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어서 오……. 어, 어서 오세요!”
카일루스와 일리아를 번갈아 쳐다보던 루네르의 조수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루네르는?”
“지, 지금 다른 손님을 응대하고 계십니다.”
“불러와.”
“알겠습니다. 일단 이쪽으로 오십시오!”
카일루스는 조수를 따라 의상실 안쪽에 있는 응접실로 향했다. 그가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귀족들이 눈을 부릅뜨며 두 사람을 쳐다봤다.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눈을 꾹 감았다. 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았다.
“이제야 조용해졌군.”
응접실 안으로 들어온 카일루스는 일리아를 소파에 조심스럽게 내려 주었다.
“이제 됐지?”
“…되긴 뭐가요! 또 무슨 소문을 만드시려고!”
“어차피 곧 공표할 건데, 뭐.”
“으으, 정말…….”
일리아는 고개를 휙 돌리며 드레스에 번진 얼룩을 만지작거렸다. 갑작스럽게 좁혀진 거리감에 놀랐기 때문일까. 괜히 심장이 요동치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죄송합니다. 많이 기다리셨죠!”
얼마 후, 루네르가 어색한 공기를 가르며 응접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루네르.”
“일리아 님! 오늘은 무슨 일로……?”
환하게 웃으며 일리아에게 향하던 루네르는 돌연 걸음을 멈췄다. 아무래도 세기의 커플이 온 것 같다는 조수의 말에 ‘세기의 커플은 무슨.’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루네르였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 세기의 커플이 일리아 그라니체 님과 카일루스 에스테반 공작 각하라니. 루네르는 사색이 되어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괜찮으니까 앉아.”
“네, 네!”
루네르는 카일루스의 눈치를 살피며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이 못내 안쓰러웠다.
“각하, 나가 계시면 안 돼요? 루네르가 불편해하잖아요.”
“아, 아니에요! 불편하지 않아요! 저는 괜찮습니다!”
“괜찮다잖아. 일단 드레스부터 해결해.”
카일루스의 말에 루네르는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는 깜짝 놀라며 소리를 빽 내질렀다.
“일리아 님! 이건 혹시……!”
“아니야! 루네르가 뭘 생각하든 그런 거 아니니까 그냥 앉아 있어!”
“그럼…….”
“차를 엎질렀을 뿐이야.”
“그, 그렇군요. 마침 그라니체 님께 딱 맞는 드레스가 있어요. 그거라도 드릴까요?”
“응. 부탁할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루네르가 자리를 비우자 넓은 응접실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일리아는 괜히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소문 한번 제대로 나겠네요.”
“그럼 더 좋지, 뭐.”
“그런데… 저랑 교제를 한다고 폐하께서 단념하실까요?”
바이에드 황제는 자존심이 강하고 고지식한 데다가 이루고자 하는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이루고 마는 사람이었다. 당분간은 세간의 시선을 의식해 섣불리 행동하지 않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결혼을 추진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단념하시게 해야지.”
“하아, 당분간 연애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크나큰 실연을 겪은 이후, 현재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은 일리아다. 그런데 에렉 로베르트 때문에 또다시 연애를 하게 생겼으니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인생이었다.
“그런데 일리아, 연인들은 주로 뭘 하지?”
“네?”
“내가 연애는 처음이라서.”
그런 사람이 옷을 가려 주겠다고 사람을 번쩍번쩍 안고 다녀? 일리아는 아는 놈보다 모르는 놈이 더 무서운 법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같이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고, 산책도 하고… 그 정도죠.”
“상투적이군.”
“그냥 좋아하는 사람과 일상을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거니까요.”
일리아는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이성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카일루스로서는 생소하기 그지없는 감정이었다. 카일루스는 어렸을 때부터 에스테반 가문의 독자라는 이유로 뭇 귀족들의 표적이 되어야만 했다. 그들은 차기 공작인 그의 옆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제 집안의 여식을 부추겨 카일루스를 옭아매려고 했고, 그 결과 카일루스는 이성이라면 학을 뗄 정도로 질색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리아와 함께 있는 것은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편하고 즐겁다고 느낄 때가 더 많았다. 그래서 이런 터무니없는 계획을 서슴없이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카일루스는 픽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부터 하나씩 해 봐야겠군.”
“오늘부터요?”
“내가 그대를 아주 맛있는 디저트 가게에 데려가 주기로 했다면서?”
“그, 그건 그냥 둘러대느라 한 말이었어요. 그때 각하 눈빛이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그때의 카일루스는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사자와 같았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일리아마저 솜털이 쭈뼛 설 정도였는데 일개 귀족 영애인 소피아는 오죽했겠는가. 오금이 저리다 못해 숨이 멎을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니었어.”
“아니요. 그 정도였어요. 각하는 각하 눈빛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실 거예요. 지금 와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사실 레널드도…….”
“일단 그것부터 바꿔야겠어.”
“어떤 거요?”
“호칭 말이야. 이름으로 불러 보는 건 어때?”
카일루스의 돌발 제안에 일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름으로요?”
“에렉 로베르트는 잘만 불렀잖아. 연인이라면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제가 어떻게 그래요.”
카일루스는 일리아의 상관이었던 데다가 방계 황족이기까지 했다. 고작해야 일개 백작 가문의 자제와는 존재감부터가 다르다는 말이었다.
“한번 해 봐.”
“모, 못 해요!”
“괜찮으니까 어서.”
카일루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슬금슬금 일리아에게 다가갔다.
“한 번만.”
“가, 각하!”
그런 그를 피해 몸을 물리다 보니 어느새 소파 팔걸이가 등에 툭 닿았다. 일리아는 무심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었다.
“한 번만 해 봐.”
“…혼내지 않으실 거죠?”
“당연하지.”
“하아, 그럼 알겠어요.”
일리아는 한참 동안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다, 넌지시 속삭였다.
“카일…루스.”
이상한 일이었다. 고작 이름을 입에 담았을 뿐인데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거세게 쿵쿵거렸다.
“한 번 더 해 봐.”
“자꾸 이러실 거예요?”
“연인 같고 좋잖아.”
“아, 정말!”
일리아와 카일루스가 이름으로 한창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루네르가 드레스를 품에 안고 응접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루네르는 소파 끄트머리에 딱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하, 하, 하던 거 마저 하세요! 전 가 볼게요!”
“아니야, 루네르! 그런 거 아니야!”
“이따 다시 올게요! 죄송해요!”
“아니, 그런 거 아니라고!”
루네르가 응접실을 뛰쳐나가자 카일루스는 고개까지 젖혀 가며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각하!”
“뭐 어때. 나중에 설명하면 되지.”
“몰라요, 진짜! 이상한 소문이라도 나면 다 각하께서 책임지세요!”
씩씩거리며 엄포를 놓은 일리아는 응접실 문을 부여잡고 외쳤다.
“루네르! 당장 돌아와!”
“저, 저는 신경 쓰지 마세요, 일리아 님!”
“그런 거 아니라니까!”
“하하하!”
카일루스는 일리아가 루네르를 잡아 올 때까지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 * *
우여곡절 끝에 드레스를 갈아입은 일리아는 뾰로통한 얼굴로 의상실을 나섰다. 고작 이름 하나 때문에 설렌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루네르가 이상한 오해까지 하는 바람에 해명하느라 진이 다 빠졌기 때문이다.
물론, 해명하는 과정에서 카일루스는 일말의 도움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저런 야릇한 말을 내뱉으며 오해를 더욱 부추겼을 뿐이다.
일리아는 눈을 치켜뜨며 카일루스를 노려봤다.
“진짜 확실히 책임지세요!”
“알겠다니까.”
“하아, 저택에나 돌아가요. 오늘은 이만 쉬어야겠어요.”
“아직 갈 데가 남았잖아.”
방긋 웃은 카일루스는 일리아를 데리고 중앙 광장으로 향했다. 마차에서 내려서자 휘황찬란한 건물이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일리아는 멋들어진 간판을 올려다보며 눈을 부릅떴다.
“여기는……!”
카페, 라세느.
이곳은 귀족조차도 예약을 하지 않으면 절대 방문할 수 없는 아제로스 제국 최고의 디저트 카페였다. 일리아 역시 몇 번이나 예약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바람에 얼마나 아쉬워했는지 모른다.
카일루스는 잔뜩 상기된 일리아를 이끌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예약했어요?”
“아니.”
“그, 그런데 그냥 들어오면 어떡해요! 여기는 예약제라고요.”
“지금 하면 되지.”
일리아는 무책임한 카일루스의 말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라세느는 귀족에게도 얄짤없었다. 아무리 에스테반 공작이라도 이건…….
“어서 오십시오, 각하!”
되네?
봄꽃같이 환한 목소리에 일리아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아무래도 에스테반 가문의 위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 모양이었다. 미리 기별하지 않았음에도 라세느의 주인인 플렌저 부인이 직접 나와 그들을 맞이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사람이 많군.”
“당장 2층을 비우라고 지시하겠습니다!”
“됐어. 그냥 발코니나 비워.”
“알겠습니다!”
플렌저 부인은 두 사람을 2층 발코니석으로 안내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수많은 시선이 두 사람에게 박혀 들었다. 의상실에 이어 카페에서까지 다정한 모습을 보였으니 아마 소문이 나도 단단히 날 것이다.
일리아는 애써 사람들의 시선을 흘려 넘기며 발코니를 둘러봤다. 탁 트인 전경이 꽤나 볼만했다.
“진짜 와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오게 되네요.”
“앞으로는 편하게 이용해.”
“각하 이름 팔아서요?”
“그래. 내 이름 팔아서.”
일리아와 카일루스가 자리에 앉자 잔뜩 긴장한 직원 하나가 번개처럼 다가왔다.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정말요? 다 시켜도 돼요?”
“그래. 뭐가 먹고 싶은데?”
“오페라, 자허토르테, 레드벨벳이요. 아, 치즈케이크도 추가할게요. 그리고 크루아상하고 홍차도 두 잔만 가져다줘요.”
“알겠습니다!”
일리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발코니 밖을 바라봤다. 따사로운 햇살에 물든 수도의 중심지, 아로스는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역시 그대였군. 올린에게 바람을 넣은 게.”
“…저는 힌트만 줬어요. 엄연히 올린이 생각해 낸 거라고요.”
“혼내려는 거 아니니까 긴장 풀어.”
“그럼요?”
“고맙다고.”
“네?”
일리아가 경악에 물들어 있는 사이, 색색의 케이크가 탁자 위를 가득 메웠다. 카일루스가 일리아의 손에 포크를 쥐여 주며 말했다.
“먹기나 해.”
“크흠, 죄송해요. 각하도 드세요.”
카일루스 앞에 크루아상 접시를 놓아 준 일리아는 본격적으로 케이크를 공략했다. 역시나 유명한 카페다웠다. 케이크는 무척이나 달콤했고, 홍차 또한 일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