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에렉은 짐짓 불쌍한 척을 하며 일리아의 손을 붙잡았다.
“혹시라도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말해. 내가 다 사 줄 테니까.”
“됐어! 지금 그런 소리를 할 때라고 생각해?”
일리아가 손을 쳐 내자 에렉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러지 말고 골라 봐. 보석은 어때? 아니면 드레스나 향수 같은 것도…….”
“됐다니까. 할 말은 그게 다야?”
평소와 달리 완고한 일리아의 태도에 당황한 에렉은 황급히 다른 주제를 꺼냈다. 이거라면 그녀도 쉽게 무시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면서.
“이번 승전 기념 파티에 함께 갈 파트너는 구했어?”
“…파트너?”
일리아는 눈을 깜박거리며 얼굴을 굳혔다.
파티에 참석하는 게 오랜만이어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파트너의 존재를.
물론, 파트너와 동반하는 것은 필수가 아니었다. 그래서 파트너를 필요로 하지 않거나 파트너를 구하지 못한 귀족들은 간혹 혼자서 파티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그렇듯, 젊은 귀족 자제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에게 있어 파트너란 서로를 빛내 주는 장신구이자 가문의 세력을 보여 주는 척도였다. 만약 승전 기념 파티의 주인공인 일리아가 파트너도 없이 혼자서 파티에 참석한다면 가십거리가 되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의 애정 전선에도 큰 문제가 생길 터였다.
에렉은 그 부분을 노리고 파트너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일리아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그는 화색을 띠며 말했다.
“혹시 아직 구하지 못했다면 함께 가지 않을래?”
“…함께? 우리가?”
“플로라 영애한테도 말해 놓을게. 그래도 혼자보다는 셋이 낫잖아.”
일리아는 해사하게 웃는 에렉의 얼굴을 엉망진창으로 부숴 버리고 싶었다. 어떻게 전 약혼자와 현 약혼자를 양쪽에 끼고 파티에 참석하겠다는 미친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것인지.
에렉은 일리아의 얼굴이 점점 구겨지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옷도 맞춰 입으면 재미있겠다.’라며 되도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았다.
‘이 남자가 진짜!’
참을 수 없는 모욕에 몸을 부들부들 떨던 일리아는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있어, 파트너!”
“있다고? 누구?”
“누구긴! 너랑은 비교도 안 되게 멋있고 좋은 사람이지!”
“나 말고는 아는 영식도 없으면서…….”
“아무튼 있다고!”
“그러니까 그게 누군데?”
찰나의 순간, 일리아의 머릿속에 불현듯 한 남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에스테반 공작 각하!”
일리아의 말에 에렉이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일리아, 거짓말도 그럴듯하게 해야 속아 주지.”
당연한 반응이었다. 카일루스는 지금까지 사교 모임에 단 한 번도 파트너를 대동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본인의 성인식에서까지도 그랬다.
일리아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그렇다면 자존심을 위해서라도 뻔뻔하게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인지 아닌지는 그날 확인해 보면 알겠지!”
“…정말이라고?”
“그래. 그래서 나는 아주 바빠. 준비해야 할 게 어마어마하게 많거든. 그러니까 이만 가 볼게. 안녕!”
일리아는 입을 떡하니 벌리는 에렉을 뒤로한 채 서둘러 카페를 나섰다. 그러고는 마차에 훌쩍 올라타며 다급하게 외쳤다.
“에스테반 공작저로 가!”
* * *
“죄송합니다만, 약속 없이는 만나실 수 없습니다. 돌아가 주십시오.”
“잠깐이면 돼요. 각하께 한 번만 고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정문 앞을 막아선 기사, 디노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또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몰랐다. 카일루스가 전장에서 돌아온 이후로 셀 수 없이 많은 귀족들이 에스테반 저택을 찾았다.
개중에는 카일루스를 만나게 해 달라며 뇌물을 쥐여 주거나 괜히 역정을 내는 이도 있었다. 카일루스가 사전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입장이 꽤나 난처해질 뻔했다. 평민인 디노로서는 귀족인 그들을 당해 낼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카일루스의 명령을 전달하면 대부분의 귀족은 아쉬워하면서도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나 이번에 찾아온 귀족은 달랐다. 마법사 협회의 로브를 두른 그녀는 카일루스의 명령이라는 말에도 요지부동이었다.
‘각하께서 아시면 경을 치실 텐데.’
디노는 더욱 강경하게 나가기로 했다.
“자꾸 이러시면 무력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물러나 주십시오.”
“급해서 그래요. 어떻게 안 될까요?”
“죄송합니다.”
디노의 단호한 태도에 초조해진 일리아는 로브에 새겨져 있는 협회의 문장을 들이밀며 간절하게 말했다.
“마법사 협회의 일로 온 거예요. 진짜 급한 일이라고요!”
“죄송합니다.”
“하아, 어떡하지…….”
일리아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 몰라 하자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세실라가 검 자루에 손을 얹으며 앞으로 나섰다.
“제가 붙잡고 있을게요.”
도발적인 세실라의 말에 디노가 눈을 한껏 치켜떴다.
“지금 싸움이라도 거시겠다는 겁니까?”
“필요하다면.”
세실라와 디노 사이에서 피지직 하고 불꽃이 튀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세실라! 멈춰!”
당황한 일리아가 다급하게 두 사람 사이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정문 쪽에서 서늘한 기세와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에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 들 것처럼 날을 세우고 있던 디노가 사색이 되어 뒤로 물러섰다.
“죄송합니다, 각하.”
잔뜩 위축되어 있는 디노의 뒤로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일리아가 애타게 찾던 바로 그 남자였다.
일리아는 지금 이 기회를 잡지 못하면 엎어 버린 물을 영영 주워 담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래서 다급한 마음에 무리수를 두고 말았다.
“각하! 각하의 귀염둥이가 왔습니다!”
일리아의 외침에 세실라와 디노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귀염둥이?”
“네! 각하의 하나뿐인 귀염둥이요! 벌써 잊으신 건 아니죠?”
두 기사가 묘한 얼굴로 일리아를 바라봤지만 그녀는 짐짓 모른 척하며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잊은 건 아니다만……. 무슨 상황이야, 이건?”
정문에 기대어 선 카일루스가 일리아와 세실라, 그리고 디노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게…….”
머뭇거리는 디노를 힐끔 쳐다본 일리아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선수를 쳤다.
“각하께 급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실례인 줄 알면서도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미리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하지만 정말 급한 일입니다!”
카일루스는 손을 꼭 맞잡은 일리아를 바라보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들어와.”
“시간 내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디노.”
디노가 허리를 곧추세우며 큰 소리로 ‘네!’ 하고 대답했다.
“저 호위 기사는 네게 맡기지.”
“…네?”
디노가 언짢아하는 얼굴로 반문하는 사이, 일리아는 화색을 띠며 세실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럼 다녀올게, 세실라. 잘 놀고 있어.”
“네. 다녀오세요.”
일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카일루스의 뒤를 따랐다.
에스테반 가문의 저택은 그라니체 저택 못지않게 웅장하고 고즈넉한 멋이 있었다. 이 저택 역시 엘리시오 황제가 직접 하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에스테반 가문은 엘리시오의 동생인 칼릭스 그란디아가 세운 가문이었다. 엘리시오는 하나뿐인 동생을 위해 거대한 저택과 영지, 그리고 작위를 하사했고, 이 이야기는 그의 일대기에도 꽤나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아니, 일리아, 지금 한가롭게 저택이나 구경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일리아는 아름다운 정원을 지나 저택 안으로 들어서면서 열심히 말을 골랐다. 그러나 막상 응접실에 들어와 카일루스를 마주하니 두려움과 죄책감이 앞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화내시면 어쩌지? 일단 무릎부터 꿇을까?’
일리아가 초조해하는 얼굴로 고민에 빠져 있자 카일루스가 탁자를 가볍게 두드려 분위기를 환기했다.
“급하다며. 용건.”
“그러니까…….”
“그대가 내 일을 대신 해 줄 게 아니면…….”
“죄, 죄송합니다, 각하!”
일리아는 반쯤 습관이 되어 버린 무릎 꿇기를 시전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진짜 정말 죄송합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어나.”
“일단 사과부터 받아 주세요!”
거듭되는 일리아의 사과에 카일루스는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하아, 또 무슨 짓을 저지른 건데?”
“…사과 받아 주실 겁니까?”
“일단 들어 보고.”
마른침을 꿀꺽 삼킨 일리아는 차분하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드레스를 맞추러 나갔다가 우연히 에렉을 만나게 되었고, 웃기지도 않는 파트너 제안 때문에 욱한 나머지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고.
일리아의 말이 끝나자 카일루스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물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그러니까…….”
일리아는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홧김에 각하와 함께 파티에 참석할 거라고 말해 버렸습니다! 죄송합니다! 파티가 끝나면 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제발 한 번만 도와주세요!”
“…뭐?”
“정말 죄송합니다!”
일리아는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대비하며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카일루스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속절없이 이어지는 침묵에 두려워진 일리아는 눈을 살짝 뜨고 카일루스를 올려다봤다. 그러고는 숨을 들이켜며 다시 눈을 감아 버렸다.
전장에서 수도 없이 보았던 무서운 상관의 눈빛. 그게 돌아왔다!
일리아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며 사죄의 말을 고했다.
“죄송합니다…….”
“일어나.”
서릿발같이 차가운 목소리에 일리아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일리아 그라니체.”
“네!”
“그 충동적인 성격 좀 어떻게 할 수 없나?”
“…죄송합니다.”
“하아, 돌겠군.”
일리아는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넘기는 카일루스를 보며 손을 비비적거렸다.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시면 앞으로 정말 잘하겠습니다. 사고도 안 치고, 말썽도 절대 피우지 않겠습니다!”
“그럼 또 사고 치려고 했어?”
“아니요! 절대요!”
카일루스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내저었다.
“별로 내키지 않는데. 내가 그대의 부탁을 들어줘야 할 이유가 있나?”
“이, 있죠, 당연히!”
일리아는 양손을 허리에 얹으며 당당하게 외쳤다.
“저는 각하의 하나뿐인 귀염둥이잖습니까!”
귀염둥이잖습니까, 귀염둥이잖습니까, 귀염둥이잖습니까…….
넓은 응접실에 일리아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울려 퍼졌다.
메아리가 잦아들자 이번에는 싸늘한 침묵이 응접실에 내려앉았다. 기세등등하게 말을 꺼냈던 일리아는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전장에서의 그날처럼 잘 먹힐 줄 알고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때처럼 웃어 줄 줄 알았던 카일루스는 가만히 앉은 채로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