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퇴각하다 등 뒤에서 기습을 당하는 것보다는 나아. 최대한 버티고 있을 테니 빨리 처리하고 합류해.”
카일루스의 단호한 어조에 일리아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조심해.”
“각하께서도요.”
일리아는 바람 장막을 걷어 내고 서둘러 전장을 벗어났다. 감각을 넓게 펼치자 전장을 뒤덮은 마력 사이로 이질적인 마력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일리아는 마력의 흐름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검붉은 빛을 띤 그 마력은 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킨 일리아는 지체 없이 절벽을 올랐다. 그러나 탁한 운무가 절벽 위를 가득 메우고 있어 그자의 위치를 정확히 특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빨리 찾아야 하는데…….’
일리아는 절벽 끝에 서서 전장을 내려다봤다. 아제로스군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음에도 전황은 나아지지 않고 있었다. 초조해진 일리아는 아제로스 진영에 대규모 방어 마법을 펼쳤다. 방대한 마력이 푸른 빛을 터뜨리며 빠르게 전장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검은색 로브를 입은 누군가가 일리아를 향해 단검을 찔러 왔다. 서툰 손속에서 진득한 살기가 물씬 풍겼다. 일리아는 침착하게 몸을 뒤로 물리며 한 손으로는 단검을, 다른 한 손으로는 괴한의 멱살을 잡아챘다.
“무, 무슨!”
마력을 터뜨려 검날을 부순 일리아는 주춤거리는 괴한을 냅다 바닥에 내리꽂았다. 쿵!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괴한의 호리호리한 몸이 돌바닥에 처박혔다.
“으악!”
일리아는 부서진 검날을 집어 던지고 괴한의 오른손을 꾹 짓밟았다.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험악한 욕설이 들려왔다.
“너지?”
“무슨 소리야!”
“너 맞는 거 같은데.”
“으악! 아파, 아프다고!”
일리아는 괴한의 손을 짓이기며 절벽 아래를 힐끔 내려다봤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그가 고통에 몸부림치기 시작하자 마물들의 움직임이 확연하게 둔해졌다.
“젠장! 저리 비켜!”
일리아가 전장을 내려다보는 사이, 그녀의 발을 밀쳐 낸 괴한이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빠르게 수인을 맺었다. 곧이어 이질적인 마력이 거세게 소용돌이치면서 그의 뒤로 수십 개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주먹만 한 불꽃들은 저마다 불온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죽어라!”
핏빛 불꽃들이 일제히 일리아를 향해 날아들었다. 지면이 녹아내릴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었지만 일리아는 당황하지 않고 마력을 끌어올렸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마법전이라면 이골이 난 그녀다. 고작 이 정도에 겁을 먹을 시기는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일리아는 마법 수식을 외며 손을 힘껏 휘둘렀다. 곧 그녀의 손에서 푸른 돌풍이 터져 나오며 날아드는 불꽃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거센 바람은 일리아의 의지에 따라 세차게 회전하며 자연계의 마력을 흩트려 놓았고, 동력을 잃은 불꽃은 피직 하는 소리와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체 뭐야, 저 여자!’
괴한은 몸을 흠칫 떨며 식은땀을 흘렸다.
처음 기습을 감행했을 때만 해도 쉽게 죽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큰 오산이었다. 푸른 제복을 입은 아제로스군의 마법사는 연약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엄청난 괴물이었다.
세상 어느 마법사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다중으로 마법을 펼치지는 못한다. 그런데 저 모습은 대체 뭔가. 전장에 대규모 방어 마법을 펼친 것으로도 모자라 마력을 갑옷처럼 두르고 그의 마법을 손쉽게 파훼하기까지 했다.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마계의 마법으로 펼친 마법이었다! 어떻게 감히 인간 따위가 마계의 마법에 대적할 수 있는 거지?”
“마계의 마법이라고?”
괴한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떨렸다.
“너, 너 대체 정체가 뭐야!”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마계의 마법이라니?”
“이럴 수는 없어! 내가 이 힘을 얻기 위해 무슨 대가를 치렀는데!”
패닉 상태에 빠진 괴한은 연신 고개를 내저으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에 더는 대화가 어려울 것 같다고 판단한 일리아는 괴한을 사로잡아 카일루스의 앞에 데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찝찝하긴 했지만, 마계에 관한 것은 나중에 추궁해도 될 일이었다. 일단은 전투를 끝내고 전열을 가다듬는 게 우선이었다.
“그쪽 사정은 내 알 바 아니고. 나랑 같이 좀 가 줘야겠어.”
“이, 이 괴물!”
괴한이 손을 휘적거리며 도망가려는 기색을 보이자 일리아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쓰지 마. 어차피……. 아, 잠깐. 요새 기분도 별로였는데.”
일리아의 자색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딱 좋은 게 나타났잖아?”
괴한의 퇴로를 차단한 일리아는 방긋 웃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푸른 궤적이 허공에 수놓일 때마다 청량한 타격음과 함께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 *
카일루스가 잔뜩 웅크린 ‘무언가’를 바라보며 못마땅해하는 얼굴로 물었다.
“이거 사람 맞아?”
“네. 맞습니다.”
“왜 이렇게 피떡이 되어 있어?”
“…제압하는 과정에서 다툼이 조금 있었습니다.”
일리아의 말에 모두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만큼 괴한의 몰골은 처참했다. 검은 로브는 터져 나온 피로 축축해진 지 오래였고, 얼굴은 엉망진창으로 얻어 터져 원래의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얼마나 자비 없이 때렸기에 저 지경이 되었을까. 병사들은 몸을 부르르 떨며 시선을 돌렸다.
“테멜인입니다. 이 남자가 마물을 조종하고 있었습니다.”
일리아는 그들을 못 본 체하며 말을 이었다.
“왕국군 소속 마법사인 것 같습니다. 자세한 건 조사를 더 해 봐야…….”
일리아가 괴한을 바라보자 그는 눈에 띄게 몸을 떨며 고개를 떨구었다.
“…누가 보면 내가 나쁜 짓이라도 한 줄 알겠어.”
일리아는 꿇어앉은 괴한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치유 마법을 시전했다. 그녀의 손에서 피어오른 푸른 빛이 곧 괴한의 상처에 스며들었고, 흉하게 부어터진 얼굴을 서서히 치유했다. 바닥에 쓸려 생긴 자잘한 생채기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괴한은 경악하며 일리아를 휙 올려다봤다.
“치, 치유 마법까지 쓸 줄 안다고? 진짜 괴물이었잖아!”
“뭐? 치료해 줘도 난리야! 이걸 그냥!”
“으악! 이 괴물이 사람 잡네!”
그때 카일루스가 주먹을 붕붕 휘두르는 일리아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이 남자는 일단 막사에 구금해.”
“알겠습니다.”
“일리아 그라니체. 그대는 따라오고.”
카일루스의 막사로 끌려간 일리아는 또다시 한바탕 혼이 났다.
“보고 시작해.”
“네!”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눈치를 살피며 절벽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보고했다.
“마계의 마법이라고?”
“네. 일단은 심문을 해 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마족이 연관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마족은 머나먼 과거에 존재했던 전설 속의 종족 중 하나였다. 건국 신화에 따르면 마족은 타고난 마법 실력을 이용하여 인간계를 잔혹하게 지배했다고 한다. 인간들은 마족의 지배에 굴복하거나 대항하면서 힘든 생활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대륙이 피와 눈물로 물들어 갈 무렵, 마침내 구세주가 나타났다. 바로 아제로스 제국의 초대 황제인 엘리시오 그란디아였다. 새하얀 신검을 들고 나타난 엘리시오는 드래곤과 함께 마족 토벌에 앞장섰고, 수많은 전투 끝에 마침내 마족을 마계로 몰아낼 수 있었다.
그 이후, 엘리시오는 마족의 피로 오염된 대륙을 정화하고 국가를 세워 인간계의 첫 번째 황제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건국 신화에 적혀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과거의 잔재가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카일루스 역시 일리아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끼리 판단할 일은 아닌 것 같군.”
“그럼…….”
“일단 심문부터 하고, 결과는 나흘 내로 가져오도록 해. 보고서는 내가 보낼 테니까.”
“알겠습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긴 카일루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일리아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오늘은 수고 많았어. 이만 돌아가 쉬어.”
“…네. 각하께서도 푹 쉬세요.”
카일루스의 막사를 나온 일리아는 그의 손이 닿았던 어깨를 살살 문질렀다. ‘수고 많았다.’라는 말이 이렇게 뭉클한 것이었던가.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 * *
일리아는 주어진 나흘 동안 괴한을 구슬리기도 하고 강하게 압박하기도 하며 정보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겁에 질린 얼굴로 ‘대가를 치르고 마계의 마력을 얻었다.’고만 할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마족에 대해 대놓고 물어도 상황은 같았다. 마치 금제가 걸려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섣불리 입을 열게 했다가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리라.
그렇다고 마법을 이용해 금제를 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작 심문을 위해 마력을 소모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필시 다음 전투에 영향이 갈 터였다.
‘어쩔 수 없지.’
일단은 전쟁을 끝내는 게 우선이라고 판단한 일리아는 그동안의 상황을 취합해 보고서를 쓰고 마법사들에게 그의 감시를 맡겼다.
그리고 며칠 후.
“아직도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고?”
“네. 그렇습니다.”
카일루스는 탐탁지 않아 하는 얼굴로 보고서를 내려놨다.
벌써 마지막 전투로부터 열흘이 훌쩍 지났다. 그동안 카일루스는 주기적으로 정찰병을 보내 테멜군의 진지를 살피게 했다. 그리고 오늘, 정찰병으로부터 뜻밖의 보고를 받았다. 테멜군의 진지가 며칠째 쥐 죽은 듯이 고요하다는 보고였다.
그들은 열흘이 넘는 기간 동안 불을 피우지도, 정찰을 보내지도 않았다고 했다. 심지어 기습의 우려가 있는 한밤중에도 말이다. 수상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일단 조금 더 접근해 봐.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돌아오고.”
“알겠습니다.”
보고를 마친 정찰병이 막사를 나서고, 곧이어 카일루스의 부관인 러셀 브런트가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은 별일 없었나?”
“별일이라고 하시면……. 아, 한 가지 있습니다.”
막 깃펜을 집어 들려던 카일루스가 손을 허공에 멈춘 채 러셀을 올려다봤다.
“뭔데?”
“구호용 막사를 담당하던 마법사들을 전부 개인 막사로 돌려보냈습니다.”
“부상병들은 어쩌고?”
“오전에 그라니체 님께서 모두 치료하셨습니다.”
“그 많은 인원을 다?”
러셀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