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 * *
연하늘색 커튼 사이로 따뜻한 햇살이 비쳐 들었다. 일리아는 포근한 이불을 더욱 깊이 끌어안으며 살며시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로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묶어 내린 에나가 보였다. 그녀는 분주하게 일리아의 침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에나.”
“더 주무시지 왜 벌써 일어나셨어요.”
“깨우려고 들어온 거 아니야?”
“사실 맞아요.”
일리아는 기분 좋게 웃었다. 이렇게나 고요하고 평화로운 아침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습입니다!’ 하는 병사의 긴박한 목소리로 하루를 시작하지 않았던가.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런 생활을 했다 보니 어쩐지 이런 잔잔한 평화가 비정상적으로 느껴졌다.
“황실에서 초대장이 왔어요.”
“초대장?”
에나가 일리아에게 작은 트레이를 내밀었다. 동그란 트레이 위에는 금박으로 장식된 고급스러운 봉투가 놓여 있었다.
“공치사도 끝났는데 웬 초대장이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 일리아는 봉투의 봉인을 뜯었다.
[일리아 그라니체 님
부디 한 달 후에 있을 승전 기념 파티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십시오.]
일리아는 초대장을 툭 떨어뜨렸다.
“에나.”
“네.”
“당장 입을 만한 드레스가 있을까?”
“아니요.”
“…드레스를 맞추러 가야겠어.”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린 일리아는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그러나 외출복을 고르는 것부터가 난항이었다. 가지고 있는 드레스가 전부 유행이 지난 것들뿐이었기 때문이다.
드레스 룸 앞에 서서 잠시 고민하던 일리아는 하는 수 없이 가벼운 승마복을 꺼내 입고 겉에 마법사 협회의 로브를 걸쳤다. 다소 주목받긴 하겠지만 유행 지난 드레스를 입고 나갔다가 비웃음을 사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러고 보니 세실라는?”
“외출하셨어요.”
“언제?”
“사흘 전에요.”
일리아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아가씨께 드릴 선물을 구하러 간다고 하셨어요.”
“선물을… 구해?”
일리아는 괜히 불안해졌다.
그라니체 가문의 유일한 기사인 세실라는 어딘지 모르게 엉뚱한 구석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일리아가 넘어져서 울고 있는데 상처를 도려내야 한다며 검을 꺼내 든 적도 있었고, 생일 선물이랍시고 집채만 한 마수를 잡아 온 적도 있었다. 심지어 일리아가 아카데미를 조기 졸업 했을 때는 축하 선물이라며 정원의 꽃을 몽땅 뽑아 오는 바람에 엘레나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선물을 ‘구하러’ 나갔다고? 불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가씨.”
안 되겠다 싶어 일리아가 세실라를 수소문하려던 찰나였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세실라가 폴짝 뛰어 들어왔다. 깜짝 놀란 일리아는 몸을 퍼드덕거리며 그녀를 노려봤다.
“내가 창문으로 다니지 말라고 했지!”
“빨리 선물하고 싶은 마음에 그만…….”
“하아, 이번에는 또 뭘 가져왔는데?”
검은색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은 세실라가 헛기침을 하더니 일리아에게 무언가를 슬쩍 내밀었다.
“귀환 선물이에요.”
“이게 뭐……. 어?”
세실라가 내민 것은 은은한 보랏빛을 띠는 작은 보석이었다. 일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마정석?”
“아마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요.”
“어디서 구한 거야?”
“켈른산맥이요.”
일리아는 마정석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뭐 하러 그렇게 먼 데까지 다녀왔어?”
“저번에 말씀하셨던 게 생각나서요.”
“내가 전에 뭐라고 했……. 아!”
잊고 있었던 기억이 슬금슬금 되살아났다.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일리아는 켈른산맥으로 마수 토벌을 나섰다가 갑작스러운 폭우로 인해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비를 피할 동굴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 바로 마정석 채석장이었다.
마정석은 개당 수십 골드를 호가할 정도로 가치 있는 보석이었다. 즉, 마정석을 직접 채석하여 판다면 엄청난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
부푼 꿈을 안고 저택으로 돌아온 일리아는 에나와 세실라에게 마정석을 팔아 부자가 되겠다는 장대한 계획을 설명했다. 실제로 채석 업체를 알아보기도 했다. 잦은 파견과 에렉과의 연애로 깜빡 잊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세실라는 무려 3년 동안이나 그 말을 기억하고 있다가 일리아를 위해 그 먼 길을 다녀온 것이었다. 가슴이 뭉클해진 일리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세실라를 와락 끌어안았다.
“고마워, 세실라! 최고의 선물이야!”
세실라는 얼굴을 발그레 물들이며 서둘러 주머니를 뒤졌다.
“여기 더 있어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에요.”
주머니를 탈탈 털어 마정석을 한 움큼이나 꺼낸 세실라가 눈을 빛내며 일리아를 바라봤다. 마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를 보는 듯했다. 그에 일리아는 호탕하게 웃으며 세실라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정말 고마워. 아, 켈른산맥까지 다녀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푹 쉬고 있어.”
“어디 가시려고요?”
“의상실.”
“저도 갈게요.”
“괜찮아. 드레스만 맞추고 올 거야.”
“그래도요.”
세실라는 한사코 거절하는 일리아의 뒤를 따랐다. 피곤하지도 않은 것인지, 언제나처럼 꼿꼿한 모습이었다. 결국 일리아는 세실라와 함께 단골 의상실로 향했다.
작은 종이 달린 문을 열고 들어가자 단정한 드레스를 입은 의상실의 주인, 루네르가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
“일리아 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고마워, 루네르.”
“승전 기념 파티 때 입을 드레스를 맞추러 오신 거죠?”
“응. 겸사겸사 외출복도 몇 개 맞추려고.”
“이쪽으로 오세요.”
일리아를 응접실로 안내한 루네르는 공방에서 다양한 색상의 실크와 디자인 북을 가지고 돌아왔다.
디자인 북을 팔랑거리던 일리아는 괜히 울적해졌다.
‘이제 퍼프 슬리브 드레스는 입지 않는구나.’
일 년 동안 사교계의 유행이 너무 많이 바뀌었다. 가지고 있던 드레스는 거의 다 버려야 할 수준이었다.
“왜 그러세요?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니야. 다 너무 예뻐. 그냥… 버려질 드레스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서.”
“유행이 많이 바뀌었죠?”
“응. 그렇네.”
일리아는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그냥 루네르가 추천해 줘. 그중에서 고를게.”
“네. 맡겨 주세요!”
루네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탁자 위에 푸른색 실크와 하얀 레이스를 펼쳐 놓았다.
“일단 승전 기념 파티 드레스인데요. 저는 이 색상을 추천드리고 싶어요. 일리아 님의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과 아주 잘 어울릴 것 같거든요. 그리고 레이스는 이렇게…….”
루네르는 일리아가 세 벌의 드레스를 계약한 후에도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녀의 입담에 넘어간 일리아는 결국 애초에 계획했던 것보다 더욱 많은 드레스를 계약하고 나서야 의상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세실라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다음부터는 제가 상대할게요. 이러다 그라니체 가문이 거덜 나겠어요.”
“우리 가문이 그 정도로 가난하지는 않아, 세실라…….”
곧 엄청난 부자가 될 예정이기도 하고!
일리아는 마정석 채석장을 떠올리며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저택으로 바로 돌아가실 거죠?”
“응. 어차피 할 일도…….”
“일리아?”
일리아가 세실라와 함께 마차에 타려고 할 때였다.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잊으려고 노력해도 잊을 수 없었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일리아는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돌렸다.
“…에렉.”
아직은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 일리아의 마음을 모르는 건지, 에렉은 밝게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일리아.”
“…….”
“시간 괜찮으면 잠깐 얘기 좀 할까?”
일리아는 당연히 거절하려고 했다. 그러나 가슴 한쪽에 자리 잡은 일말의 미련이 끝내 그녀의 마음을 돌려세웠다.
“…세실라, 잠시만 다녀올게.”
“허튼소리 하면 코뼈를 확 부러뜨려 버리세요.”
“풋, 알겠어. 일단 마차에 가 있어.”
일리아는 에렉을 따라 근처 카페로 향했다. 주문은 언제나처럼 짙은 홍차와 커피였다.
에렉은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며 방긋 웃었다. 언짢아하면서도 순순히 따라온 것을 보니 일리아는 아직도 제게 미련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럴 만했다. 그동안 공들인 시간이 얼마인데.
그의 아버지인 마티어 로베르트 백작은 드래곤의 힘을 계승한 그라니체 가문의 핏줄을 원했다. 그래서 에렉은 의도적으로 일리아에게 접근하여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 결과 마음을 얻어 낸 것은 물론이고, 약혼 서약까지 받아 낼 수 있었다. 마티어는 드디어 로베르트 가문에서도 저명한 마법사를 배출할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변이 일어났다. 일리아가 테멜 왕국과의 전쟁에 차출된 것이다. 아직 결혼을 하기도, 아이를 가지기도 전이었기에 마티어와 에렉은 그녀가 전사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불안해졌다.
- 아제로스군이 얼마나 강한데요. 금방 끝날 겁니다.
- 그렇겠지?
- 그렇고말고요.
그들은 불안한 마음을 애써 밀어내며 서로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시간이 지났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일 년 가까이 이어졌고, 일리아가 전쟁 중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마티어는 아들의 파혼을 준비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약혼 상대를 물색했다.
그러다 눈에 띈 것이 바로 플로라 후작 가문이었다. 플로라 가문은 사업을 도와줄 투자자를 필요로 했고, 로베르트 가문은 그만한 재력을 갖추고 있었다.
‘마법사를 배출할 수 없다면 고위 귀족 덕이라도 봐야지.’
그렇게 생각한 마티어는 플로라 가문을 설득하여 빠르게 약혼까지 해치웠다. 에렉 역시 후작 가문과 맺어져서 나쁠 것은 없었기에 선뜻 마티어의 뜻에 따랐다.
그럼에도 에렉이 파혼한 일리아에게 살갑게 구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그녀가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황제로부터 직접 공치사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분간 사교계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 에스테반 공작과 그라니체 준남작에 관한 이야기로 떠들썩할 것이다. 그때 일리아와의 친분을 내세우면 많은 귀족들의 부러움을 살 수 있을 터였다. 사귀다 헤어졌음에도 돈독하게 지내는 경우는 웬만해선 없었으니까. 대인배라고 떠받들어질 생각을 하니 에렉은 벌써부터 어깨가 하늘 끝까지 치솟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섣불리 티를 내서는 안 되었다. 지금은 일리아의 기분을 풀어 주는 게 가장 중요했다. 에렉은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부드럽게 말했다.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야. 많이 걱정했거든.”
“걱정했다는 사람이 전쟁 중에 이별 통보를 해?”
일리아의 날 선 물음에 에렉은 살며시 울상을 지었다.
“미안해, 일리아. 하지만 그건 결코 내 의지가 아니었어. 아버지께서 강경하시고 플로라 가문에서도 계속 재촉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미안할 짓 한 건 알고 있어서 다행이네.”
“당연히 알지. 정말 미안해, 일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