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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10)화 (10/101)

10화 

카일루스는 일리아가 조금이라도 대충 하는 기색이 보이면 득달같이 달려와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덕분에 나날이 실력이 늘어 일리아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각하, 오늘은 언제 가실 거예요?”

“곧 갈 거야. 회의가 있거든.”

“회의요? 대회의가 벌써 열려요?”

“아니.”

카일루스는 일리아에게 보고 있던 서류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읽어 보면 알아.”

서류를 받아 든 일리아는 빼곡하게 써 있는 글자를 천천히 읽어 내려가다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들었다.

“포로로 잡아 왔던 테멜인이 전부 죽었다고요?”

“그래. 그것 때문에 간수들이 크게 다쳤어.”

“다들 괜찮아요?”

“다행히 사망자는 없어. 치료도 제때 받고 있고.”

“다행이다……. 설마 무기를 숨기고 있었던 거예요?”

“아니. 마법사 협회의 소견으로는 마법으로 몸이 폭발한 거라고 하더군.”

마법. 마법이라.

일리아의 얼굴이 깊게 가라앉았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몸이 폭발했다면 체내에 폭발을 일으키는 수식을 새겨 넣었을 확률이 높았다. 고대 룬어로 수식을 직접 새겨 넣으면 주체가 되는 마법사가 없어도 마법을 발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몇 가지 제한은 존재했다. 첫째, 원격 조작은 불가능하며, 둘째, 룬어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법사가 정해 놓은 시동어를 소리 내어 말해야 한다는 것. 즉, 이 마법이 확실하다면 이번에 폭발한 테멜인들은 기폭제가 되는 시동어를 내뱉고 자폭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 마법이 있다고?”

“고대의 마법이에요. 마족이 즐겨 사용했다는 기록을 읽은 적이 있어요.”

“또 마족인가.”

다시 한번 서류를 살피던 일리아는 아, 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혹시 테멜인들이 폭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 뭐였는지 아세요? 그게 아마 시동어였을 거예요.”

“바이에드. 그렇게 말했다고 했어.”

“뭐라고요?”

일리아는 눈가를 미미하게 찡그렸다.

바이에드. 그건 아제로스 제국의 유일한 태양인 황제의 이름이었다.

고서에 따르면 룬어 마법은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하여 자주 사용하지 않는 단어로 시동어를 설정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그런데 감히 황제의 이름을 시동어로 설정했다는 것은 명백한 도발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테멜 왕국의 목적은 황제 폐하인 걸까요?”

“아마도.”

“…상황이 좋지 않게 돌아가네요.”

“당분간은 별일 없을 거야. 저쪽도 여력이 없으니 이런 수작질이나 부리고 있는 거겠지.”

카일루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여기저기 널려 있는 서류를 대충 챙겼다.

“일단 회의 다녀올 테니까 연습하고 있어.”

“다, 다시 오신다고요?”

“당연하지. 맞춰 봐야 할 거 아니야.”

“각하!”

“그럼 다녀올게. 열심히 연습하고 있으라고, 귀염둥이.”

일리아는 멀어지는 카일루스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 * *

안타깝게도, 카일루스는 정말 회의가 끝나자마자 돌아왔다.

“맞춰 보자.”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일리아는 마지못해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카일루스가 일리아의 허리에 팔을 두르자 악단이 기다렸다는 듯이 연주를 시작했다. 곧, 잔잔한 사라반드가 넓은 연습실에 울려 퍼졌다.

일리아는 지금까지 배운 것을 상기하며 조심스럽게 스텝을 밟았다. 수없이 반복하여 연습한 덕분인지 한 동작, 한 동작이 매끄럽게 이어졌다.

“여기서 돌고.”

“앗!”

일리아가 카일루스의 손을 잡고 몸을 돌리려던 때였다. 왼발의 스텝이 엉키는 바람에 몸의 중심이 크게 흐트러졌다. 일리아는 깜짝 놀라 팔을 허우적거렸고, 당황한 카일루스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졸지에 카일루스의 품에 안기게 된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밭은 숨을 내쉬었다.

“괜찮아?”

“괘, 괜찮아요. 죄송해요!”

일리아는 황급히 카일루스에게서 몸을 떼어 냈다.

넘어질 뻔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급격하게 가까워진 거리 때문일까. 심장이 고장 난 것처럼 쿵쿵거렸다.

“아직도 턴이 약하네.”

“아까 연습할 때는 괜찮았는데…….”

“그럼 다시 해 보자. 집중해.”

카일루스의 커다란 손이 일리아의 허리를 부드럽게 받쳐 들었다. 두근거리는 작은 울림과 함께, 지옥의 춤 훈련이 다시 시작되었다.

* * *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그날이 다가왔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치장을 마친 일리아는 비장한 얼굴로 거울 앞에 섰다.

“어떠세요?”

에나의 물음에 일리아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블루 다이아몬드 핀으로 고정한 은빛 머리카락과 옅은 색조 화장은 마치 그림처럼 잘 어울렸으며, 잔뜩 부풀린 실크 드레스 또한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이 정도면 유행에 뒤처진다는 소리는 듣지 않겠지?”

“그럼요.”

“고마워, 다들.”

일리아는 거울 앞에서 몸을 빙그르르 돌리다가 곧 힘없이 멈춰 섰다.

“하아, 아침부터 치장에 힘을 쏟았더니 배고파졌어.”

“하지만 오늘은 굶으셔야 하는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에나. 사람은 먹어야 살 수 있는 거라고.”

“백작 부인께서 아시면…….”

“안 걸리면 그만이지. 그럼 다녀올게!”

방에서 나온 일리아는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조용히 식당으로 향했다.

‘굶으라니. 어떻게 그런 끔찍한 소리를…….’

대부분의 귀족들은 중요한 파티가 있는 날이면 꼭 금식을 했다. 미리 맞춰 놓은 예복을 최상의 상태로 입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리아는 일반적인 귀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오랜 전쟁으로 몸이 힘든 와중에도 식사만큼은 꼬박꼬박 챙겼던 그녀다. 고작 드레스 하나 입겠다고 굶는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어차피 사교계는 또 다른 전장이라고!’

출정을 위해 이렇게 멋진 갑옷과 최고의 검을 준비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남은 것은 보급뿐이었다.

일리아는 주방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빠르게 선반을 뒤졌다. 다행히 오전에 구워 놓은 것으로 보이는 빵이 조금 남아 있었다.

“이걸로는 부족한데.”

빵을 우물거리며 주변을 둘러보던 일리아는 주방 입구 쪽에 소리 없이 서 있던 클리드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깜짝이야! 오, 오라버니! 거기서 뭐 해?”

“네가 배고플까 봐 뭐라도 만들어 주려고.”

클리드는 음울한 얼굴로 재료를 뒤적거렸다.

“안색이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어?”

“무슨 일 있냐고?”

클리드가 손을 휘두르자 식칼이 작은 소음을 내며 도마 한가운데에 박혀 들었다.

“네가 춤추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으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오늘 못 와?”

클리드는 식재료 창고에서 고기를 꺼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응. 아이기스에 금이 갔거든. 고치러 가야 해.”

“금이 갔다고?”

“얼마 전에 생긴 균열인데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와서.”

“얼마 전이라면…….”

“감옥에서 작은 폭발이 있었거든. 아무래도 그때 생긴 것 같아.”

아이기스는 수백 년 전, 그들의 선조인 드래곤이 황성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 낸 궁극의 방어 마법이었다. 황성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아이기스에는 드래곤과 초대 황제의 영혼이 깃들어 있어 웬만한 공격으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었으며 드래곤의 마력 없이는 마법을 보완하거나 해제하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그런데 고작해야 수식을 이용한 마력 폭발이 감히 드래곤의 마법에 균열을 낸 것이다. 물론 그 정도에 부서질 만큼 허술한 마법은 아니었지만, 충분히 경계할 만했다.

“역시 테멜 왕국의 배후에는…….”

“그래. 마족이 있어.”

“오라버니도 그렇게 생각해?”

“응.”

손질한 고기를 알맞게 구워 낸 클리드가 곁들여 먹을 채소를 씻으며 말을 이었다.

“마력의 흔적을 확인해 봤는데 확실히 인간의 것과는 달랐어.”

“…괜찮을까?”

“괜찮다마다. 일리아는 이 오라버니가 지켜 줄 테니 안심해.”

클리드는 씩 웃으며 먹음직스러운 송아지스테이크를 일리아에게 내밀었다.

“자, 먹어. 어머니께는 비밀이야.”

“고마워, 오라버니!”

클리드 덕분에 든든하게 배를 채운 일리아는 다시금 매무새를 정리하고 정원으로 향했다. 아직 카일루스와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이 되지는 않았지만 혹시라도 엘레나에게 식사한 것을 들킬까 봐 미리 도망친 것이었다.

“날씨 좋네.”

일리아는 한적한 정원을 거닐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초대 황제가 마족을 몰아내고 현 황제가 마수 왕을 토벌한 이후로 아제로스 제국은 전례 없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그 말은 곧, 최고의 국방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실전 경험이 전무하다는 것. 주기적으로 마수 토벌에 나서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과 전쟁은 완전히 다른 영역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에 대한 증거로 고작 테멜 왕국군과 마물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고전하지 않았던가.

만약 배후로 추정되는 마족까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면 아제로스 제국은 생각지도 못했던 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 미리 대비하지 않는다면 분명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 것이었다.

‘좋은 수가 없을까.’

일리아는 여린 꽃잎을 어루만지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리아.”

그런데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일리아의 상념을 갈랐다. 일리아는 고개를 슥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짙푸른 예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카일루스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일리아에게 다가왔다. 푸른 다이아몬드 브로치가 그의 가슴께에서 찬란하게 빛났다. 마치 한 폭의 그림과도 같은 그 모습에 일리아는 멍하니 눈만 깜박거렸다.

“일리아?”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어요?”

“내가 조금 일찍 도착했어.”

카일루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일리아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귀염둥이, 손.”

“각하!”

“안 할 거야?”

“해요!”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손 위에 거칠게 한 손을 올려놓으며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곧 머리 위에서 큭큭거리는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만 웃고 가요!”

* * *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작은 소음을 내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스테반 가문의 마차는 외부만큼이나 내부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일리아는 넓은 마차를 둘러보다 폭신한 의자에 몸을 묻었다.

“연습은 많이 했어?”

“그럼요. 물론이죠.”

연습은 개뿔.

카일루스가 회의로 바빠진 틈을 타 일리아는 있는 힘껏 놀았다. 굳이 말하자면 반칙이라고도 할 수 있었지만, 상대도 없는 마당에 무슨 의지로 춤 연습을 하겠는가. 일리아는 열심히 놀아서 체력을 기르는 것 또한 춤 연습의 일환이라며 작은 일탈을 애써 합리화했다.

“도대체 에렉 로베르트와는 어떻게 춤을 춘 거야?”

“한 번도 춘 적 없어요.”

“한 번도?”

“네. 괜히 망신당하기 싫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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