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내가 미쳤지! 상황 봐 가면서 말할걸!’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일리아는 조용히 한 손을 들어 올려 제 입술을 세차게 때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하얗게 질렸던 입술이 붉게 부어올랐을 때쯤, 카일루스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는 어깨를 흠칫 떨며 카일루스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고개를 돌린 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몸이 이따금씩 떨리는 것을 보니 엄청나게 분노한 게 틀림없었다. 일리아는 다시 한번 바닥에 엎어졌다.
“죄송합니다. 실언했습니다. 제가 눈치가 많이 없었습니다!”
일리아는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초조한 마음에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고 있는데, 돌연 머리 위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쭈뼛거리며 고개를 든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카일루스가 날카로운 눈꼬리를 사르르 접으며 예쁘게 웃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위기마저 싱그러운 것이, 마치 화사하게 피어난 봄꽃 같았다.
‘그때 본 건 맛보기였구나.’
바람이 새는 듯한 옅은 미소와는 확연하게 달랐다. 잘생긴 얼굴이 활짝 피어나니 아주 황송하다 못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일리아는 홀린 듯이 카일루스를 올려다봤다.
입을 틀어막고 있던 카일루스는 이내 거친 풍랑을 만난 바다처럼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듣는 사람마저 청량한 기운을 느낄 정도로 호탕한 웃음이었다.
괜히 머쓱해진 일리아는 가만히 주저앉아 카일루스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커다란 웃음소리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너무 웃으시는 거 아니야?’
참다못한 일리아는 결국 몸을 벌떡 일으키며 낮게 읊조렸다.
“그만 웃으세요…….”
“하아, 그대는 언제나 내 예상을 뛰어넘는다니까.”
“실언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일리아가 입술을 삐죽거리자 카일루스는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해 줄게, 파트너.”
“정말입니까?”
“그래.”
일리아가 활짝 웃으며 두 손을 맞잡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각하!”
“알겠으니까 앉아. 정신 사나워.”
“네!”
카일루스는 금세 싱글벙글해진 일리아를 바라보며 재차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만난 날부터 느끼긴 했지만, 그녀는 정말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각하께서도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사양 않지.”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일 보세요. 저는 이만 가 보겠습…….”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몸을 일으키려다가 엉거주춤 멈춰 선 일리아가 다시 스르르 자리에 앉았다.
“말씀하세요.”
“춤은 출 줄 알아?”
“추, 춤이요?”
카일루스가 여유롭게 턱을 괴며 말했다.
“그대와 나는 이번 파티의 주인공이잖아. 폐하께서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으실걸.”
“각하께서만 주인공 하시면 안 됩니까? 아니면 춤은 다른 분하고 추신다든가…….”
“그대는 나를 매너도 모르는 몰상식한 남자로 만들 셈이야?”
“그건 아닙니다만, 아주 큰 문제가 있거든요.”
일리아는 위대한 드래곤의 후손으로서 못하는 게 거의 없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춤이었다. 얼마나 소질이 없는 것인지 목각 인형조차 춤추게 만든다는 전설의 교사, 플랑 부인마저 치를 떨 정도였다.
플랑 부인은 음악에 맞춰 삐걱거리는 일리아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 어떻게 이제 막 사교계에 데뷔한 어린 영애들보다도 춤을 못 출 수가 있죠?
플랑 부인의 말에 큰 충격을 받은 일리아는 그날 이후로 춤 연습을 그만두었다.
그런데 뭐라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춤을 춰야 한다고? 그것도 카일루스와?
일리아는 거세게 도리질을 쳤다.
“춤은 정말 안 됩니다. 망신만 당할 겁니다.”
“내가 가르쳐 줄게.”
“각하께서요?”
“그래. 어느 정도는 출 수 있게끔 만들어 주지.”
“…불가능합니다.”
일리아가 계속해서 거절하자 카일루스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럼 내기할래? 그대가 춤을 출 수 있을지, 없을지. 나는 출 수 있다에 걸지.”
“무조건 제 승리입니다.”
“그건 모르는 거지.”
카일루스는 상당히 자신만만해 보였다. 일리아의 춤 실력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이길 게 분명한 내기이니 장단이나 맞춰 주자 싶어 일리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해요, 내기. 각하께서는 뭘 거실 겁니까?”
카일루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 한 손을 들어 올려 일리아를 가리켰다.
“그대를 걸지.”
“네? 저를요? 저는 제 건데요?”
“만약 내가 지면 그대를 내 귀염둥이 자리에서 해방해 줄게.”
“에이, 그건…….”
“어제 일자로 공증을 마친 참이거든. 어때?”
일리아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공증을 마쳤다는 말은 이제 그놈의 ‘귀염둥이’라는 자리가 법적 효력을 갖게 되었다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즉, 카일루스가 계약을 빌미로 이상한 것을 요구해도 일리아는 거부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물론 그가 그런 요구를 하지는 않겠지만, 사람 앞일은 모르는 것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악용될 가능성이 있었다.
“좋아요.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대는 뭘 걸 거지?”
“각하께서 원하시는 것을 걸겠습니다.”
“딱히 없어. 그대가 걸고 싶은 걸 말해.”
가만히 고민하던 일리아는 왼손을 슬쩍 들어 올렸다.
“손목이라도…….”
“…필요 없어.”
“그럼 손가락?”
“장난치지 말고.”
주위를 대충 둘러보던 일리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제가 지면 뭐… 여기 청소라도 할까요?”
“좋아.”
“네?”
“그대가 지면 당분간 여기 머물면서 청소를 하는 거야.”
“그걸로 괜찮으시다면야……. 알겠습니다.”
카일루스는 여유로운 일리아를 보며 단단히 일렀다.
“대신 조건이 있어. 가르쳐 주는 대로 열심히 배울 것.”
“알겠습니다. 기왕 하는 내기이니 일단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찾아갈게. 아, 그리고.”
카일루스가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말 편하게 해.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그래도 됩니까?”
“그래. 귀염둥이의 특권이라고 해 두지.”
“정말 별 특권이 다 있네요. 일단 알겠습니다.”
“그럼 계약서부터 쓸까.”
카일루스는 정갈한 필체로 계약서를 적어 내려갔다. 일리아가 한 곡을 완벽하게 추면 카일루스의 승리, 추지 못하면 일리아의 승리였다.
“이견은?”
“없습니다.”
“좋아.”
계약서에 서명한 일리아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에스테반 저택을 나섰다.
“원하던 건 얻으셨어요?”
“응.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
그라니체 저택으로 돌아온 일리아는 가족들을 모아 놓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물론, 모든 것을 털어놓지는 않았다. 에렉이 내뱉었던 헛소리까지 모두 이야기한다면 레이븐과 클리드가 로베르트 가문을 뒤엎으려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내기에서 지면 저택을 청소하기로 했다고? 심지어 거기서 지내면서?”
“그 음흉한 공작이 네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이 오라버니는 절대 반대다!”
내기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것만으로도 이런데 어떻게 모든 것을 털어놓겠는가.
일리아는 길길이 날뛰는 두 사람을 진정시키며 말했다.
“이미 계약서까지 작성했으니 이제 와서 무를 수는 없어요.”
“계약서는 이 오라버니가 찾아서 파기해 주마. 다시 생각해 봐, 일리아.”
“괜찮아. 어차피 내가 이길 테니까.”
“내기 종목이 뭐길래?”
“춤! 정확히는 내가 한 곡을 완벽하게 출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내기야.”
‘춤’이라는 말에 레이븐과 클리드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 역시 알고 있었다. 일리아의 춤 실력이 얼마나 처참한지를.
“응원하마, 일리아.”
“고마워요, 어머니.”
일리아는 기지개를 쭉 켜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 그리고 각하가 가끔 저택에 오실 거예요. 그렇게들 알고 계세요.”
“뭐, 뭐라고?”
“그놈이 여길 왜 와!”
“저는 피곤해서 먼저 올라가 볼게요. 다들 푹 쉬세요!”
가족들에게 손을 흔든 일리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거실을 나섰다.
* * *
시간은 유수와 같이 흘러, 내기를 시작한 지도 벌써 열흘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카일루스는 종종 그라니체 저택에 들러 일리아에게 춤을 가르쳤다.
물론, 그 과정에서 클리드와 작은 마찰이 있기는 했다. 클리드는 카일루스와 마주칠 때마다 못마땅해하는 티를 팍팍 내며 으르렁거렸다. 덕분에 일리아는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모른다. 안하무인으로 대드는 클리드의 행동은 명백한 하극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어떻게 되나 싶었는데.’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생활하던 어느 날. 카일루스는 마침내 클리드를 응접실로 불러냈다.
하지만 일리아가 우려했던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눈 그들은 마치 절친한 친구라도 된 것처럼 다정한 모습으로 일리아의 앞에 나타났다. 일리아가 클리드에게 무슨 대화를 나눈 것인지 넌지시 물어봤지만, 그는 방긋 웃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여기서는 왼발 먼저 움직이라고 했잖아.”
“죄, 죄송해요!”
일리아는 울상을 지으며 발을 치웠다.
카일루스는 상당히 엄격한 선생님이었다. 그는 일리아가 한 동작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반복 훈련을 시켰으며, 정해 놓은 부분까지 진도를 나가지 못하면 식사도 못 하게 했다. 얼마나 혹독한 시간들이었는지. 덕분에 불가능할 것 같았던 춤도 어느 정도는 출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리아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괜히 열심히 배운다는 조건을 수락한 듯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내기에서 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족으로 태어나서 청소라고는 옷가지를 던져 놓는 것밖에 해 본 적이 없는 일리아였다. 그 큰 저택을 제대로 청소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놈의 각하는 왜 이렇게 치밀한 거야?’
일리아는 몰래 카일루스를 노려봤다.
최근 들어 카일루스가 그라니체 저택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졌다. 초반에는 연습이 끝나면 바로 돌아갔던 그였지만, 언제부터인가 일거리를 한두 개씩 가져오는가 싶더니 이제는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일을 하기까지 했다.
일리아는 매일 쉬는 시간도 없이 일하는 그를 측은하게 여겼다. 그런데 누가 알았겠는가. 그게 다 연습 시간을 늘리기 위한 꼼수였을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