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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5)화 (5/101)

5화 

* * *

별동대가 출발하고 얼마 후, 산맥 전체가 거세게 요동쳤다.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 꾸역꾸역 튀어나오는 마물들을 보며 카일루스는 황급히 본대를 움직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테멜군의 진지는 완전히 초토화되었고, 수백의 별동대는 마물의 범람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목표를 잃은 마물들은 피를 갈구하며 본대를 급습했다.

그렇게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려던 그때, 갑자기 대지가 아귀를 벌리더니 마물 떼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익숙한 마력에 카일루스는 고개를 휙 돌렸다.

‘일리아!’

괜히 불안해진 카일루스는 본대의 지휘를 러셀에게 맡기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일리아는 멀지 않은 숲속에 있었지만, 불행히도 혼자가 아니었다. 일리아를 데려갈 심산인 것인지, 검은 로브의 괴한이 그녀의 손목에 마력 봉인용 수갑을 채우고 있었다.

카일루스는 즉시 검을 휘둘렀다. 검 끝에서 피어오른 하얀 검기가 괴한의 등을 사선으로 베어 냈다. 잘린 로브 자락이 허공에 휘날리고, 갑작스러운 기습에 놀란 괴한은 일리아를 내던지며 황급히 모습을 감췄다.

희미한 마력이 꼬리처럼 이어지며 괴한의 흔적을 알렸지만 카일루스는 굳이 그를 뒤쫓지 않았다. 지금은 일리아의 생사가 더욱 중요했다. 빠득, 하고 이를 간 카일루스는 핏빛 낙엽 위에 쓰러져 있는 일리아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일리아!”

일리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미약하지만,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빠르게 주변을 훑어 또 다른 생존자가 없음을 확인한 카일루스는 마력을 이용해 큰 소리로 외쳤다.

“전군 퇴각한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완패였다.

* * *

긴 꿈을 꾸었다. 연인에게 차이고 상관의 귀염둥이가 된 데다가 결국에는 마물들에게 둘러싸여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그런 꿈.

‘꿈은 개뿔.’

일리아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로 익숙한 회색 천막이 보였다.

‘아직 안 죽었네.’

몸을 일으키니 미약한 두통이 느껴졌다. 일리아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몸을 살폈다. 얼마나 누워 있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텅 비어 있던 마력이 어느새 충만하게 차올라 있었다.

“부단장님! 깨어나셨군요!”

그때, 물수건을 손에 든 레널드가 화색을 띠며 막사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머리 울리니까 조용히 말해.”

“죄송합니다…….”

“며칠이나 지난 거야?”

“오늘로 딱 일주일째입니다. 젤러에 의하면 마력 고갈로 인한 가수면 상태셨다고 하더군요.”

레널드는 일리아에게 물수건을 건네며 말을 이었다.

“이런 말씀 드리긴 조금 그렇지만, 너무 무모하셨습니다.”

“…나도 알아.”

확실히 터무니없는 짓을 벌이기는 했다. 마법사단의 부단장이라는 자가 전장 한복판에서 가수면 상태에 들다니. 만약 본대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일리아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선득해졌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십니까?”

“이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나저나 다들 무사해?”

“부단장님 덕분에 무사합니다.”

“다행이네. 각하께서는?”

일리아의 물음에 레널드는 몸을 흠칫 떨며 막사 밖을 힐끔거렸다.

“…막사에서 쉬고 계십니다.”

“쉬고 계시면 쉬고 계신 거지, 반응이 왜 그래?”

“그게…….”

아예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레널드는 일주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일리아에게 간략하게 설명했다.

“본대가 완전히 퇴각했을 무렵, 각하께서 부단장님을 안고 돌아오셨습니다.”

일리아를 막사에 데려다 놓은 카일루스는 당장 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테멜군이 진지를 버리면서까지 함정을 판 건 더 이상 전쟁을 이어 나갈 여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정찰병을 보내 테멜군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는 한편 고된 전투로 지친 아제로스군을 독려했다. 지지부진하게 이어져 온 전쟁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

“그래서 테멜군의 움직임은 잡았고?”

“그게… 아직입니다.”

“그렇겠지.”

“그래서 더 죽을 맛입니다.”

레널드는 고개를 휘휘 돌리며 주변을 살피다 조용히 속삭였다.

“그날 이후로 각하의 기세가 아주 흉흉하시거든요. 덕분에 다들 숨도 못 쉬고 삽니다.”

“평소에도 그러지 않으셨나?”

“어휴, 훨씬 심합니다. 부단장님께서도 아마 깜짝 놀라실 겁니다. 얼마나 어마무시한지…….”

“가 봐야겠네.”

일리아는 몸서리를 치는 레널드를 뒤로하고 간이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어, 아직 일어나시면 안 됩니다. 더 쉬셔야죠.”

“괜찮아. 다 회복됐어.”

“하지만…….”

“보고는 해야지.”

“보고서만 작성해서 주시면 제가 대신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내가 가야 돼. 드릴 말씀도 있고.”

긴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려 묶은 일리아는 매무새를 대충 정돈했다. 아직 안색이 파리하긴 했지만 못 봐 줄 정도는 아니었다.

“지, 진짜 가시려고요?”

“그래. 너도 네 할 일이나 해, 레널드.”

일리아는 곧장 카일루스의 막사로 향했다.

“각하, 일리아 그라니체입니다.”

“…들어와.”

일리아는 조심스럽게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레널드가 왜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이제 알겠네.’

지금의 카일루스는 그야말로 ‘철혈의 공작’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항상 여유가 넘쳤던 얼굴은 밀랍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전신에서는 날카로운 기세가 흘러나왔다.

게다가 눈빛은 또 어떤가. 태양 같던 황금빛 눈동자가 어둡게 침잠되어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한기가 스며드는 듯했다.

“앉아.”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안색을 살피며 그의 앞에 앉았다.

“몸은 괜찮나?”

“괜찮습니다.”

“보고는 나중에 받을 테니 일단 쉬고 있어.”

“거의 다 회복됐으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일루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그래도요. 감사합니다, 각하.”

일리아의 정중한 인사에 카일루스는 결국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은 어느새 죄책감으로 일그러진 상태였다.

‘각하께서도 자책하고 계시는구나.’

현장에서 대원들을 잃은 일리아도 그럴진대, 직접 명령을 내린 카일루스는 어떻겠는가. 그들의 죽음에 책임을 통감하고 있을 터였다.

지휘관이란 무릇 그런 것이었다. 참전한 모든 병사들의 목숨을 제 등에 짊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지하고, 신중하게 판단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건 전쟁이다. 변수는 언제나 존재하는 법이었다. 이번 기습의 변수는 마물의 존재였고, 그것은 일리아 역시 간과한 부분이었다. 이미 한차례 마물들과 혈전을 벌인 전적이 있었음에도 또다시 그런 상황이 오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방심이 불러온 오판이었다.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쉰 일리아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각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말해.”

“저희가 진지에 도착했을 때 테멜군은 이미 전멸한 후였습니다.”

“전멸했다고?”

일리아는 테멜군의 진지에서 보았던 광경을 설명했다. 엉망이 된 막사와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시신들, 그리고 진지를 가득 메우고 있던 피 웅덩이까지.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상처의 형태로 미루어 보아 별동대를 기습했던 마물들의 짓인 것 같습니다.”

인간계에 존재하는 마수들은 대개 늑대나 사자 같은 포유류 동물의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았다. 생존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변화한 결과였다.

그런데 별동대를 기습한 마물들은 머리에서 불을 내뿜는다거나 손톱을 채찍처럼 휘두르는 등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마력은 또 얼마나 불길하던지. 마력의 빛깔이 탁하다 못해 검붉은 빛을 띨 정도였다. 마치 일리아가 절벽에서 사로잡은 괴한처럼 말이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서 생각해 보면, 이번 기습 역시 마계와, 혹은 마족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 같은 편인 테멜군은 왜 전멸시킨 걸까요?”

“통제를 벗어났을 수도 있어. 그것들이 정말 마계의 마물이 맞는다면 웬만한 힘으로는 통제하기가 어려웠을 테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카일루스가 지도를 내려다봤다.

“일단 수색 범위를 좁혀야겠군. 생존자가 숨어 있을 법한 곳부터 뒤지는 게 좋겠어.”

“저도 돕겠습니다.”

“아니. 그대는 쉬고 있어. 도움이 필요하면 나중에 부를 테니까.”

“하지만…….”

“이제 막 병석에서 일어난 환자의 손을 빌릴 정도로 인력이 부족하지는 않아. 지금 당장 막사로 돌아가 쉬지 않으면 징계할 테니 얼른 돌아가.”

일리아에게 엄포를 놓은 카일루스는 러셀을 불러 새로운 명령을 전달하고 황실에 보낼 보고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또 일하시네.’

일리아는 분주하게 움직이는 깃펜을 눈으로 좇다가 넌지시 말했다.

“그런데 각하, 혹시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뭔데?”

“휴식은 제대로 취하고 계신 겁니까?”

“…당연하지.”

거짓말.

지금 카일루스의 몰골은 빈말로도 정상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눈은 붉게 충혈되어 실핏줄이 툭툭 불거져 있었고, 눈 밑은 거뭇하다 못해 썩어 문드러질 지경이었다. 그 때문에 잘생긴 얼굴이 사뭇 음침해 보였다.

‘저러고 돌아다니니까 병사들이 기겁을 하지.’

일리아는 군 내부의 분위기를 위해 기꺼이 나서기로 했다.

“수색 지휘는 제게 맡기시고 오늘은 푹 쉬십시오.”

“난 괜찮으니까 그대나 쉬어.”

“아니요. 오늘 꼭 쉬셔야 합니다.”

“괜찮다니까.”

“푹 쉬세요, 제발!”

“지금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카일루스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일리아는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각하의 귀염둥이로서 드리는 부탁입니다!”

“…….”

순간, 사각거리던 깃펜 소리가 멈췄다. 카일루스는 깃펜을 손에 쥔 채로 굳어 있었다. 마치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듯한 모양새였다.

그에 일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내뱉은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역효과가 난 듯했다.

‘어, 어쩌지?’

일리아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뻔뻔하게 밀어붙이거나, 실언했다고 싹싹 빌거나. 물론 어느 쪽이든 끝이 좋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던 일리아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이판사판이었다. 일리아는 양손을 맞잡으며 카일루스를 바라봤다.

“정말 걱정되어서 그럽니다. 하나뿐인 귀염둥이의 부탁이니 들어주시겠죠?”

뻔뻔한 일리아의 말에 카일루스는 깃펜을 내려놓으며 실소를 터뜨렸다. 처음에는 죽을상을 짓더니 이제는 잘도 이용해 먹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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