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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13)화 (13/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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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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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코니 소파에 기대어 앉은 일리아는 발을 까딱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동안 에나가 청소하는 모습을 줄곧 봐 왔지만, 이상하게도 청소하는 방법만큼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충 쓸고 닦기만 하면 되나?’

일리아는 드레스 자락으로 소파를 슥슥 닦았다. 당연히 먼지는 묻어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구두로 바닥을 슥슥 문질렀다. 역시나 고풍스러운 대리석 바닥은 구두에 티끌 하나 묻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일리아는 새삼 황성의 청소 비결이 궁금해졌다.

그렇게 일리아가 소파에서 일어나 발코니 이곳저곳을 문지르며 호기심을 채우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한 남자가 발코니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바로 에렉 로베르트였다. 카일루스인 줄 알고 태연하게 고개를 돌리던 일리아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할 말이 있어서.”

“난 들을 말 없어.”

일리아의 차가운 대꾸에 잠시 주춤한 에렉은 이내 불쌍한 척 눈썹을 늘어뜨렸다.

“일리아…….”

“당장 나가. 사람 부르기 전에.”

“네가 너무 걱정돼.”

에렉이 난간에 기대어 서 있는 일리아를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네가 상처받을까 봐 너무 걱정된다고.”

“내가 왜? 아니, 네가 왜?”

“각하께서 네게 보이시는 관심이 진심이라고 생각해?”

일리아는 가만히 눈만 깜박거렸다. 말의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무슨 헛소리야?”

“나는 알 수 있어. 같은 남자니까. 각하께서는 널 좋아하시는 게 아니야, 일리아. 그저 보기 좋은 장신구라고 생각하시는 것뿐이라고.”

일리아는 주먹을 꾹 그러쥐었다. 카일루스는 그녀의 터무니없는 부탁을 흔쾌히 들어준 의인이었다. 그가 이런 모욕을 당할 이유는 없었다.

“각하를 모욕하지 마.”

“고위 귀족들은 다 그래. 너도 결국 비참하게 버려질 거야. 그러니까…….”

“그만해, 에렉 로베르트. 그리고 설령 각하께서 정말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신다고 한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상관있어!”

에렉이 일리아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동안은 혼란스러웠지만, 이제 알게 됐어. 나는 여전히 널 사랑해, 일리아.”

“뭐라고?”

“그러니까 상관있어. 네가 상처받으면 내 마음도 아플 테니까.”

사귈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진중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에렉은 자신이 일리아의 명예를 함께 누리지 못하는 게 어지간히도 아까운 모양이었다.

일리아는 손을 거칠게 털었다. 이런 헛소리를 더 들었다가는 귀가 썩을 것만 같았다.

일리아가 축객령을 내리려고 하자 에렉이 일리아의 입을 막듯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크리스틴과의 약혼은 사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거였어.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에렉은 다시금 일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촉촉하게 젖은 눈이 제법 간절해 보였다.

“일리아, 우리 다시 시작하면 안 될까? 앞으로는 내가 더 잘할게.”

“양다리를 걸치겠다는 거야, 지금?”

“플로라 영애는 내가 작위를 물려받게 되면 정리할 거야. 정말이야!”

“플로라 영애가 들으면 참 좋아하겠네.”

“당연히 비밀로 해야지. 당분간은 수도 외곽에 있는 내 별장에서 만나자. 그리고 내가 작위를 물려받게 되면…….”

일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더 듣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쓰레기 같은 놈.”

“뭐, 뭐라고?”

에렉을 밀쳐 낸 일리아는 그의 발등을 꾹 지르밟았다. 뾰족한 구두 아래에서 빠득하고 뼈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당신이 이런 머저리인 줄 알았다면 애초에 좋아하지도 않았을 텐데.”

“으윽, 일리아!”

에렉은 팔을 뻗어 일리아를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일리아가 한발 먼저 물러서는 바람에 몸의 중심을 잃고 볼썽사납게 넘어지고 말았다.

머리 위에서 작게 비웃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에렉은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언성을 높였다.

“네가 감히!”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에렉 로베르트.”

일리아는 소파에 앉으며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네가 감히 나를 가지고 놀 생각을 해?”

“그게 아니라고 했잖아!”

“그때의 멍청했던 내가 아니야. 그러니까 구질구질하게 굴지 말고 내 앞에서 꺼져.”

자색의 눈동자가 화르륵 타오르는 것과 동시에 일리아의 전신에서 무시무시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그에 에렉은 몸을 흠칫 떨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일리아는 드래곤의 후손이자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천재 마법사였다. 검 하나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에렉은 애초에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결국 겁을 먹은 에렉은 발을 절며 도망쳤다. 물론, 엄포를 놓는 것만큼은 잊지 않았다.

“두고 봐!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울면서 매달려도 용서해 주지 않을 거라고!”

“흥, 누가 할 소리!”

일리아는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욕지거리를 읊조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카일루스가 발코니 안으로 들어왔다.

졸지에 욕을 먹은 카일루스는 멍한 얼굴로 눈만 깜박거리다 이내 큭큭거리며 웃음을 삼켰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일리아는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황급히 손을 숨겼다.

“죄, 죄송해요. 방금 전까지 여기에 에렉이 있었어서…….”

“나가는 거 봤어. 잘 해결한 거야?”

“대충은요.”

“그럼 이걸 마실 자격은 충분하군.”

카일루스가 일리아에게 와인 잔을 내밀었다. 아까 마시려다 빼앗긴 바로 그 와인이었다.

“마셔도 돼요?”

“곧 파티도 끝나니까. 대신 한 잔만이야.”

“네!”

일리아는 선홍빛 와인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탐스러운 향만큼이나 맛도 좋았다.

“하아, 이제야 살 것 같네.”

“에렉 로베르트가 뭐라고 했길래 그래?”

“다시 시작하자고요.”

“약혼도 했으면서?”

“네. 플로라 영애는 작위를 물려받게 되면 정리한다나 어쩐다나. 웃기지도 않지.”

일리아는 와인 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이를 갈았다.

“다음에 또 눈에 띄면 아주 곤죽을 만들어 줄 거예요.”

“진정해. 로베르트는 황제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는 가문이라고.”

“곤죽으로 만든 다음 깨끗하게 치료해서 보내 줄 거예요. 그럼 됐죠?”

카일루스는 픽 웃으며 난간에 기대어 섰다. 따스한 봄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쳐 지나갔다.

“혹시 불꽃놀이 좋아하나?”

“그럼요. 없어서 못 보죠.”

“잘됐네. 곧 시작할 거야.”

일리아는 고개를 돌려 어둑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머지않아 피융! 하는 소리와 함께 색색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와!”

일리아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난간 앞에 섰다. 마치 불꽃이 손에 닿을 듯, 확연하게 가까워졌다.

“떨어져. 조심해.”

“저 마법사거든요?”

“마법사는 난간에서 안 떨어지는 줄 알아?”

“떨어져도 안 다칠 자신 있다는 이야기예요.”

일리아는 카일루스에게 핀잔을 주면서도 불꽃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얀 얼굴이 색색으로 물드는 모습이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카일루스는 그런 일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 청소부가 되었습니다 】

저택으로 돌아온 일리아는 가족들에게 내기에서 졌다는 비보를 전했다. 이미 파티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본 레이븐과 엘레나는 비교적 담담했지만 클리드는 당장이라도 에스테반 저택을 뒤엎을 것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이상할 정도로 화를 내는 모습에 일리아는 결국 다음에 파티가 열리면 함께 춤을 춰 주겠다는 조건으로 겨우 그를 진정시켰다. 아마 그게 목적이었던 듯, 클리드는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이런 웃기지도 않는 내기 때문에 또다시 춤을 춰야 한다니. 일리아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하아, 다 귀찮아.”

파티에 다녀온 이후로 일리아는 줄곧 저택에 틀어박혀 빈둥거리기만 했다. 5일간의 파티 중에서 카일루스와 약속한 날은 단 하루뿐이었고, 클리드마저 바쁜 마당에 굳이 혼자서 파티에 참석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곧 있으면 청소부로서 에스테반 저택에 가야 하지 않던가. 그래서인지 아무런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침대에 누워 한참을 버둥거리던 일리아는 꼬르륵하는 소리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침 식사도 거르고 게으름을 피웠더니 슬슬 배가 고팠다.

똑똑.

식당에 가기 위해 주섬주섬 숄을 챙기는데, 누군가가 일리아의 방 문을 두드렸다.

“아가씨, 에나예요.”

“들어와.”

방으로 들어온 에나는 초대장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트레이를 일리아에게 내밀었다.

“이게 다 뭐야?”

“오늘 도착한 초대장들이에요.”

일리아는 질색하는 얼굴로 트레이를 밀었다.

“다 거절해.”

“어디서 온 건지 확인도 안 해 보시고요?”

“어차피 쓸데없는 초대가 태반일 텐데, 뭐. 귀찮고 배고파.”

“백작 부인께 이를 거예요.”

“…치사해.”

일리아는 성가셔 죽겠다는 얼굴로 초대장을 집어 들었다.

레이븐과 클리드는 일리아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든 항상 지지하고 응원하는 편이었지만, 엘레나는 달랐다. 뼛속까지 귀부인인 엘레나는 일리아가 귀족 영애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만약 초대장을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고 거절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불호령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종일 설교를 들을지도 몰랐다.

일리아는 봉투를 빠르게 넘기며 발신인을 확인했다.

반크, 루벤티아, 헤이스팅스, 그리고.

“플로라?”

그러고 보니 크리스틴이 따로 자리를 만들겠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고작 말다툼 조금 한 것 가지고 정말로 초대를 할 줄이야. 초대장을 대충 훑은 일리아는 그것을 에나에게 건네며 말했다.

“다른 건 다 거절하고 이것만 간다고 보내.”

“알겠습니다.”

“그리고 당분간 에스테반 저택에서 머물러야 하니까 준비하고.”

“저도 가요?”

“당연하지. 세실라한테도 전해 줘.”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그동안 편하게 먹고 자며 마음의 준비를 끝낸 일리아는 비장한 얼굴로 방을 나섰다.

드레스는 일부러 단정한 것으로 골랐다. 어차피 저택에 도착하면 종일 청소만 할 텐데 굳이 치장에 힘을 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벌써 가는 거야?”

일리아가 로비로 나오자 마침 저택 안으로 들어오던 클리드가 넌지시 물었다.

“응. 얼른 가야 얼른 돌아오지.”

“그딴 계약은 파기해 버리면 그만인데…….”

“그럴 수 없다는 거 오라버니도 잘 알잖아. 기왕 하기로 한 거, 제대로 끝내고 올게.”

“하루에 한 번씩 편지 보내. 그래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아, 그리고.”

클리드는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어 일리아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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