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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2)화 (2/101)

2화 

“그대가 무슨 짓을 했는지 같이 보면 되겠군.”

카일루스는 주저 없이 영상석을 발동시켰다. 곧 짙푸른 색의 수정이 밝게 빛나며 지난밤의 악몽을 고스란히 재현해 냈다.

- 에렉 로베……. 으악!

일리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러고 보니 카일루스는 돈이 많다 못해 썩어 나는 고위 귀족 중 하나였다. 음성까지 기록할 수 있는 영상석을 가지고 있는 건 당연했다. 덕분에 일리아는 더 이상 발뺌할 수 없게 되었다.

- 우욱…….

쾅!

자신의 적나라한 만행에 안절부절못하던 일리아는 결국 영상석을 세게 내리쳐 부숴 버렸다. 마력이 가득 담긴 일격이었기에 개당 수백 골드를 호가하는 자그마한 수정은 그대로 산산조각이 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 기억이 좀 나?”

파국을 알리는 종소리가 일리아의 머릿속을 세차게 울렸다. 일리아는 카일루스의 뜨거운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그,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어디 한번 설명해 봐.”

마치 제대로 설명하지 않을 시에는 각오하라는 듯한 말투였다.

카일루스의 무시무시한 분위기에 지레 겁을 먹은 일리아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냅다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각하! 죽으라는 것 빼고는 무슨 벌이든 달게 받을 테니 한 번만 봐주십시오!”

“아니. 지금 그대가 해야 할 말은 그게 아니야.”

“그, 그럼…….”

“설명해. 제대로.”

일리아는 카일루스를 올려다보며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솔직하게 말씀드려야…겠죠?”

“당연하지.”

“그게, 그러니까…….”

한참을 우물쭈물거리던 일리아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모든 것을 실토했다. 다른 영애와 바람이 난 약혼자가 고작 편지 한 장으로 이별을 통보해 왔고, 분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가방 안에 숨겨 놓았던 술을 마셔 버렸다고 말이다.

“술이라고?”

“전쟁에서 승리하면 마시려고 가져왔습니다. 아, 물론 지금까지는 단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셨군. 그것도 어제.”

“…죄송합니다.”

“하아, 그대는 정말…….”

카일루스는 가만히 머리를 짚었다.

아무리 소강상태라고는 하나 전장에서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린 것은 명백히 군법으로 다스려야 할 중죄였다. 그러나 카일루스는 일리아의 처벌을 쉬이 결정하지 못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일리아는 아제로스군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이기 때문이었다.

드래곤의 후손이자 현존하는 모든 마법에 능통한 천재 마법사. 그게 바로 일리아 그라니체였다. 지금처럼 전황이 좋지 않은 상황에 그녀를 징계한다면 필시 다음 전투에도 영향이 미칠 터였다.

‘그렇다고 징계를 안 할 수도 없고.’

카일루스는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일리아 그라니체.”

“네…….”

“그대의 행동은 명백한 군법 위반이다.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원래는 군사 재판을 열어 징계하는 게 마땅하나 전시라는 특수성과 지금까지 세운 공을 인정하여 약식으로 처리하고 끝내겠다.”

카일루스의 말에 일리아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정말입니까?”

“그래. 대신, 봐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명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당분간 부상병의 치료를 돕도록 해. 일손이 많이 모자란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이제 일어나.”

일리아가 몸을 벌떡 일으키자 카일루스는 조용히 그녀에게 물컵을 건넸다. 일리아는 쭈뼛거리며 물컵을 받아 들었다. 투박한 컵에는 노란 찻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속부터 풀어.”

“감사합니다, 각하!”

“또 사고를 쳤다가는 웬만한 징계로는 안 끝날 줄 알아.”

“절대, 절대 안 그러겠습니다! 어제는 그놈…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앞으로는 정신 꼭 붙들고 있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리아의 말에 카일루스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제정신이 아니면 또 그럴 거라는 소리로 들리는데.”

“절대 아닙니다!”

“또 그러면 어쩔 건데?”

“또, 또 그러면…….”

일리아는 찻물을 홀짝거리며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고작 변명거리 하나도 생각해 내지 못했던 머리가 이제 와서 제대로 굴러갈 리 없었다.

‘아씨, 꼭 이럴 때!’

또다시 침묵이 이어지자 카일루스가 눈썹을 슬쩍 치켜올렸다. 냉랭해지기 시작하는 분위기에 일리아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대로 적절한 처벌을 떠올리지 못하면 다음에는 정말로 군사 재판에 회부될 수도 있었다. 그것만큼은 피해야 했다.

‘생각해라, 일리아. 생각해. 뭐든 생각해야 돼!’

찰나의 순간. 잔뜩 뒤엉킨 머릿속으로 짧은 문구 하나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얼마 전에 책에서 읽었던 대사였다.

“또 그러면 다음에는…….”

일리아는 눈을 질끈 감으며 외쳤다.

“평생 당신만의 귀염둥이가 되겠습니다!”

그 책이 하필이면 로맨스 소설이었다는 게 문제였지만.

일리아는 눈을 부릅뜨며 입을 틀어막았다. 아무리 다급해도 그렇지 로맨스 소설의 대사를 인용할 건 뭔가.

‘그것도 이딴 쓰레기 같은 대사를!’

『당신이 아니면 안 돼!』라는 제목의 그 소설은 남자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여자 주인공을 유혹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담은 단편 소설이었다.

남자 주인공은 온갖 방법을 이용해 여자 주인공을 유혹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만다. 그에 상심한 남자 주인공은 한참을 방황하다 결국 겉치레를 버리고 진심을 담아 고백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때 내뱉은 고백의 말이 바로 이것이었다.

- 평생 당신만의 귀염둥이가 되겠습니다. 부디 제 마음을 받아 주십시오!

지금 같은 상황에 왜 하필 이 대사가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망했다는 것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일리아는 가만히 물컵을 내려다봤다. 이 투박한 컵을 머리로 깨면 적어도 이틀은 기절해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저질러 버려?’

일리아가 물컵의 두께를 가늠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만 있을 때였다. 돌연 바람 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뜻 웃음을 참는 소리 같기도 했다.

일리아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뜻밖에도, 화를 낼 줄 알았던 카일루스는 얼굴을 가린 채 웃음을 참고 있었다.

“…각하?”

한참 동안 헛기침을 하던 카일루스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말했다.

“그대가 내 ‘귀염둥이’를 자칭할 수 있을 정도로 귀엽다고 생각하나?”

“그, 그게 아니라 갑자기 소설이……. 아니, 대사가……. 제가 실언했습니다. 제발 잊어 주세요…….”

당황한 일리아가 울먹거리자 카일루스는 턱을 괴며 씩 웃었다. 하얀 얼굴에 걸린 미소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아니, 그렇게 하지.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대는 내 ‘귀염둥이’가 되는 거야. 설마 그라니체 가문의 마법사가 한 입으로 두말하지는 않겠지?”

이어지는 말은 전혀 아름답지 않았지만.

“실언했다고 했잖습니까! 아니, 애초에 귀염둥이가 뭔 줄 알고요!”

“충실한 부하?”

막 틀린 말은 아니었다. 소설 속의 남자 주인공 역시 여자 주인공의 말이라면 껌뻑 죽지 않았던가. 부하나 연인이나. ‘사랑’이라는 감정만 빼면 그게 그거였다.

하지만.

‘너무 쪽팔리잖아! 어쩌다 저런 게 떠올라선!’

일리아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욕지거리를 삼키는 동안 카일루스는 착실하게 빈 종이를 꺼내어 무언가를 작성했다. 그것은 무려 계약서였다.

[일리아 그라니체는 또다시 문제를 일으킬 경우 평생 카일루스 블레어 에스테반의 귀염둥이가 된다.]

일리아는 기함하며 손을 내저었다.

“자, 잠깐만요! 정말 그걸로 하시려는 겁니까?”

“그대가 똑바로 처신하기만 하면 돼. 그럼 무서울 거 없지 않나?”

“다른 처벌로 바꿔 주시면 안 됩니까?”

“그럼 재판으로…….”

“서명하겠습니다! 그럼요! 서명하고말고요!”

어차피 일리아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애초에 잘못한 것은 그녀였으니까.

“좋아. 서명했으면 이만 돌아가 봐. 곧 브리핑이 있을 테니 준비하고.”

“알겠습니다…….”

울적한 얼굴로 물컵을 내려놓은 일리아는 서둘러 그녀의 전용 막사로 향했다. 그러고는 난장판이 된 막사를 바라보며 굳게 다짐했다.

술 끊자.

…로맨스 소설도 끊자.

* * *

“전방에 이상한 형태의 마물들이 포진해 있습니다!”

“테멜 왕국군이 독을 푼 것 같습니다. 물러나야 합니다!”

“하늘에서 기습입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보고에 일리아는 정신없이 움직이며 전장을 살폈다.

갑자기 전장에 뛰어든 기묘한 형태의 마물들은 마치 뛰어난 지휘관의 명령을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교하고 조직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덕분에 승기를 잡고 있던 아제로스군은 전선을 물릴 수밖에 없었고, 테멜군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맹렬하게 진군했다.

일리아는 무서운 기세로 들이닥치는 테멜군을 바람으로 밀어내며 카일루스에게 다가갔다.

“각하, 퇴각해야 합니다. 전황이 좋지 않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물들은 죽은 테멜군의 빈자리를 메우며 끊임없이 습격을 감행했다.

물론, 그것뿐이었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나빠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번 전투의 패인은 마물 떼가 내뿜는 불온한 마력이 아제로스 진영에 영향을 미치면서 마법사들의 지원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 결과 수많은 병사가 다치고 죽었다. 더는 사상자가 나오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이제는 퇴각하여 전열을 가다듬을 때였다.

그러나 일리아의 다급한 권유에도 카일루스는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안 돼. 그럼 진지뿐만 아니라 근처 민가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어.”

“그래도 물러나야 합니다. 마력의 흐름이 심상치 않습니다.”

카일루스는 즉시 감각을 넓혔다. 곧 자연계의 마력 사이로 이질적인 마력이 그물처럼 엉켜 있는 것이 느껴졌다. 처음 느껴 보는 유형의 마력이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마물들을 지휘하는 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더 위험해지기 전에 퇴각을…….”

“잠깐.”

카일루스는 피 묻은 칼을 털어 내며 일리아를 빠르게 훑었다. 푸른 제복에 붉은 얼룩이 묻어 있긴 했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럼 그자는 그대에게 맡기도록 하지.”

“네?”

“근처에 있을 거야. 찾아서 처리해. 사로잡으면 더 좋고.”

“하지만 제가 이곳을 떠나면…….”

아제로스군은 현재 일리아가 만들어 낸 거대한 바람 장막에 보호받고 있었다. 만약 일리아가 그자를 찾기 위해 자리를 뜬다면 테멜군은 물론이고 마물들까지 순식간에 밀어닥칠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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