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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4)화 (4/101)

4화 

* * *

카일루스에게서 부상병의 치료를 도우라는 명을 받은 이후, 일리아는 하루도 빠짐없이 구호용 막사에 드나들며 치료에 전념했다. 덕분에 다음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모든 병사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날 수 있었다. 일리아가 부상병을 돌보던 마법사들의 무한한 신뢰를 얻은 것은 덤이었다.

‘이렇게 여유를 부려 보는 게 얼마 만인지!’

일리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끊으리라 다짐했던 로맨스 소설을 집어 들었다.

막사 안에 굴러다니던 서너 권의 책 중 그녀의 손에 잡힌 것은 바로 얼마 전에 읽었던 『당신이 아니면 안 돼!』였다. 일리아는 즉시 책을 집어 던졌다. 이놈의 책 때문에 큰일을 겪을 뻔한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이제는 제목만 봐도 화가 끓어올랐다.

‘뭐 시간 때울 거 없나.’

널브러진 책을 지그시 노려보던 일리아는 문득 레이븐에게 아직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걱정하실 텐데.”

일리아는 간이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몇 발자국을 채 떼기도 전에 뭔가에 발이 걸려 바닥에 철퍼덕 엎어지고 말았다.

엎어진 상태에서 고개만 슥 들어 올린 일리아는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좁은 막사 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피 묻은 옷가지가 이리저리 널려 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를 지옥으로 밀어 넣었던 술병 또한 한쪽 구석에서 처량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일리아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언제까지고 이런 돼지우리에서 생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에나가 없으니까 엉망이네.’

일리아는 피 묻은 옷을 하나씩 집어 들어 막사 밖에 차곡차곡 쌓아 놓기 시작했다. 그것이 태어나서 청소라고는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일리아의 유일한 청소법이었다.

그렇게 반쯤 치웠을 무렵, 엉망으로 구겨진 로브 사이에서 하얀 종이가 팔락거리며 떨어졌다.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에렉의 편지였다.

“이게 왜 아직도 여기 있어?”

분노에 눈이 돌아 버린 일리아는 씩씩거리며 편지를 지르밟았다. 그러자 일리아의 감정에 감응한 마력이 작은 불꽃을 피워 올려 구겨진 편지를 흔적도 없이 불태웠다.

“흥, 꼴좋다!”

일리아는 몸을 휙 돌려 막사를 나섰다. 은은한 잔불이 남아 있던 옷가지에 옮겨붙었다는 것도 모른 채.

* * *

“부단장님!”

강가에 앉아 찬 바람을 쐬던 일리아는 살며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서 부관인 레널드 메이헴이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야?”

“저거요, 저거!”

레널드는 사색이 되어 진지 쪽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 일리아는 희미한 잿빛 연기를 바라보며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저게 왜? 벌써 모닥불을 피우는…….”

“모닥불이 아니라 그냥 불입니다! 부단장님 막사에 불이 붙었다고요!”

“뭐, 뭐라고?”

일리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단 체이드가 막고 있기는 한데…….”

“알려 줘서 고마워!”

일리아는 레널드를 뒤로하고 막사를 향해 달렸다.

다행히도, 상황은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았다. 우연히 그녀의 막사 앞을 지나던 마법사, 체이드가 불이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방어 막을 쳐 놓은 덕분이었다.

체이드가 아예 불을 끌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일리아의 마력은 일반적인 마법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마법사단의 에이스인 체이드마저 불이 번지는 것을 막는 게 고작이었으니 오죽하겠는가.

일리아는 땀을 뻘뻘 흘리는 체이드에게 감사를 표한 후 가볍게 손을 휘둘러 불을 껐다. 이제 남은 것은 이 희미한 잿빛 연기를 모닥불로 위장하는 것뿐이었다.

“레널드, 장작 좀 가져와.”

“장작은 갑자기 왜…….”

“그런 게 있어. 아무튼 얼른……!”

일리아는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반쯤 타 버린 옷가지들을 가지고 나왔다. 장작과 함께 태워 버릴 속셈이었다.

그러나 불행은 언제나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법이었다.

“일리아 그라니체.”

돌연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는 숨을 들이켜며 천천히 돌아섰다.

“가, 각하…….”

카일루스가 하얗게 질린 일리아를 바라보며 한쪽 눈썹을 삐뚜름하게 치켜올렸다.

“당장 따라와.”

* * *

막사 안은 그야말로 폭풍 전야였다. 일리아는 침묵을 지키는 카일루스 앞에 얌전히 꿇어앉았다.

‘그냥 죽자. 죽는 거야, 일리아 그라니체.’

카일루스에게 다시는 사고를 치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던 것이 불과 며칠 전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사고를 친 것으로도 모자라 증거 인멸 현장을 들키기까지 했다.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일리아는 흙먼지가 가득한 막사 바닥을 내려다보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일리아 그라니체.”

“네!”

“전에 그대가 뭐라고 했었지?”

한기가 느껴지는 카일루스의 말에 일리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절대 사고 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또.”

“앞으로는 정신 꼭 붙들고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뭐지?”

“…죄송합니다.”

카일루스는 머리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러셀로부터 마법사단의 막사 쪽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카일루스는 ‘별거 아니겠지.’ 하고 생각하면서도 내심 불안했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연기는 화재로 인해 피어오른 것이었고, 불이 난 막사는 유능하면서도 덜떨어진 그의 부하, 일리아 그라니체의 것이었다. 다행히 빠르게 화재를 진압한 덕분에 큰 소란으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다수의 목격자가 존재하는 이상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시금 한숨을 내쉰 카일루스는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일단 막사부터 옮겨.”

“막사는 왜…….”

“앞으로 내 부관이 그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거야.”

“네, 네?”

카일루스는 멍하니 반문하는 일리아에게 눈을 번뜩였다.

“당연히 불만은 없겠지?”

“다, 당연히 없습니다! 당장 옮기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카일루스는 일리아의 눈앞에 종이 한 장을 팔락거렸다.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한다고 했었지?”

드디어 올 게 왔다!

일리아는 애써 눈을 감았다. ‘귀염둥이’라는 글자가 눈에 아프게 박혀 들었다.

“그게…….”

“설마 이제 와서 발뺌하지는 않겠지?”

일리아는 헛소리를 내지른 과거의 자신을 탓하며 중얼거렸다.

“발뺌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냥…….”

“그럼 이행해야지. 그대는 명망 높은 그라니체 가문의 마법사니까 공증받지 않은 계약도 잘 이행하리라 믿어.”

“…무, 물론입니다.”

카일루스가 일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귀염둥이.”

로맨스 소설 속에서는 달콤하기 그지없었던 애칭이 왜 이렇게 무섭게 들리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일리아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하나뿐인 귀염둥이가 되었다.

* * *

붉은 선혈이 튀고, 찢어질 듯한 괴성이 귓가를 울렸다. 일리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람으로 마물 떼를 밀어냈다.

‘대체 몇 마리나 있는 거야!’

오늘 아침, 정찰병으로부터 테멜군이 완전히 퇴각한 것 같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카일루스는 즉시 별동대를 조직하여 테멜군의 진지를 조사하게 했다.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던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러셀의 부담스러운 감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일리아는 가장 먼저 별동대에 자원했고, 지휘관으로서 수백의 대원과 함께 조사에 나섰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누군가가 꾸며 낸 함정이었다.

‘조금 더 신중하게 행동했어야 했는데…….’

산머리를 넘어 테멜군의 진지에 도착한 별동대는 그곳에서 끔찍한 참사를 마주했다. 진득한 피 웅덩이와 처참하게 찢겨 있는 시신들, 그리고 코를 찌르는 악취까지. 테멜군의 진지가 조용했던 것은 그들이 퇴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모두 죽임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선득해진 일리아는 즉시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별동대가 진지를 채 떠나기도 전에 불온한 기운을 품은 마물들이 사방에서 날아들었다. 별동대는 본대의 지원을 기다리며 맹렬하게 싸웠지만 마물들의 어마어마한 물량 공세를 이겨 내지 못했고, 결국 처참하게 살육당하고 말았다. 살아남은 이는 오직 일리아 하나뿐이었다.

“젠장, 젠장, 젠장!”

일리아는 마물의 먹이가 된 별동대의 시신을 일별하곤 근처에 떨어져 있던 검을 주워 들었다.

자꾸만 숨이 막히고 눈물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많은 동료를 무력하게 잃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함께 웃고 떠들던 이들이었다. 고작 마물에게 스러질 목숨들이 아니었다.

일리아는 그동안 자만하고 있던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짙은 자기혐오와 죄책감이 그녀의 가슴을 옥죄었다.

‘그래도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일리아는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여기서 무너져 버린다면 그녀를 지키다 죽어 간 다른 대원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최대한 마지막까지 발악하고 또 발악해서 그들의 원수를 갚아야만 했다.

숨을 고른 일리아는 마물을 하나씩 베어 내며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지난 전투에서처럼 마물을 조종하는 마법사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이며 달려오는 마물들 때문에 정신을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엄청난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이대로 마법사를 찾지 못하면 마물 떼는 일리아를 죽이고 본대를 급습할 터였다.

물론 수만의 대군이 쉽게 당하지는 않겠지만, 문제는 마물 떼의 불온한 마력이 대다수의 마법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이전처럼 수많은 사상자가 나올 수도 있었다. 앞으로의 전투를 위해서라도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일리아는 산머리를 넘기 시작하는 마물들을 힐끔 바라보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제는 선택을 해야 할 시간이었다.

‘이게 내 최선이야.’

이를 악문 일리아는 산을 넘는 마물들을 최대한 저지하며 마지막 남은 마력을 일시에 터뜨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터져 나온 푸른 마력은 곧 대지에 스며들었고, 지면이 쩌적 하고 갈라지면서 까맣게 밀려들던 마물 떼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괴성이 난무하던 산속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일리아의 의지에 따라 마물을 짓이긴 대지는 피 묻은 낙엽을 털어 내며 다시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하아, 끝인가…….”

일리아는 치밀어 오르는 피를 삼키며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이 일대의 마물을 전부 처리했으니 본대는 무사할 터였다. 이제 남은 일은 희생당한 대원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던 일리아는 작게 흐느끼며 핏빛 낙엽 위에 주저앉았다. 처참하게 찢긴 갑옷과 살점들이 뇌리에 아프도록 박혀 들었다.

“미안해…….”

지켜 주지 못해서. 혼자 살아남아서.

한참을 흐느끼던 일리아는 이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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