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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6)화 (6/101)

6화 

“좋아. 일단 쉬도록 하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대신 그대도 여기서 쉬어.”

“네? 왜요? 제 막사에서 쉬면 안 됩니까?”

“혼자 있으면 자꾸 일에 손이 가서 말이야. 부탁을 했으면 책임도 져야지.”

“그, 그럼 안 되죠. 그럼요. 알겠습니다. 여기서 쉬겠습니다.”

강경하게 쉬라고 할 때와는 달리 당황한 듯한 일리아의 모습에 카일루스는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작은 미소에 순간, 막사에 깊게 드리워 있던 어두운 분위기가 베일이 벗겨지듯 환하게 걷혔다.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카일루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왜 그래?”

“…아닙니다.”

간이 의자로 자리를 옮긴 카일루스는 일리아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에서는 씁쓸한 풀내가 났다.

“다음부터는 무모하게 굴지 마.”

“…죄송합니다.”

“위급한 상황이 와도 도망칠 여력은 남겨 둬. 반드시 구하러 갈 테니까.”

일리아는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괜히 마음이 간질거렸다.

“그러고 보니 전에 약혼자가 편지로 이별 통보를 했다고 했지?”

“…네.”

“그대가 약혼했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일리아는 어깨를 가볍게 으쓱거렸다.

“따로 발표하지는 않았습니다. 약혼도 공증 없이 서약서만 주고받은 게 다였고요.”

“왜?”

“갑자기 출정 명령이 떨어지는 바람에 약혼식을 미룰 수밖에 없었거든요. 덕분에 공식적인 기록은 남지 않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죠.”

“그 약혼자 이름이 뭐야?”

“…에렉 로베르트입니다.”

일리아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별 편지를 받은 지도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건만, 아직도 불쑥불쑥 그가 생각났다. 당연했다. 에렉은 일리아가 처음으로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많이 좋아했었나 보네.”

“그럼요. 저를 처음으로 아껴 준 사람이었거든요.”

로맨스 소설 마니아답게 일리아는 항상 로맨틱한 연애를 꿈꿔 왔다. 그래서 연인이 생길 때마다 열과 성을 다하며 소설 속 주인공처럼 행복한 결말을 맺길 기대했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주어도 돌아오는 것이라고는 싸늘한 이별 통보가 다였다. 일리아의 전 연인들은 대부분 자신보다 뛰어난 그녀를 시기하고 질투했다. 개중에는 결혼하면 마법사단을 나와 내조에 전념하라는 헛소리를 지껄이는 이도 있었다. 그게 얼마나 큰 국가적 손실인 줄도 모르고.

그러나 에렉만큼은 달랐다. 그는 일리아를 시기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그녀의 모든 것을 존중해 주었다. 일리아는 따뜻하고 다정한 에렉과 함께라면 소설처럼 아름다운 해피 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역시 같은 마음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모두 허황된 꿈이었지만.

“제가 무사히 귀환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냅다 편지부터 보낸 것을 보면요.”

“아쉽지는 않아?”

“아쉽긴 하지만 다른 여자와 약혼한다는 남자를 붙잡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일리아는 미지근하게 식은 차를 한 번에 털어 넘겼다. 씁쓸한 풀내가 입 안을 가득 적셨다.

“앞으로 싹 잊을 겁니다. 제 인생을 위해서라도요.”

“잘 생각했어.”

일리아는 콧잔등을 긁적였다.

“제 얘기만 잔뜩 해 버렸네요. 죄송합니다.”

“괜찮아. 나름 흥미로웠어.”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제가 갔다고 바로 깃펜부터 잡으시면 안 됩니다!”

“알겠어. 가 봐.”

자리에서 일어난 일리아는 카일루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막사를 나섰다. 숨을 크게 들이쉬니 서늘한 밤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 * *

아제로스군은 테멜군의 생존자를 찾기 위해 보름 동안 인근 산을 모두 뒤졌다. 그 결과 꽤 많은 수의 생존자를 찾아낼 수 있었으며, 개중에는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도 있었다. 거센 저항을 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들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것인지 무기를 들고 있었음에도 하나같이 부리나케 도망치기 바빴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었기에 카일루스는 전열을 가다듬은 후 도망치는 테멜군의 생존자들을 쫓았다. 오랜 고립과 무리한 퇴각으로 금세 녹초가 된 테멜군은 속수무책으로 붙잡힐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결국 살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모두 포박하라!”

심문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들은 수만의 테멜군이 전멸한 게 사실이며 본국의 지원도 끊겨 타국으로 도망치기 위해 숨어 있었다고 실토했다.

카일루스는 그들의 증언을 토대로 테멜 왕국의 동향을 살폈다. 그리고 얼마 후, 테멜 왕국 측에서 휴전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왔다.

곧, 서한의 진위를 검토하는 회의가 열렸다. 카일루스는 연일 황실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전쟁의 향방을 가늠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드디어 논의를 마친 카일루스는 모든 병사들을 모아 놓고 당당하게 선포했다.

“황성으로 파발을 보내라. 귀환한다!”

“와아아아아아!”

우레와 같은 함성이 넓은 진지를 가득 울렸다. 길었던 전쟁이 마침내 끝이 났다.

【 사교계는 또 다른 전장입니다 】

승전보와 함께 수도로 돌아온 아제로스군은 황제의 아량으로 개선 행진의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일리아는 오색의 꽃가루가 휘날리는 중앙 광장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비로소 살아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물론 마족의 개입이나 포로의 처우에 관한 문제 등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해도 될 일이었다. 어차피 대회의에서 먼저 다루어질 테니까. 일리아는 그저 논의가 끝나고 공문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그대들의 용맹함에 경의를 표하지. 제국을 위해 애써 주어 고맙소.”

피곤한 몸을 이끌고 황제를 알현한 일리아는 전장에서 세운 공을 인정받아 준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또한 황제는 일리아에게 반년이라는 긴 휴가와 함께 개당 수십 골드에 달하는 마정석을 한 상자나 하사했다.

“축하해, 그라니체 준남작.”

카일루스가 일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각하.”

“당분간 푹 쉬도록 해.”

“그래야죠. 그동안 못 쉰 것까지 다 합쳐서 푹 쉴 겁니다.”

“잘 생각했어. 역시 내 귀염둥이다워.”

“각하!”

일리아가 ‘각하의 귀염둥이로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하고 헛소리를 내뱉은 이후로 카일루스는 틈만 나면 그녀를 ‘귀염둥이’라고 부르며 놀려 댔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던 일리아였지만, 카일루스가 지나치게 자주 귀염둥이라고 불러 대니 이제는 민망하다 못해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그대가 직접 한 말이잖아.”

“그래도 그 호칭은 조금… 아니, 아주 많이 그렇습니다! 차라리 전처럼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난 이쪽이 더 좋은데.”

일리아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언성을 높였다.

“이것도 귀염둥이로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제발요! 아주 부끄러워서 못 살겠습니다!”

카일루스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생각해 볼게. 이렇게 간곡히 부탁하는데 무시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니까.”

“하아, 정말…….”

“피곤할 텐데 이만 들어가 봐. 푹 쉬고.”

“네에……. 각하께서도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일리아는 카일루스를 뒤로하고 터덜터덜 황성을 나섰다.

“마차 대여소가 어느 쪽이었더라…….”

“일리아!”

얼른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어 마차라도 빌리려는데, 누군가가 저 멀리서 일리아를 불러 세웠다. 맑은 은빛 머리카락과 자색 눈동자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였다.

“클리드 오라버니!”

일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향해 달려갔다.

“어떻게 알고 왔어!”

“수도가 이렇게 떠들썩한데 모를 리가. 얼른 타. 가자.”

“데리러 와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

클리드와 함께 마차에 올라타자 마차는 곧 작은 소음을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리아는 클리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 * *

“도착했어, 일리아.”

일리아가 미처 잠에 빠져들기도 전에 마차가 멈춰 섰다. 일리아는 작게 하품하며 창밖을 바라봤다. 투명한 유리 너머로 웅장한 저택의 모습이 보였다.

그라니체 가문의 저택은 다른 귀족 가문의 저택과는 차원이 달랐다. 초대 황제인 엘리시오 그란디아가 제국의 수호자이자 가장 친한 친구인 드래곤에게 손수 하사한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시오는 스스로 금관을 쓰고 그 땅을 ‘아제로스’라고 명명하였으며, 드래곤에게는 ‘그라니체’라는 이름과 함께 거대한 저택과 영지를 하사했다. 그 전설 속의 저택이 바로 이것이었다. 초대 황제가 직접 설계하고 건축을 명한 저택이라 그런지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올 정도도 웅장했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지금은 저택이나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무려 일 년 만의 귀환이 아니던가. 가족들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일리아는 볼을 가볍게 두드려 잠을 물리치곤 마차에서 내려섰다.

“들어가자.”

“응!”

설레는 마음에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나 다녀왔어!”

“어머, 아가씨!”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보고 싶었어요, 아가씨!”

사용인들이 환호성을 터뜨리며 일리아를 맞이했다. 개중에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이도 있었다. 일리아는 그들의 엄청난 환대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고마워, 다들.”

“다친 곳은요? 식사는 제대로 하신 거예요?”

“얼굴이 반쪽이 됐잖아요!”

“하하, 다들 진정해. 난 괜찮으니까.”

“일리아!”

일리아가 사용인들과 재회의 기쁨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모여든 인파 사이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바로 일리아의 어머니인 엘레나였다.

엘레나는 언제나처럼 우아한 모습이었지만,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확연하게 야위어 있었다. 일리아는 이런저런 감정들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

“무사해서 다행이야. 정말 고생했다, 내 딸.”

일리아는 한달음에 달려가 엘레나의 품에 안겼다. 등을 토닥이는 따뜻한 손길에 감정의 둑이 무너진 듯 눈물이 터져 나왔다.

“다녀왔습니다…….”

일리아는 그렇게, 엘레나의 품에서 한참이나 뜨거운 눈물을 쏟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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