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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18)화 (18/101)

18화 

소피아와 아만다는 한껏 비웃으며 일리아를 힐끔거렸다. 이렇게 대놓고 무안을 주면 기가 죽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일리아는 ‘그러게요. 저도 놀랍네요.’ 하고 심드렁하게 대꾸할 뿐, 기대했던 반응은 보여 주지 않았다.

그에 자극을 받은 소피아는 곧바로 두 번째 무기를 꺼내 들었다.

“또, 또 있어요! 바람피울 때는 언제고 왜 다시 로베르트 영식을 유혹하시는 거죠? 이제 와서 아까워지기라도 하신 건가요?”

“바람은 둘째 치고 유혹이요? 제가요?”

“제가 똑똑히 봤는걸요. 로베르트 영식과 카페로 들어가는 그라니체 영애의 모습을요!”

“할 말이 있다고 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것뿐이에요.”

“그럼 손은 왜 잡았나요? 미련이 남아서 그런 거 아니에요?”

일리아는 헛웃음을 지었다.

“제가 잡은 게 아니라 에렉이 잡은 거였어요. 자꾸 들러붙어서 귀찮았던 건 저라고요.”

“제가 다 봤는데도 거짓말을 할 셈이에요?”

“그날 저와 에렉을 본 게 랜더 영애뿐이라고 생각하세요? 카페 직원부터 하나씩 조사해 볼까요? 누구 말이 맞는지?”

일리아가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치자 소피아는 이를 악물며 크리스틴의 눈치를 살폈다.

사실 그녀는 이번에 크리스틴에게 잘 보여서 플로라 가문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다. 이전에 랜더 가문이 돈을 빌렸던 상회에서 원금 상환을 재촉하는 바람에 급하게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피아는 크리스틴이 보는 앞에서 일리아의 기를 죽여 점수를 따 두면 대출을 부탁하기가 한결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작부터 엇나간다 싶더니 이제는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 저 얄미운 일리아 그라니체 때문에!

초조해진 소피아는 애꿎은 드레스만 구겼다. 랜더 가문의 운명이 그녀의 어깨 위에 있었다. 절대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입술을 짓이기며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그녀는 결국 가문을 위해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고 말았다.

“천박한 방법으로 각하의 파트너 자리를 차지한 주제에 큰소리는!”

“뭐라고요?”

“다 들었어요. 그라니체 영애가 각하의 파트너가 될 수 있었던 건 각하께 몸을…….”

그때, 가만히 듣고만 있던 크리스틴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런 이야기는 금시초문인데요.”

“저, 저도 어제 들은 이야기예요. 곧 사교계에 이 이야기가 퍼질 거라고 했다고요! 그렇죠?”

소피아는 간절한 눈빛으로 아만다를 바라봤다. 그러나 맞장구를 쳐 줄 줄 알았던 아만다는 그녀의 시선을 피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성 추문은 치정극보다 훨씬 질이 나빴다. 게다가 그 상대가 무려 에스테반 공작이지 않던가. 여기서 동조했다가는 괜히 불똥이 튈 수도 있었다.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소피아는 못내 불안해졌다. 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최대한 얼버무려 마무리를 짓는 수밖에 없었다.

“어제 술집에 갔다가 우연히 들은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저도 술에 취한 상태여서…….”

“소피아 랜더.”

“네, 네?”

크리스틴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소피아를 쳐다봤다.

그녀가 일리아를 껄끄러워하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소피아의 발언은 도를 넘어섰다. 치정극은 흔한 가십거리였지만, 성 추문은 달랐다. 특히나 그 대상이 미혼의 귀족 영애라면 추문이 평생 꼬리표처럼 따라붙을 게 분명했다. 크리스틴은 같은 여자로서 소피아가 홧김에 내뱉은 헛소문 때문에 일리아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에요.”

“하, 하지만……!”

“그만해요. 아까는 소피아가 직접 봤다니까 가만히 있었지만, 이건 아니에요.”

“믿어 주세요, 플로라 영애. 저는 단지…….”

소피아는 울먹거리며 일리아를 노려봤다. 괜히 그녀가 미웠다. 가만히 욕이나 듣고 있었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마음속에 악의가 피어오르자 비뚤어진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저는 단지 그라니체 영애가 얼마나 못되고 천박한 여자인지 플로라 영애께 알려 드리려고…….”

“더는 못 들어 주겠군.”

그때였다. 정원 어귀에서 지독히도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피아에게 차라도 끼얹을까 싶어 찻물의 온도를 가늠하던 일리아는 갑자기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깜짝 놀라 찻잔을 떨어뜨렸다.

다행히 찻잔은 깨지지 않았지만, 루네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드레스에 노란 찻물이 스며들고 말았다. 일리아는 울상을 지으며 젖은 부위를 대충 털어 내곤 고개를 들었다.

역시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카일루스였다.

‘각하께서 왜 여기 계시는 거지?’

카일루스는 사색이 된 플로라 후작을 뒤로한 채 일리아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울었어?”

“네?”

“저런 말을 왜 듣고만 있어? 그대는 성격이 너무 좋아서 탈이라니까.”

“아니, 각하, 그게 아니라…….”

“괜찮아. 가만히 있어.”

카일루스는 일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소피아를 쳐다봤다.

“하던 얘기나 계속해 봐.”

“가, 각하…….”

“누가 못되고 천박하다고?”

“그게…….”

소피아는 기세등등했던 아까와는 달리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당연했다. 그 망측한 발언의 당사자가 이렇게 떡하니 나타났는데 어떻게 혀를 놀리겠는가.

“내 파트너 자리를 천박한 방법으로 차지했다니.”

“가, 각하, 그게…….”

“죽고 싶은 모양이지?”

항상 고요하던 카일루스의 기운이 풍랑을 만난 바다처럼 거칠게 일렁거렸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로 강한 기운이었다.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다. 카일루스가 얼마나 칼같은 사람인지를. 지금 그의 모습은 명실상부한 ‘철혈의 공작’이었다.

“아까는 잘도 떠들더니 왜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됐지?”

“그, 그게……. 흐윽…….”

싸늘해진 분위기에 손을 덜덜 떨던 소피아가 결국 고개를 떨구며 울음을 터뜨렸다. 꽤 처량한 모습이었음에도 카일루스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대의 가문에 죄를 물어야 하나?”

“각하, 제가 설명을…….”

“그대는 빠져 있어.”

크리스틴의 개입을 일축한 카일루스가 다시금 소피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름이 뭐지?”

“흐윽, 제, 제가 잘못…….”

“난 이름을 물었다만.”

“소, 소피아, 히끅, 랜더입니다…….”

소피아는 딸꾹질까지 해 가며 울음을 삼켰다. 끅끅거리면서도 대답하려는 모습이 꽤나 안쓰러웠다.

“랜더 가문의 여식이었나.”

현재 랜더 가문은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인해 파산 위기에 내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그동안 모아 두었던 재산은 모두 빚을 갚는 데 사용하고, 그러고도 빚을 다 갚지 못해 담보로 걸었던 영지마저 넘어가게 생겼다고 들은 기억이 났다. 수도에 있는 저택 또한 내놓았다고 하니 얼마나 암담한 상황일지는 불 보듯 뻔했다.

‘이용할 수 있겠는데.’

바이에드는 기본적으로 의심이 많았다. 아무리 카일루스가 연인이 생겼다고 공표한들 믿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래서 카일루스는 이참에 일리아를 모욕한 랜더 가문을 정리하고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은밀하게 흘리기로 했다. 매사에 이성적인 카일루스가 고작 연인이 모욕당했다는 이유로 감정적으로 나섰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바이에드 또한 의심을 거둘 터였다.

어차피 카일루스가 손대지 않아도 파산할 가문이었다. 저들의 존재가 카일루스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면 그들도 억울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을 정한 카일루스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 모습에 괜히 불안해진 일리아는 안 되겠다 싶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카일루스의 팔을 강하게 붙잡으며 엉뚱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각하, 제가 플로라 저택에 다녀올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고 했잖아요!”

팔을 조이는 악력에 잠시 흠칫한 카일루스는 이내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차 들렀는데 그대 생각이 나서.”

“아이, 참. 그럼 어쩔 수 없네요. 그냥 지금 가요.”

“어디를?”

“디, 디저트 가게요! 전에 아주 맛있는 디저트 가게에 데려가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일리아는 카일루스를 우악스럽게 잡아끌었다.

“일리아, 잠깐만.”

“좋은 자리에 불러 주셔서 감사했어요, 플로라 영애, 그리고 플로라 후작님.”

예법에 맞춰 우아하게 인사를 한 일리아는 카일루스를 이끌고 그대로 정원을 벗어났다. 그러고는 걸음을 재촉해 정문 앞에 세워져 있던 에스테반 가문의 마차에 훌쩍 올라탔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신 거예요?”

“그냥, 없애 버릴까 하고.”

“큰일 날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네! 절대 안 돼요!”

“그건 됐고, 아까는 왜 울상이었던 거야?”

카일루스의 물음에 일리아가 갈색으로 얼룩진 드레스를 보여 주며 말했다.

“각하 때문에 놀라서 드레스에 차를 엎어 버렸거든요.”

“…그건 배상하지.”

“당연히 그러셔야죠. 그러니까 얼른 타요.”

카일루스는 군소리 없이 마차에 올라탔다.

“의상실로 가.”

“루네르의 의상실이요.”

“그래, 거기.”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중앙 광장을 한참 지나 외진 골목 안쪽에 있는 루네르의 의상실 앞에서 멈춰 섰다. 일리아는 사람이 가득 들어차 있는 의상실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사람이 많네.”

“그게 왜?”

“이걸 봐요.”

일리아가 드레스를 가리키며 작게 속삭였다.

“젖은 자리가 너무 묘하잖아요. 하필 연한 보라색 원단이라 색깔도 묘하고요. 이 상태로 의상실에 들어갔다가는 평생 놀림거리가 될걸요?”

거리낌 없는 일리아의 말에 카일루스는 고개를 돌리며 헛기침을 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확실히 위치와 색깔이 묘하기는 했다. 그나마 드레스의 뒷부분이 젖은 것보다는 나았지만, 떠들기 좋아하는 귀족들이 이런 일리아의 모습을 본다면 신나서 말을 옮기고 다닐 게 분명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겠죠. 일단 가요.”

일리아가 마지못해 의상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카일루스가 그녀를 저지하며 말했다.

“일리아, 기다려 봐. 좋은 생각이 있어.”

“좋은 생각이요? 무슨……. 자, 잠깐만요!”

카일루스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일리아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덕분에 드레스가 안쪽으로 말려들어 가며 찻물이 스민 자리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상당히 부끄러웠다.

“각하!”

“내 책임이잖아.”

“그래도요!”

“쉿.”

카일루스는 일리아를 더욱 단단히 안아 들며 의상실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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