마. 에스테반 공작은 딱 봐도 여자깨나 홀리게 생겼잖아. 너는 마음도 여리고 정에 약하니 이 오라버니가 이렇게 경각심을 일깨워 주지 않으면…….”
클리드는 일리아를 앉혀 놓고 주절주절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5분이 지나고, 또 10분이 지났다. 클리드의 걱정 섞인 뒷담화는 한참이 지나도 끝날 줄을 몰랐다. 더 붙잡혀 있다간 오늘 내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일리아는 기회를 엿보다가 냅다 도망쳤다.
“일리아!”
“잔소리는 다음에 들을게, 오라버니! 따라오면 미워할 거야!”
다급한 마음에 계단에서 훌쩍 뛰어내리려는데 근처에 있던 하녀가 일리아의 허리를 꼭 붙들었다.
“아가씨, 다쳐요!”
일리아의 허리를 붙든 사람은 에나가 자리를 비울 때마다 그녀의 일을 대신 해 주던 하녀, 로레인이었다.
“어머, 로레인. 오랜만이야.”
“어머, 가 아니에요, 아가씨. 다치니까 얼른 내려오세요!”
일리아는 난간에서 슬쩍 내려오며 드레스를 탁탁 털었다.
“다들 내가 마법사라는 사실은 잊고 사는 모양이야.”
“아가씨께서는 마법사이기 이전에 제 소중한 아가씨세요. 그러니까 막는 게 당연하죠.”
“과잉보호야, 그거.”
“그것보다 손님이 오셨어요. 크리스틴 플로라 님이요. 아가씨를 찾고 계세요.”
“뭐? 누구? 크리스틴 플로라?”
“네. 응접실로 모실까요?”
일리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렇게 해 줘. 차도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원래 기별도 없이 대뜸 저택에 찾아오는 것은 예법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일리아는 굳이 트집을 잡으면서까지 크리스틴을 내쫓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찾아온 것인지 내심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랜더 영애에 관한 건가?’
일리아는 플로라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응접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단정한 드레스를 말끔하게 차려입은 크리스틴의 모습이 보였다.
“플로라 영애가 여기까진 무슨 일이에요?”
“할 말이 있어서요.”
“할 말이요?”
일리아의 날 선 물음을 가볍게 받아넘긴 크리스틴은 찻잔으로 시선을 돌리며 넌지시 말을 꺼냈다.
“…사과하러 왔어요.”
“사과요?”
“전에 그라니체 영애를 괴롭힌 일이요.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몰아붙여서 미안해요.”
크리스틴은 체면치레로 하는 사과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듯 일리아를 향해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소피아의 말만 믿고 진위 여부는 확인해 보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랜더 영애가 무슨 말을 하든 방관한 거였군요.”
“다 제 잘못이에요. 미안해요. 변명은 하지 않을게요.”
담담한 크리스틴의 사과에 일리아는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대부분의 귀족은 잘못을 저질러도 남 탓을 하거나 조용히 덮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귀족으로서의 체면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크리스틴은 소후작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리아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알겠으니까 이만 돌아가요.”
“…그라니체 영애.”
“진짜 사과는 약속도 없이 대뜸 찾아와서 밀어붙이는 게 아니에요. 다음부터는 충분한 성의를 보여 주세요. 그럼 생각해 볼게요.”
그동안 크리스틴 때문에 불편하게 지내 온 시간이 얼마던가. 지금은 비록 일말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과거에는 사랑하는 약혼자를 빼앗기기까지 했다. 쉽게 사과를 받아 주기에는 일리아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크리스틴 역시 일리아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해요. 충분한 성의를 보였어야 했는데…….”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죠. 배웅은 안 할게요. 조심히 들어가요.”
일리아는 멀어지는 크리스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리 없는 환호를 내질렀다.
야호! 통쾌해!
가슴속에 맺혀 있던 응어리가 사르르 녹는 듯한 기분이었다.
‘다음에 찾아오면 대충 받아 주고 넘어가야지.’
일리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응접실을 나섰다.
* * *
일리아는 용건을 모두 끝냈음에도 에스테반 저택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게 다 크리스틴 플로라 때문이었다.
귀족 영애의 표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크리스틴은 정말 귀족다운 방법으로 사과의 뜻을 전했다. 바로 재물 공세였다.
부드러운 실크와 질 좋은 보석, 그리고 묵직한 금괴까지. 크리스틴은 그날 오후부터 온갖 재물을 짐마차에 실어 보내기 시작했다. 충분한 성의를 보이겠다더니 설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냥 다시 찾아오기만 해도 사과를 받아 줄 텐데.’
일리아는 혀를 내두르며 짐마차를 돌려보냈다. 고작 사과 한 번에 이런 거액을 받아 챙기는 것은 너무 염치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크리스틴은 일리아의 뜻을 다르게 해석한 것인지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하루가 멀다 하고 짐마차를 보내왔다. 마차에 실린 재물은 양이 점점 많아져 이제는 짐마차 다섯 대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일리아는 플로라 저택으로 서신을 보냈다. 당장 튀어 오라고!
“플로라 영애.”
“…네.”
다시 마주한 크리스틴은 전처럼 담담한 모습이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조금 야위었다는 것뿐일까. 일리아는 안색이 좋지 않은 크리스틴을 노려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를 돌려보낸 건 모자라다는 게 아니라 필요 없다는 의미였어요.”
“…몰랐어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성의를 보이라는 게 아니라 적어도 정식으로 약속이라도 잡고 방문해 달라는 뜻이었고요.”
“…미안해요.”
일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무래도 후작가의 후계자로서 사업가들만 상대하다 보니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완전히 굳어진 모양이었다. 세상에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었다. 가령 사람의 마음처럼.
일리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사과 받아 줄게요. 그러니까 그놈의 금괴 좀 그만 보내요.”
“고마워요.”
“앞으로는 절대 이러지 말아요. 부담스러우니까요.”
“기억해 둘게요.”
일리아가 부드럽게 웃자 크리스틴 역시 짧은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덜어 냈다. 덕분에 응접실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라니체 영애,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대체 로베르트 영식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하아, 그게 말이죠…….”
일리아는 에렉과 사귀는 동안 있었던 일과 편지로 파혼을 통보받은 일, 그리고 승전 기념 파티 때 발코니에서 있었던 일까지 전부 이야기해 주었다. 딱히 두 사람의 관계에 영향을 주려는 건 아니었다. 적어도 크리스틴이 그녀가 약혼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았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플로라 가문에서 약혼을 재촉했다고요?”
“분명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서 어쩔 수 없었다고요.”
“말도 안 돼요. 이번 약혼은 로베르트 가문에서 먼저 제안한 일이었어요. 조건이 나쁘지 않아서 수락한 것이었고요.”
“그놈이 그럼 그렇지.”
코웃음을 치던 일리아는 아차 하며 입을 막았다.
“미안해요. 지금은 플로라 영애의 약혼자인데…….”
“괜찮아요. 어차피 파혼을 고려하던 중이었어요. 그런 남자를 플로라 가문에 들일 수는 없죠.”
크리스틴은 오히려 결혼 전에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며 일리아를 다독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