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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20)화 (20/101)

20화 

‘잘 드시네.’

일리아는 케이크를 우물거리며 카일루스를 바라봤다. 크루아상을 먹는 모습이 마치 잘 만든 조각상을 보는 듯했다.

‘진짜 잘생기긴 했단 말이야.’

전에도 느꼈지만, 얼굴 하나는 정말 예술이었다. 커튼처럼 드리워진 속눈썹도,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반짝이는 눈동자도. 은근히 사람의 시선을 잡아 끄는 무언가가 있었다.

“뭐 할 말 있어?”

일리아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것인지, 카일루스가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아니에요. 그냥 잘생겨서요.”

“뭐?”

앗, 실수했다.

무심코 본심을 내뱉은 일리아는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아, 아니. 그러니까!”

“전에는 취향이라는 게 따로 있다면서?”

“주관적인 취향하고 객관적인 잘생김은 다른 거니까요…….”

“흐음, 그래. 그렇게 마음에 들면 많이 봐.”

“…놀리지 마세요.”

어느새 크루아상을 다 먹은 카일루스가 나른하게 턱을 괴며 일리아를 바라봤다.

“일리아, 앞으로는 이름으로 불러.”

“싫어요. 부담스럽단 말이에요.”

“난 그게 더 좋은데. 황태자 전하가 부르실 때 외에는 들어 본 지가 오래되어서.”

가족이 모두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하면서 카일루스는 에스테반 가문의 유일한 구성원이 되었다. 즉 먼 친척인 황족을 제외하면 그의 이름을 불러 줄 사람이 단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는 소리다. 일리아는 괜히 측은지심이 들었다.

“으으, 정말! 알겠어요. 부를게요. 그럼 됐죠, 카일루스?”

“부담스럽다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나오네?”

“이래 봬도 엄청나게 용기 낸 거예요.”

일리아는 딴청을 피우며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다 먹었어?”

“네. 잘 먹었어요. 이만 가요.”

플렌저 부인의 배웅을 받으며 카페에서 나온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곧장 에스테반 저택으로 향했다.

“푹 쉬어, 일리아.”

“네. 각하께서도 푹…….”

“이름.”

“…카일루스도 푹 쉬어요.”

일리아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는 카일루스를 뒤로한 채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짧은 외출이었지만, 어쩐지 힘겨운 전투를 치른 것처럼 피곤했다.

* * *

며칠 후, 사교계가 발칵 뒤집어졌다. 일리아와 카일루스가 다정한 모습으로 데이트를 즐겼다는 목격담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일리아는 연일 귀족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개중에는 정말 떳떳한 관계가 맞냐며 비아냥거리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이런저런 소문만 무성하던 어느 날. 에스테반 가문에서 카일루스의 열애 사실을 대대적으로 공표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일리아에 관한 헛소문을 입에 담는 이는 에스테반 가문이 직접 나서서 응징하리라는 경고도 덧붙였다.

귀족들은 그것이 정말 헛소문이 맞는지 의구심을 가졌지만, 괜히 말을 얹지는 않았다. 카일루스가 무섭기도 했거니와 그들과 함께 전쟁에 참전했던 기사들이 앞다투어 소문의 진위 여부를 확인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에 따라 일리아를 괴롭히던 소문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기사들의 증언으로 일리아의 파혼 시기가 명확해지면서 일리아는 전쟁 중에 파혼을 통보받은 불쌍한 영애가, 에렉은 환승 이별을 택한 매정한 영식이 되었다. 플로라 후작이 말을 바꿀세라 서둘러 약혼을 진행했던 게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하하! 멍청한 놈! 그러게 감히 누굴 건드려!”

일리아는 삼류 악당이나 할 법한 대사를 날리며 열심히 도자기를 닦았다.

오늘 오전, 카일루스가 에렉의 소식을 전해 주었다. 제 꾀에 넘어가 되레 구설에 시달리게 된 에렉은 아직까지도 저택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했다. 덕분에 일리아는 기분이 좋다 못해 날아갈 지경이었다. 당분간은 그 못난 꼬락서니를 보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꼴좋다, 이 망할 놈…베르트!”

“아가씨.”

그때, 편지를 받으러 나갔던 에나가 돌아왔다. 에나는 언제나처럼 덤덤한 얼굴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전했다.

“뭐, 뭐라고?”

“백작 부인께서 편지를 보내셨어요.”

편지의 내용은 아주 짧았다.

[일리아, 당장 돌아오거라.]

일리아는 들고 있던 편지를 툭 떨어뜨렸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바람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원래 이런 일은 가족들에게 먼저 상의하는 게 도리였다. 귀족 간의 연애는 오롯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일단 각하께 가야겠어.”

일리아는 서둘러 카일루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각하!”

“이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것보다 중요한 게 또 있어?”

일리아는 카일루스에게 엘레나의 편지를 보여 주며 울상을 지었다.

“어떡하죠?”

“사실대로 말해.”

“그래도 돼요?”

“가족들마저 속일 수는 없잖아.”

카일루스는 엘레나의 심정을 이해했다. 사랑하는 딸의 열애 소식을 직접 들은 것이 아닌, 상대 가문의 공표로 먼저 접한 상황이 아니던가. 분노하는 게 당연했다.

“짐은 오늘 내로 정리해서 보내 줄 테니 일단 돌아가.”

“알겠어요. 그럼 다녀올게요!”

일리아가 집무실을 나서고, 혼자 남은 카일루스는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다녀온다고?’

* * *

그라니체 저택은 그야말로 살얼음판이었다. 넓은 거실에 모여 앉은 네 사람은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일리아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가족들의 눈치를 봤다. 그러던 와중, 엘레나가 먼저 말문을 뗐다.

“일리아 그라니체.”

“네, 네!”

“대체 언제 이야기할 생각이었니?”

“죄송해요…….”

“그럼 지금이라도 말해 보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일리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에렉이 억하심정을 가지고 이상한 소문을 퍼뜨렸고, 그것을 무마하기 위해 카일루스와 가짜 연애를 시작했다고.

일리아가 말을 마치자 엘레나가 한쪽 눈썹을 삐뚜름하게 올리며 말했다.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니?”

“지, 진짜예요! 물론 다른 이유도 있긴 하지만, 그건 각하의 사정이니 제가 함부로 말씀드릴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넌 정말…….”

공포의 설교가 막 시작되려던 찰나였다. 일리아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클리드가 넌지시 말했다. 길길이 날뛸 줄 알았던 그는 의외로 가장 태연했다.

“일리아도 벌써 성인입니다. 알아서 잘 처신하겠죠.”

레이븐도 은근슬쩍 클리드를 거들었다.

“그래요, 부인. 일리아를 믿어 봅시다.”

“여차하면 제가 직접 나서겠습니다. 그러니 일단은 넘어가시죠, 어머니.”

잠시 고민하던 엘레나는 결국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이번은 그냥 넘어가마. 대신, 이런 일이 있거든 앞으로는 먼저 말해 주렴. 이런 식으로 듣는 건 영 기분이 언짢구나.”

“죄송해요, 어머니. 명심할게요.”

“이만 올라가서 쉬어.”

일리아는 난처한 듯 웃었다.

“그게… 다시 가 봐야 해요. 아직 청소가 안 끝나서요.”

“아직도 청소 타령이니? 각하께는 내가 말씀드릴 테니 얼른 저택으로 돌아오렴.”

“여기에도 사정이……. 죄송해요!”

가족들에게 꾸벅 인사를 한 일리아는 서둘러 저택을 나섰다.

사실 청소는 핑계였다. 일리아가 에스테반 저택에 돌아가려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바로 귀찮기 싫어서였다.

연인이 되기로 한 이상 두 사람은 계속해서 말을 맞추고 정보를 교환해야 했다. 그때마다 두 저택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럴 바에는 차라리 에스테반 저택에 머무르며 작당하는 게 더 나았다.

마차에서 내린 일리아는 어느새 익숙해진 정문을 지나 카일루스에게 향했다.

“다녀왔어요!”

“잘 이야기했어?”

“네. 일단은요.”

“내 쪽에서도 말해 둘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고마워요, 각…일루스.”

카일루스는 픽 웃으며 깃펜을 내려놨다.

“일도 해결됐으니 식사나 하러 가지.”

“좋아요. 안 그래도 배고프던 참이었는데.”

일리아와 카일루스가 막 복도로 나왔을 때였다. 저 멀리서 카일루스의 보좌관인 엘리엇의 모습이 보였다. 엘리엇은 넓은 복도를 지나 카일루스에게 다가오더니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찾으십니다. 지금 당장 황성으로 오라시는 전언입니다.”

“식사만 마치고 가지.”

“하지만…….”

“나도 바쁜 사람이야. 갑자기 부르셨으면 기다리실 줄도 알아야지.”

손을 대충 내저어 엘리엇을 물린 카일루스는 일리아와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디저트까지 말끔하게 해치운 후에야 황성으로 향했다.

일리아는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며 다짐했다.

“저런 귀족은 되지 말아야지.”

* * *

이튿날, 일리아는 먼지떨이를 들고 카일루스의 집무실로 향했다. 청소에 익숙해지면 다시 집무실을 정리해 주겠다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리아는 청소를 시작하기 전부터 난관에 부딪치고 말았다.

“무슨 서류가 이렇게 많아?”

수많은 종이가 책상 위를 가득 메우다 못해 바닥에도 한가득 쌓여 있었다. 에스테반 가문에서 주관하고 있는 사업이 많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일리아는 혀를 내두르며 조심스럽게 먼지를 털었다.

그렇게 청소에 몰두하고 있는데, 문득 바닥에 쌓여 있는 서류가 눈에 들어왔다. 먼지떨이를 내려놓은 일리아는 서류를 한 장씩 들춰 봤다. 그것들은 사업에 관련된 서류가 아닌, 전부 지난 전쟁에서 전사한 병사들의 신상명세서였다.

‘이건 대체…….’

때마침 엘리엇이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라니체 님, 안에 계십니까.”

“아, 네. 들어와요.”

집무실을 스윽 둘러본 엘리엇이 일리아에게 넌지시 말했다.

“보셨습니까.”

뜨끔한 일리아는 서류를 들추던 손을 감추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어쩌다 보니…….”

“괜찮습니다.”

엘리엇은 흐트러진 서류를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각하께서는 현재 전사한 병사들의 유족을 찾아다니시며 목숨에 대한 보상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렇게 바쁘셨던 거군요.”

“수만에 이르는 병사들의 유족을 모두 찾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일리아는 서류 더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전장에서도 그는 별동대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며 죄책감에 젖어 있었다. 이제는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역시나 전쟁의 상처는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엘리엇, 내가 이걸 봤다는 건 비밀로 해 줘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왜 찾은 거예요?”

“별거 아닙니다. 아무 데도 안 계시길래 궁금했을 뿐입니다.”

“그래요? 그럼 수고해요.”

일리아는 착잡한 마음을 안고 집무실에서 나왔다.

아마 카일루스가 보상하려는 대상에는 일리아 역시 포함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러도 항상 웃으며 넘어가 주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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