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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12)화 (12/101)

12화 

한편,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일리아는 살며시 눈가를 찌푸렸다. 카일루스의 얼굴에 장난기가 그득하기에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도발을 할 줄은 몰랐다.

에렉은 예전부터 욕심이 많았다. 자신이 흥미를 잃고 팔아 버린 물건의 가치가 올라가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다시 사들일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필요 없어져서 버린 장난감을 무려 에스테반 공작이 탐내고 있으니 당연히 눈이 돌 수밖에.

가치 있는 장난감 취급이 서럽기 그지없었으나 일리아는 겸허히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 남자를 먼저 사랑한 건 일리아 자신이었으니까.

“시간이 되면 그대의 약혼자도 같이…….”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각하.”

일리아가 슬슬 말려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타이밍 좋게 방해꾼이 나타났다. 근위대를 상징하는 하얀 제복을 입은 그는 난처해하는 얼굴로 카일루스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전하께서?”

“네. 지금 바로 오라시는 전언입니다.”

“곧 가지.”

카일루스는 기사를 먼저 보내곤 일리아에게 말했다.

“잠깐 전하께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금방 올게.”

카일루스가 자리를 비우자 에렉은 이때다 싶어 일리아를 발코니로 데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 전에 선수를 친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크리스틴의 친구라는 점을 앞세워 사교계를 주름잡고 있는 소피아 랜더와 그 일당들이었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아만다 베일리가 일리아를 구석으로 몰아가며 말했다.

“어떻게 각하의 파트너가 되신 거죠? 혹시 그 잘난 마법으로 유혹이라도 하신 건가요?”

“지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아니면 제발 파트너가 되어 달라고 사정사정하며 비셨다든가?”

아만다의 비아냥거림에 옆에 서 있던 소피아가 과장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말이에요. 그러지 않았고서야 각하께서 영애를 거들떠나 보셨겠어요?”

“그러니까요. 각하께서 눈이 얼마나 높으신데…….”

아만다와 소피아가 다른 영애들을 부추기며 일리아를 한껏 비웃었다. 그러나 그녀들이 내뱉는 원색적인 비난은 일리아에게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했다. 그저 드디어 시작되었구나 싶을 뿐.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리아는 사교계의 다크호스로 급부상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에스테반 공작의 파트너라는 자리는 잦은 파견으로 대부분의 사교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던 일리아마저 단숨에 사교계의 꽃으로 만들 수 있을 만큼 가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피아와 일당들은 일리아가 본격적으로 사교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에 미리 그녀의 기를 죽여 놓으려는 것이었다.

바야흐로 새로운 전쟁의 서막이었다. 마음의 준비를 마친 일리아는 더욱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사정사정하며 빌었냐고 하셨죠?”

“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요. 어떻게 그라니체 영애가 각하와…….”

“그건 제가 아니라 베일리 영애의 이야기 아닌가요?”

“뭐, 뭐라고요?”

이럴 때를 위해서 모아 놓은 무기가 몇 개인데.

원래부터 몸싸움이든 말싸움이든 지는 건 딱 질색인 일리아였다. 특히나 아직 인생의 쓴맛도 못 본 철부지 영애들에게는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았다.

“소문이 파다하던데요. 바람피우다 걸려서 더스틴 영식께 차이셨다고요.”

“그라니체 영애!”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사정사정하면서 비셨다면서요?”

일리아는 분에 못 이겨 부들부들 떠는 아만다에게 쐐기를 박았다.

“갑자기 더스틴 영식에 관해 안 좋은 소문이 도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잘 안됐나 봐요. 딱해라.”

“저, 저, 저……!”

“어머, 혹시 화나신 건 아니죠? 그저 소문이 그렇다는 것뿐이었어요.”

말문이 막힌 아만다는 입술을 달싹거리면서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좋아. 한 명 처리했고.

일리아는 느긋하게 웃으며 다음 상대를 바라봤다. 다음으로 전면에 나선 이는 아만다와 함께 다른 영애들을 부추겼던 소피아 랜더였다.

“이런 자리에서 개인의 사생활을 언급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않나요?”

“그럼 여럿이 합심해서 저같이 연약한 영애를 핍박하는 건 예의가 맞고요?”

“피, 핍박이라니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요!”

“그러니까 귀찮게 굴지 말고 빠져요. 오해받기 싫으시잖아요?”

“그라니체 영애!”

소피아가 언성을 높이자 유력 귀족들과 사업 이야기를 나누던 크리스틴이 힐끔 고개를 돌렸다.

“잠시만요.”

크리스틴은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곤 소피아를 향해 다가왔다.

“무슨 일이죠?”

“플로라 영애! 여기 계신 그라니체 영애께서 저희를 핍박했어요!”

“제, 제 사생활까지 언급하시면서 창피를 줬다고요!”

크리스틴은 언제나처럼 언짢아하는 얼굴로 일리아를 바라봤다.

“정말인가요?”

“글쎄요.”

“…지금은 보는 눈이 많으니 다음에 따로 자리를 만들도록 하죠. 그때 마저 이야기해요.”

“그래요.”

크리스틴은 소피아와 일당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연신 영애들의 눈치를 보던 에렉도 단념한 것인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에 주변이 한산해졌다. 일리아는 호기심 어린 시선을 보내는 귀족들을 뒤로한 채 더욱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한참 말다툼을 했더니 괜히 갈증이 났다. 잠시 고민하던 일리아는 지나가던 시종을 불러 와인 한 잔을 얻어 냈다. 선홍빛 와인에서 탐스러운 과일 향이 은은하게 올라왔다.

“딱 한 잔만 마셔야지.”

“또 사고 치려고?”

일리아가 와인 잔을 막 입에 가져가려던 때였다. 어느새 돌아온 카일루스가 일리아의 손에서 와인 잔을 빼앗아 들었다.

“깜짝이야! 언제 왔어요?”

“방금. 그리고 이거 마시지 마. 도수가 꽤 높은 와인이니까.”

“딱 한 잔만요.”

“안 돼. 곧 폐하께서 오실 거야. 괜히 사고 치지 말고 가만히 있어.”

카일루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황제의 입장을 알리는 외침이 들려왔다.

“아제로스 제국의 위대한 태양이신 바이에드 알테르 그란디아 황제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장의 목소리에 소란스럽던 파티장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일리아도 서서히 열리는 문을 바라보다 허리를 숙여 황족에 대한 예를 표했다.

바이에드 황제는 황태자인 테오도르를 거느린 채였다. 황녀인 이사벨라는 아직 나이가 어려 참석하지 않는 듯했다.

고개 숙인 귀족들을 지나 거침없이 단상 위로 올라선 바이에드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오만하고, 위압감 넘치는 목소리였다.

“아제로스의 훌륭한 국민들이 테멜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지켜 냈소.”

바이에드는 덤덤하게 연설을 이어 나갔다.

그의 연설을 듣는 내내, 일리아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번에 차출된 아제로스군의 반 이상은 평민이었다. 그들은 모두와 함께 목숨 바쳐 싸웠음에도 신분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된 공치사를 받지 못했다. 그런데 이런 호화로운 파티에서 전공을 치하하는 연설을 듣고 있자니 그들에게 죄를 짓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바이에드는 아제로스 제국의 국민은 오직 귀족뿐이라는 듯한 태도를 보였고, 그것이 일리아를 거북하게 만들었다.

“마침 승리의 주역이 함께 참석한 모양이군.”

일리아는 빠르게 상념을 털어 냈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바이에드의 차가운 눈빛이 카일루스와 일리아를 훑었다.

“그대들이 파티의 시작을 알려 주시오.”

“영광입니다, 폐하.”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손을 잡고 무대로 향했다. 심장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거세게 요동쳤다.

“어, 어떡하죠?”

“진정해. 배운 대로만 하면 될 거야.”

“하지만…….”

“걱정하지 마.”

바이에드가 손짓하자 악단이 기다렸다는 듯이 연주를 시작했다. 곧, 잔잔한 선율이 넓은 파티장을 가득 울렸다.

카일루스의 리드에 맞춰 침착하게 스텝을 밟던 일리아는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이 곡…….’

그리고 깨달았다. 현재 악단이 연주하고 있는 곡은 일리아가 카일루스와 매일같이 지옥 훈련을 했던 바로 그 곡이었다.

하필이면 딱 연습한 곡이 나올 게 뭔가. 다행히 망신은 안 당하겠지만, 이대로는 내기에서 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초조해진 일리아는 카일루스를 슬쩍 올려다봤다. 그리고 보았다. 그의 입가에 걸려 있는 사악한 미소를.

‘매수했구나!’

어쩐지 이 곡만 집요하게 연습시킨다 했다. 카일루스는 애초에 내기에서 질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그저 유행하는 곡이라고 생각하여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던 것이 일리아의 패인이었다.

“이건 반칙이잖아요!”

“먼저 반칙한 건 그대야. 내가 없다고 연습을 게을리해?”

“혹시 첩자라도 심어 두셨어요?”

“글쎄.”

일리아는 부드럽게 몸을 돌리며 입을 삐죽거렸다.

“정말 너무해요.”

“아까도 말했지만 먼저 너무했던 건 그대야.”

“하, 정말. 진짜 너무한 게 뭔지 보여 드려요?”

이를 악문 일리아는 국법을 줄줄 외며 안무를 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수십, 수백 번을 연습한 탓인지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이런 망할 운동 신경!’

다급해진 일리아는 협상을 시도했다.

“서로 반칙했으니까 무효로 하는 게 어때요?”

“계약서에 그런 조항은 없었잖아.”

“그, 그래도……!”

“쉿. 마지막 동작이야.”

일리아는 속으로 절규하며 몸을 돌렸다. 깔끔한 턴과 함께 마침내 악단의 연주가 끝이 났다.

“내 승리야, 일리아.”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일리아는 무대에서 내려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순식간에 귀염둥이에서 청소부로 신분이 수직 하락 했다. 그 거대한 저택을 청소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라니체 백작한테 잘 설명하고 저택으로 들어와. 청소가 끝나면 무사히 보내 줄 테니까.”

찬란하기만 하던 카일루스의 미소가 지금은 어쩐지 얄밉게만 보였다.

일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꼴 보기 싫을 때는 역시 도망치는 게 상책이었다.

“어머,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요. 춤 알레르기인가 봐요!”

일리아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후다닥 빈 발코니로 도망을 쳤다.

카일루스는 그런 일리아를 바라보며 설핏 미소를 지었다.

사실 카일루스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일리아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을지 고심하고 있었다. 테멜 왕국과의 전쟁에서 그녀를 위험에 빠뜨린 일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며칠을 고민해도 좋은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곤란하던 차였는데 마침 일리아가 파트너 요청을 해 온 것이다.

고작 이 정도로 목숨에 대한 보상을 할 수는 없겠지만, 카일루스는 적어도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다른 것은 일리아가 에스테반 저택에 머무르게 되었을 때 천천히 해 주면 될 일이었다.

“일단 와인이라도 한 잔 가져다줄까.”

카일루스는 가볍게 걸음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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