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11)화 (11/101)

11화 

에렉 역시 일리아의 춤이 얼마나 엉망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강요하지 않았다. 즉, 이번 파티가 일리아의 데뷔 무대라는 것.

“잘할 거야. 누가 가르쳤는데.”

“잘하고 싶지 않아요.”

“그럼 망신당하고 싶은 거야?”

“그것도 싫어요!”

일리아가 입을 삐죽거리자 카일루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퍽 자연스러워진 그 미소에 일리아는 무심코 마주 웃어 버렸다.

“요새 웃음이 많아지셨네요.”

“내가?”

“네. 볼 때마다 웃고 계시는걸요.”

카일루스는 괜히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웃음이 많아지긴 했다. 오죽하면 매사에 침착하던 그의 보좌관마저 그의 눈치를 봤을까.

“그대 때문에 웃을 일이 많아지긴 했지.”

“제가 뭘 어쨌다고…….”

“잘 떠올려 봐. 그대가 지금까지 무슨 짓을 했는지.”

“죄송합니다.”

일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동안 저지른 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지금까지 제가 무슨 짓을 해 왔던가. 술에 취해 카일루스의 옷에 구토를 하고, 전쟁 중에 막사를 태워 먹을 뻔한 것으로도 모자라 홧김에 그의 이름을 팔기까지 했다. 웃기기는커녕 해탈의 경지에 오를 지경이었다.

‘진짜 망나니잖아?’

결과적으로 평생 카일루스의 부하 아닌 부하가 되는 업보를 짊어지긴 했지만, 그 정도로 끝난 것을 천운으로 생각해야 했다. 다른 귀족이었다면 일리아를 당장 재판소로 끌고 갔을 것이다. 그만큼 일리아의 만행은 깜찍하다 못해 끔찍한 수준이었다.

‘앞으로는 더 조심하자.’

일리아가 마음을 다잡는 사이, 대로를 부지런히 달리던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드디어 황성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마차에서 내린 카일루스가 일리아를 향해 정중하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실까요, 레이디.”

“안 그래도 긴장돼 죽겠는데 장난치지 마세요.”

괜히 핀잔을 준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일견 다정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에 근처에 있던 귀족들이 입을 떡 벌리며 수군거렸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카일루스는 그동안 수많은 영애의 구애에도 목석같이 버티며 파트너를 두지 않던 남자였다. 그랬던 그가 무려 황실이 주최하는 파티에 파트너를 데리고 왔다. 그야말로 엄청난 특종이 아닐 수 없었다.

“다들 이쪽만 쳐다보는 것 같아요.”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내 첫 파트너가 되었는데.”

“그건 그렇지만…….”

일리아는 울상을 지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춤을 출 생각을 하니까 긴장돼서 토할 것 같아요.”

“그건 조금 곤란해.”

“저도 마찬가지예요.”

카일루스는 낮게 웃으며 일리아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이럴 때는 주인에게 의지해도 돼, 일리아.”

“주인은 누가 주인이에요!”

“내가, 그대의.”

“어차피 그것도 오늘이 마지막일걸요?”

“그건 두고 봐야지.”

일리아는 카일루스를 노려보다 고개를 휙 돌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넓은 복도를 지나 궁 안으로 들어간 두 사람은 시종의 안내를 받아 파티장으로 향했다.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시종은 그들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이어 거대한 문을 힘주어 열었다. 서서히 벌어지는 문 너머에서 환한 빛 무리와 함께 시끌벅적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심호흡을 하며 카일루스와 발 맞춰 걸었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걸음을 옮길 때마다 수많은 시선이 그녀를 꿰뚫기라도 할 것처럼 날카롭게 따라붙었다.

“괜찮아?”

“괜찮아 보여요?”

“벌써부터 이러면 춤은 어떻게 추려고?”

“…술이라도 한 잔 할까 봐요.”

일리아의 말에 카일루스가 살며시 얼굴을 굳혔다.

“안 돼.”

“실수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전에는 실수하려고 마음먹고 실수했나?”

분하지만 반박할 말이 없었다.

머쓱해진 일리아는 괜히 주변을 둘러봤다. 색색의 예복을 입은 귀족들 사이로 레이븐과 엘레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다정하게 붙어 서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삐죽 솟아 있는 것을 보니 헤이스팅스 후작인 듯했다.

“뭘 그렇게 봐?”

“부모님이요. 사실 점심 챙겨 먹은 게 찔려서 인사도 못 드리고 나왔거든요.”

“그럼 지금 하면 되겠네.”

카일루스는 일리아를 데리고 그들에게 향했다. 귀족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파트너의 가족과 인사를 나눈다는 것은 그들의 관계가 그만큼 깊다는 것을 보여 주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카일루스 역시 세간의 인식이 그렇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무슨 실수라도 하기 전에 일리아의 긴장을 풀어 주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라니체 백작에게 향한 것이었는데, 일리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보니 왠지 기분이 묘했다.

“아버지, 어머니.”

“왔구나, 일리아.”

일리아가 먼저 인사를 하고, 그다음에 카일루스가 나섰다.

“이렇게 사적으로 인사하는 건 처음이군.”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각하.”

카일루스는 보름이 넘도록 그라니체 저택에 들락거렸지만 레이븐과는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다. 레이븐이 마법사 협회 소속인지라 마족의 개입이 확실시된 이후부터 대책 마련을 위해 황성에서 밤을 새우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가문과 영지는 엘레나가 도맡아 관리하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한가한 카일루스는 자연스럽게 그들과 마주치지 않게 되었다.

‘이래서 권력이 중요한 거구나.’

일리아는 시도 때도 없이 저택에 찾아왔던 카일루스를 떠올리며, 새삼 그의 위치가 얼마나 대단한지 깨닫게 되었다.

“진중한 백작에게서 이런 재미있는 딸이 나왔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야.”

“가, 각하!”

“칭찬인데?”

“그게 무슨 칭찬이에요!”

일리아는 다급하게 카일루스의 팔을 잡아끌었다. 레이븐과 엘레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만약 카일루스가 그들에게 일리이가 저지른 만행들을 이야기하기라도 했다가는 저택에 돌아가자마자 크게 경을 칠지도 몰랐다.

“인사 다 나누셨으면 방해하지 말고 가요.”

“다음에 정식으로 방문하지.”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들을 뒤로한 채 자리를 옮긴 일리아는 벽에 기대어 서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각하 때문에 못 살아요, 정말.”

“칭찬이었다니까?”

“됐어요!”

일리아는 손을 부채처럼 팔락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문득, 에렉과 눈이 마주쳤다.

에렉은 약혼자인 크리스틴을 버젓이 옆에 두고도 일리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몸을 움찔거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달려올 기세였다.

“하, 참 나.”

“왜 그래?”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에렉 로베르트가 보여서요.”

일리아를 따라 시선을 돌린 카일루스가 작게 감탄했다.

“의외로 멀쩡하게 생겼네.”

“생긴 건 그렇죠.”

“옆에 있는 영애는 본 적 있는 얼굴이로군.”

“아마 그럴 거예요. 플로라 영애는 플로라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니까요.”

크리스틴 플로라.

그녀는 플로라 가문의 적녀이자 유일한 후계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진짜로 실천하는 몇 안 되는 귀족이었다. 마수의 습격으로 재산을 잃은 영지민을 위해 사비를 털거나 주기적으로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지금까지 수많은 선행을 베풀어 왔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일리아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마주치기만 하면 신경전을 벌이기 일쑤였지만.

크리스틴은 이상하게도 일리아만 보면 얼굴을 굳히며 언짢아하는 티를 팍팍 냈다. 덕분에 처음에는 무시하던 일리아도 이제는 기꺼이 그녀를 마주 노려볼 정도였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대와 인사를 나누고 싶은 모양인데.”

“…뻔뻔하기도 하지.”

카일루스의 말대로, 에렉은 잔잔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나름 멋들어진 미소였지만 일리아는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얼굴을 구겼다. 일리아에게는 그의 얼굴이 마치 말라비틀어진 빵처럼 건조하고 볼품없어 보였다.

‘내가 눈이 높아졌나?’

일리아는 무심코 카일루스를 올려다봤다.

이렇게 보니 확실히 알겠다. 눈이 높아진 게 맞았다. 이런 절세미인이 옆에 있는데 에렉의 평범한 얼굴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춤 연습 때문에 자주 만난 것이 화근이 된 듯했다. 게다가 요즘의 카일루스는 방긋방긋 잘도 웃어 대지 않았던가. 그새 그 찬란한 미소에 익숙해진 것인지 에렉뿐만 아니라 파티장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오징어처럼 보였다.

“좋은 밤이야.”

“염치는 안녕하니?”

“그래, 그래. 나도 반가워, 일리아.”

에렉의 뻔뻔한 태도에 일리아는 기분이 나빠졌다. 저 웃는 얼굴이 일그러지는 게 보고 싶어 무안이라도 주려는데, 옆에 가만히 서 있던 카일루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의 친구인가?”

일리아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삼켜 냈다. 누군지 뻔히 다 알고 있으면서도 연기를 하는 모습이 제법 우스웠다.

“네, 뭐…….”

“초면이군.”

“처음 뵙겠습니다. 에렉 로베르트입니다, 각하!”

카일루스는 에렉과 저 멀리에 서 있는 크리스틴을 번갈아 바라봤다. 일리아를 버리고 약혼했다기에 절절한 사이라도 되는 줄 알았더니, 지금 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했다. 크리스틴은 에렉이 일리아에게 관심을 보이든 말든 정계의 인사들과 대화를 나누기에 여념이 없었다.

최근에 플로라 가문이 로베르트 가문과 협력하여 운송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긴 했는데, 설마 이 정도로 사무적인 관계일 줄은 몰랐다. 고작 편지 한 장에 절망한 일리아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할 수 없지.’

일리아가 측은해진 카일루스는 그녀의 체면을 살려 주기로 마음먹었다.

“들은 적 있는 이름이군.”

“각하께서 저를 알고 계시다니 가문의 영광…….”

“그대에게 감사를 표하지.”

“네?”

“그대 덕분에 일리아와 가까워질 수 있었거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리아와 카일루스가 ‘귀염둥이’라는 자리를 걸고 말도 안 되는 계약을 한 것의 바탕에는 에렉의 이별 통보가 있었다. 에렉이 서둘러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면 일리아가 술을 마실 일도, 카일루스에게 무례를 저지를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재미있는 경험도 못 했을 테고 말이지.’

카일루스의 말에 에렉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마치 장난감을 빼앗긴 어린아이와도 같은 눈빛이었다. 일리아에게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얻은 지위와 명예가 아까울 뿐이었다.

“다음에 따로 자리를 만들도록 하지. 보답이라도 해야겠어.”

“…영광입니다, 각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