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이게 뭐야?”
일리아는 조심스럽게 상자 뚜껑을 열었다. 검은 벨벳 쿠션 위로 피처럼 붉은 보석 펜던트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백금으로 만든 줄과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펜던트였다.
“이건…….”
“시험 삼아 만든 아티팩트야.”
“아티팩트라고?”
“간단한 방어 마법이 걸려 있어. 요새 이런저런 일로 시끄럽잖아. 그러니까 꼭 하고 다녀.”
군부 소속인 일리아는 아제로스 제국에 일이 생기면 어쩔 수 없이 전면에 나서서 전투를 치러야 했다. 그러다 보면 예기치 못하게 공격을 받는 상황 역시 오고 말 것이다. 클리드는 그때를 우려한 듯했다.
클리드의 배려에 마음이 뭉클해진 일리아는 그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고마워, 오라버니.”
“조심히 다녀와. 혹시라도 그놈이 집적거리면 바로 말하고.”
“알겠어. 그럼 다녀올게!”
저택을 나와 마차에 탄 일리아는 클리드가 준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목에 걸었다. 피처럼 붉은 보석에서 미미한 열기가 느껴졌다.
‘왠지 불 같은 게 오라버니 성격하고 비슷하네.’
일리아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마차 벽을 가볍게 두드렸다. 곧, 마차가 서서히 속력을 높였다.
* * *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차에서 내려서자 잿빛 머리카락의 남자가 일리아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각하의 보좌관인 엘리엇 반센입니다. 응접실까지 안내하겠습니다.”
“부탁할게요.”
에나와 세실라를 하인에게 맡긴 엘리엇은 일리아를 응접실까지 안내했다. 그를 따라 넓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서자 서류를 훑어보고 있는 카일루스의 모습이 보였다.
“잠깐 앉아 있어. 이것만 좀 확인할게.”
“천천히 보세요.”
소파에 앉은 일리아는 얌전히 카일루스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할 무렵, 한 하녀가 다과를 들고 들어왔다. 설탕이 솔솔 뿌려진 버터쿠키와 진한 홍차였다.
“저 이거 먹어도 돼요?”
“먹어.”
일리아는 쿠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담백하면서도 달달한 버터쿠키는 웬만한 가게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맛있었다.
“와, 맛있어요!”
“올린이 들으면 좋아하겠군.”
“각하도 드셔 보세요.”
“난 나중에.”
눈을 문지르며 서류를 내려놓은 카일루스가 주머니에서 열쇠 뭉치를 꺼냈다.
“이거 받아. 저택 열쇠야.”
“이런 거 막 주셔도 돼요?”
“구석구석 청소하려면 가지고 있어야지.”
일리아는 가만히 열쇠를 받아 들었다. 묵직한 열쇠 뭉치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유독 낡고 빛이 바랜 열쇠에 시선이 갔다. 그라니체 저택에도 이런 열쇠가 두어 개 있었다. 지하 금고와 비밀 창고 열쇠였다. 에스테반 저택은 그라니체 저택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으니 사용하는 열쇠 또한 비슷할 터였다.
‘에스테반 가문의 지하 금고에는 뭐가 있을까?’
일리아가 열쇠를 바라보며 눈을 빛내자 괜히 불안해진 카일루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허튼 생각 하지 마.”
“아, 안 했어요.”
일리아는 눈을 흘겼다. 하여간 눈치는 빨라 가지고.
“그대가 쓸 방은 엘리엇이 안내해 줄 거야.”
“제 하녀랑 호위는요?”
“별채에 따로 방을 준비해 놨으니까 걱정하지 마.”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감사는 내가 해야지. 그대가 청소까지 해 주는데.”
카일루스의 얄미운 미소에 일리아는 무심코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러자 손에 쥐고 있던 쿠키가 바사삭 소리를 내며 산산이 부서졌다.
“그것도 다 그대가 청소해야 하는 거 알지?”
“알아요!”
일리아는 울고 싶어졌다.
* * *
“진짜 하시려고요?”
“해야지. 그라니체의 마법사가 한 입으로 두말할 수는 없으니까.”
활동하기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일리아는 비장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먼지를 닦을 천과 빗자루를 손에 들고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바로 카일루스의 집무실이었다. 카일루스는 당당하게 쳐들어온 일리아를 바라보며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굳이 여기부터 청소하는 이유가 뭐야?”
“원래 제일 많이 쓰는 곳이 제일 더러운 법이거든요.”
“그건 무슨 논리야?”
“그라니체 가문의 논리예요. 아무튼 청소 시작할게요.”
카일루스가 저를 놀린 것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다.
카일루스에게서 고개를 휙 돌린 일리아는 하얀 천을 들고 장식장을 닦았다. 뽀득뽀득, 뽀득뽀득. 고요한 집무실에 유리 닦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깃펜을 분주하게 움직이던 카일루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멈췄다. 평소 조용한 환경에서 업무를 보는 것을 선호하는 그였다. 눈앞에서 일리아가 왔다 갔다 하는 것만으로도 신경 쓰여 죽겠는데 유리 닦는 소리까지 더해지니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일리아, 여긴 됐으니까 다른 곳 먼저…….”
그때였다. 멀쩡하던 장식장 유리가 갑자기 쨍그랑! 하고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카일루스는 결국 깃펜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닦으라고 했더니 부수면 어떡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바닥에 쪼그려 앉아 산산이 부서진 유리 조각을 바라보던 일리아가 항변했다.
“뭐가 묻은 것 같아서 닦으려고 했는데 힘을 너무 줬나 봐요. 얼른 치울게요.”
일리아가 유리 조각을 손으로 집으려고 하자 카일루스는 얼른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깜짝 놀란 일리아가 카일루스를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각하?”
“다쳐.”
“괜찮아요. 금방 치울게요.”
“괜찮기는 뭐가. 사람 부를 테니까 그냥 가만히…….”
카일루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일리아는 주먹으로 유리 조각을 내리쳤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 조각이 고운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튀었다.
“보셨죠? 괜찮다니까요.”
“…그렇겠네.”
“자, 일 보세요. 이건 제가 치울게요.”
카일루스를 책상 앞으로 떠민 일리아는 빗자루를 들고 이리저리 흩어진 유리 가루를 쓸어 냈다. 빗자루질 몇 번에 바닥이 금세 깨끗해졌다.
‘좋아. 이번에는…….’
일리아는 빗자루를 내려놓고 책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뜻 보아도 책이 굉장히 많았다. 하나하나 꺼내어 닦기에는 무리가 있을 듯했다.
‘어떻게 닦으면……. 아!’
잠시 고민하던 일리아는 조용히 마력을 끌어올렸다. 바람을 미세하게 움직여 책에 붙은 먼지를 한 번에 털어 내려는 속셈이었다. 마력을 세밀하게 다루는 것은 그녀의 주특기였기에 이 정도쯤은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 법이었다. 일리아가 바람을 일으키려던 순간, 갑자기 재채기가 터져 나오는 바람에 손끝에 모여 있던 마력이 폭발하듯 퍼져 나갔다. 그 때문에 책장이 강하게 흔들리면서 가지런하게 꽂혀 있던 책들이 바닥으로 와르르 떨어졌다.
일리아를 불안해하는 얼굴로 지켜보던 카일루스는 ‘그럼 그렇지.’ 하고 중얼거리며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청소를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이번에는 정말 실수였어요! 갑자기 재채기가…….”
“사고 그만 치고 그냥 나가 있어.”
“죄송합니다…….”
쭈뼛거리며 집무실에서 나온 일리아는 옷에 묻은 먼지를 대충 털어 냈다. 아무래도 집에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너무 성급했던 모양이었다. 일단은 푹 쉬고 에나에게 청소하는 법부터 배우는 게 나을 듯했다.
‘이 냄새는…….’
일리아가 방으로 가기 위해 넓은 복도를 걷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단내가 풍겨 왔다. 응접실에서 먹었던 쿠키와 비슷한 냄새였다. 격한 청소로 속이 허해진 일리아는 즉시 걸음을 돌렸다.
냄새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바로 주방이었다. 살짝 열린 문 사이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파티시에들이 보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비장한 얼굴로 쿠키와 케이크를 굽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왠지 출정을 앞둔 기사들 같아 절로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맛있겠다…….’
일리아는 단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 순간, 커다란 위생 모자를 쓴 파티시에가 문 쪽을 바라보며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누가 문을 열어 놓은 거야!”
우렁찬 외침에 깜짝 놀란 일리아는 무심코 문을 세게 밀쳤다. 곧, 커다란 소리와 함께 주방 문이 활짝 열렸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문어귀에 멈춰 선 일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안녕하세요?”
소리를 내질렀던 파티시에가 얼굴을 와락 구기며 언성을 높였다. 허락도 없이 주방에 쳐들어온 간 큰 하녀를 야단치기 위해서였다.
“지금 일생일대의 중대한 작업 중인데 어딜 허락도 없이……!”
그러나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뒤늦게 일리아의 모습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제국 내에서는 보기 힘든 은빛 머리카락과 영롱한 자색 눈동자, 그리고 기품이 느껴지다 못해 흘러넘치는 외모까지. 그의 눈앞에 엉거주춤 서 있는 하녀, 아니, 아가씨는 엘리엇이 잘 모셔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던 바로 그 귀족 영애였다.
그는 미리 언질을 받았음에도 빠르게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며 다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모, 몰라봬서 죄송합니다, 아가씨!”
“아니에요. 멋대로 들어온 제 잘못이죠.”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말씀 낮춰 주십시오!”
“…알겠으니까 소리 좀 그만 지르면 안 될까?”
일리아가 귀를 문지르자 그는 사색이 되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죄, 죄송합니다. 저는 에스테반 저택에서 디저트를 총괄하고 있는 올린이라고 합니다.”
“아, 오전에 먹은 버터쿠키를 만든 게 너구나, 올린. 정말 맛있었어.”
웬일로 쿠키 접시가 비어 있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귀족 아가씨의 입맛에 맞았던 모양이었다. 뜻밖의 칭찬에 올린은 화색을 띠었다.
“감사합니다, 아가씨!”
“당분간 잘 부탁할게.”
“맡겨만 주십시오! 그런데 주방까지는 무슨 일이십니까?”
“좋은 냄새가 나길래 나도 모르게 그만…….”
헛기침을 하며 바르게 선 일리아는 주방을 천천히 둘러봤다. 하얀 설탕으로 덮인 사과쿠키, 초콜릿 장식을 얹은 티라미수, 그리고 폭신한 딸기수플레까지. 색색의 디저트가 조리대 위에 늘어서 있었다.
버터쿠키도 그렇게 맛있었는데 이것들은 또 얼마나 맛있을까.
일리아의 열렬한 눈빛에 식겁한 올린은 등 뒤로 다급하게 사인을 보냈다. 저 눈빛을 귀족적으로 해석하면 ‘당장 대령해라!’와 같았다. 지체하면 불호령이 떨어지리라.
올린의 다급한 사인을 알아차린 파티시에들이 후다닥 움직여 예쁜 접시에 쿠키와 케이크를 담아 왔다. 일리아는 순식간에 펼쳐진 디저트의 향연에 눈을 빛냈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되는데.”
“제가 드리고 싶어서 그럽니다. 한번 드셔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