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하루가 뭐야. 이틀은 빼먹어 줄 테다!’
일리아는 들고 있던 천을 탁자에 툭 내려놨다.
“그런 의미에서 드레스 좀 맞추러 다녀와도 될까요?”
“지금?”
“네. 지금 당장요. 생각해 보니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서요.”
“다녀와. 대신 빨리 와야 할 거야.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물론이죠. 바람처럼 다녀올게요!”
카일루스의 허락을 받은 일리아는 세실라와 함께 루네르의 의상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신선한 공기를 마시니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야?”
일리아는 가만히 눈을 깜박거렸다. 평소에는 한적하던 의상실이 지금은 드레스를 맞추러 온 귀족 영애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일리아 님!”
그때, 디자인 북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루네르가 화색을 띠며 일리아에게 다가왔다.
“오늘은 사람이 많네?”
“다 일리아 님 덕분이에요. 승전 기념 파티 때 입으셨던 드레스가 완전 대박이 났거든요!”
그럴 만했다. 루네르의 드레스는 저명한 디자이너의 드레스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단지 외진 곳에 있어 단골 영애라고는 일리아 하나뿐이었는데 그런 일리아가 워낙 사교 모임을 즐기지 않아 빛을 보지 못했을 뿐. 그런데 이번에는 일리아가 무려 카일루스의 파트너로서 파티에 참석하지 않았던가. 일리아가 입은 드레스와 착용한 장신구, 심지어는 화장법까지도 화두에 올랐을 것이다.
의상실이 바빠진 건 축하할 일이었지만, 일리아는 왠지 혼자만 알던 맛집을 빼앗긴 것 같아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기다리고 있을게. 다녀와.”
“죄송해요.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금방 안내해 드릴게요!”
루네르가 후다닥 자리를 뜨고, 일리아는 대기용 소파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일리아가 무료함에 카탈로그만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한쪽에서 한 무리의 영애들이 은밀하게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사실이에요?”
“그렇다니까요. 제가 분명히 들었어요.”
“로베르트 영식이 너무 불쌍하네요…….”
로베르트 영식?
일리아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녀들은 계속해서 ‘로베르트 영식’과 ‘그 영애’라는 말을 반복하며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있었다.
‘뭐지, 이 찝찝함은?’
괜히 기분이 이상해진 일리아는 고개를 살짝 돌렸고, 열심히 속닥이던 영애들과 눈이 마주쳤다. 일리아가 의례적으로 눈인사를 건네자 그녀들은 화들짝 놀라며 급하게 자리를 떴다.
“왜 저러는…….”
“일리아 님, 죄송해요. 많이 기다리셨죠?”
“괜찮아. 별로 안 기다렸어.”
“이쪽으로 오세요. 빠르게 보여 드릴게요.”
일리아를 응접실로 안내한 루네르는 한층 더 두꺼워진 디자인 북을 그녀에게 건넸다.
“천천히 살펴보세요.”
루네르의 드레스는 언제나처럼 참신하고 아름다웠다. 디자인 북을 팔락거리며 열심히 디자인을 확인한 일리아는 총 다섯 벌의 드레스를 지목했다. 그러나 세실라가 도끼눈을 뜨고 제지하는 바람에 단 두 벌밖에 계약하지 못했다. 일리아는 침울한 얼굴로 디자인 북을 덮었다.
“드레스는 에스테반 저택으로 보내 줘.”
“에, 에스테반 저택이요?”
“사정이 있어서.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일리아와 세실라의 다음 목적지는 카페였다. 이 카페 역시 일리아가 자주 들르는 곳으로, 그윽한 다향과 멋들어진 분위기가 굉장히 인상적인 곳이었다. 일리아는 따사로운 햇살을 바라보며 당분간 즐기지 못할 여유를 만끽했다.
“어쩐지 성급하게 약혼 발표부터 한다 했어요.”
“조용히 추진했다가는 또 그런 일이 생길까 봐 겁이 나신 거겠죠.”
“얼마나 속이 쓰리실까. 약혼녀가 전쟁 중에 바람이 나다니…….”
“로베르트 영식만 불쌍하게 됐죠.”
또다. 또다시 에렉의 이름이 들려왔다. 일리아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차를 마시며 은밀하게 대화를 주고받던 영애들은 의상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리아의 얼굴을 보자마자 후다닥 자리를 떴다.
“아무래도 이상해.”
“알아볼까요?”
“응. 부탁할게.”
찝찝한 기분을 안고 혼자서 에스테반 저택으로 돌아온 일리아는 침대에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겼다.
드문드문 들었던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영애들의 이야기 속 주인공은 에렉 로베르트가 분명했다. 그런데 불쌍하다는 건 뭐고, 바람을 피웠다는 건 또 뭘까.
‘전쟁 중…이라고 했지.’
순간,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가슴이 서늘해진 일리아는 ‘아닐 거야. 아니겠지.’ 하고 중얼거리며 애써 고개를 내저었다.
“아가씨.”
그때, 세실라가 열린 창문으로 훌쩍 뛰어 들어왔다.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던 일리아는 몸을 퍼드덕 떨며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세실라! 내가 창문으로 다니지 말라고 했지!”
“알아 왔어요.”
“벌써?”
“네. 소문이 꽤 퍼진 모양이에요. 다들 그 얘기만 하던걸요.”
“얼른 말해 봐.”
“그러니까…….”
세실라의 말을 모두 들은 일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경악했다.
“뭐, 뭐라고?!”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떻게 하긴! 소문낸 놈을 찾아서 조져야지!”
* * *
한편, 같은 시각 카일루스의 집무실. 그 역시 일리아가 접한 소문을 막 보고받은 참이었다. 카일루스는 헛웃음을 치며 엘리엇을 삐뚜름하게 올려다봤다.
“그런 소문이 돌고 있다고?”
“네, 각하.”
보고에 따르면 현재 사교계에는 일리아가 에렉과 약혼했음에도 다른 귀족과 바람을 피워 파혼당했다는 내용의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한다. 일리아가 누구와 바람을 피웠는지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묘사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유추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일리아는 인간관계가 바늘구멍만큼이나 좁은 사람이었다. 그녀가 최근에 가까이 지낸 사람을 조사해 보면 답은 간단히 나왔다.
‘나잖아.’
일리아와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장에 함께 있었으면서 최근까지도 교류를 하고 있는 사람. 그건 카일루스가 유일했다.
“소문의 출처는?”
“찾았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카일루스는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아무리 카일루스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아마 모든 귀족이 그와 일리아를 엮으며 수군거릴 터였다. 그건 곧 가문의 명예와도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였다. 한 가문의 수장인 카일루스로서는 그에 알맞은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카일루스는 달리 생각하기로 했다. 두 가문에 책임을 묻는 것보다 더 좋은 수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번에 퍼진 소문을 이용하면 계속해서 그를 괴롭히던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할 수 있을 듯했다.
“정정해야겠지.”
“알겠습니다. 로베르트 가문과 그라니체 가문에도 배상 요구를…….”
“아니. 배상 요구는 로베르트 가문한테만 해. 그리고 바람을 피운 게 아니라 헤어진 이후에 만난 거라고 정정하고.”
“네?”
일리아에게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바람을 피웠다는 낙인보다는 에스테반 공작의 연인이라는 타이틀이 훨씬 나을 테니까. 일리아 역시 지금쯤이면 소문을 접했을 테니 잘만 설득하면 손쉽게 협조를 얻어 낼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카일루스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집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바로 일리아였다. 일리아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각하,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잠시만.”
엘리엇에게 ‘일단 그렇게 처리해.’ 하고 말을 마친 카일루스는 그를 내보내고 일리아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아.”
일리아는 소파에 앉으며 카일루스의 눈치를 살폈다. 막상 소문에 대해 이야기하려니 덜컥 두려움이 앞섰다. 이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들으면 카일루스가 또 어떤 불호령을 내릴까.
그렇다고 해서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머지않아 그도 알게 될 터였다. 차라리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편이 더 나았다.
“제가 방금 이상한 소문을 들었는데…….”
“알아. 보고받았어.”
카일루스는 느긋하게 웃었다.
“그대는 조용할 날이 없는 것 같군.”
“그렇게 웃고 계실 때가 아니에요. 각하께서도 연루되신 것 같다고요!”
일리아 역시 카일루스와 마찬가지로 소문 속의 귀족이 누군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녀와 인연이 있는 귀족은 카일루스가 거의 유일했으니까.
고작 편지 한 장으로 이별을 통보받은 일리아로서는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놈의 편지를 잘 보존해서 수도까지 가져왔어야 했는데!
“그대는 이 소문의 출처가 누구라고 생각해?”
“한 사람밖에 없잖아요.”
당연히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에렉 로베르트지!
사교계의 소문이라는 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기 마련이라 으레 내용이 변질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번에 퍼진 소문은 벌써 며칠이 지났음에도 명확하게 한 내용만을 담고 있었다. ‘일리아가 에렉과 약혼했음에도 누군가와 바람을 피웠다.’라고.
그게 이 소문의 맹점이었다. 일리아가 에렉과 공개적으로 연애를 했던 건 사실이지만 약혼에 관해서는 따로 발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일리아의 약혼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악의적으로 소문을 만들어 낼 만한 사람은 그녀의 전 약혼자인 에렉 로베르트뿐이었다.
일리아는 으득 하고 이를 갈았다.
“다시는 나대지 못하게 기를 확 죽여 놨어야 했는데…….”
“그러게.”
카일루스의 성의 없는 대답에 일리아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무려 치정극이다. 이건 귀족으로서의 명예가 달린 아주 중대한 사안이었다. 그런데 카일루스는 이상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각하.”
“왜?”
“왜 이렇게 느긋하세요? 각하마저 귀족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요.”
일리아의 볼멘소리에 카일루스는 짙게 웃었다.
“일리아.”
“네?”
“전에 그대가 그랬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그랬죠?”
“지금이 딱 그때야. 그대의 도움이 필요해.”
카일루스는 일리아에게 다시금 황녀와의 결혼에 대해 언급했다. 방금 전에도 황녀와의 만남을 주선하는 편지가 와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참이라고.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말을 경청하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건 제가 도와드릴 수 없는 문제인데요?”
“아니. 충분히 도울 수 있어.”
“어떻게요?”
“정식으로 교제하는 척을 하는 건 어때?”
일리아는 너무 놀란 나머지 사레가 들렸다. 한참이나 기침을 해 댄 그녀가 멍하니 반문했다.
“뭐, 뭐라고요?”
“연인이 생기면 폐하께서도 포기하실 것 같아서.”
“…그래서 느긋하셨던 거군요. 소문을 이용할 생각으로요.”
“그래. 바람보다는 이쪽이 훨씬 낫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