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공작님의 귀염둥이가 되었습니다 】
전투를 마치고 막사로 돌아온 일리아는 피로 얼룩진 로브를 구석에 대충 던져 놓고 간이침대에 누웠다. 긴장이 풀리니 극도의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이러다 정말 죽겠어.’
일리아는 눈을 감은 채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며칠째인지 몰랐다. 수도 없이 밤을 지새운 탓에 정신이 혼미했다. 눕기만 하면 전투가 터지고 기습당했다는 보고가 날아들어 잘 시간은커녕 마음 놓고 쉴 시간조차 없었다.
거기에 더해 오늘은 마수마저 창궐하는 바람에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급하게 뛰어나가야만 했다. 모든 속성 마법에 능통하다는 이유로 전방과 후방을 넘나들며 얼마나 고생했는지. 덕분에 일리아는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말았다. 이제는 정신마저 한계에 달할 지경이었다.
“에렉은 뭐 하고 있을까?”
가만히 누워서 숨을 고르던 일리아는 문득 사랑하는 연인에게 오랫동안 편지를 보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랜만에 편지라도 써야겠다.’
일리아는 간이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편지지를 꺼냈다.
“그라니체 님, 계십니까?”
일리아가 막 편지의 서두를 적었을 무렵이었다. 막사 밖에서 익숙한 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는 서둘러 매무새를 정돈하고 천막을 들췄다.
“무슨 일이야?”
“편지입니다.”
“편지?”
병사는 일리아에게 단단하게 봉인된 두 통의 편지를 건네주었다.
“지난주에 도착한 편지인데… 늦게 전달드려 죄송합니다.”
“괜찮아. 요새 많이 힘들었잖아. 고마워.”
일리아는 옅게 웃으며 편지를 받아 들었다. 두 개의 봉투에는 각각 아버지인 ‘레이븐 그라니체’와 연인인 ‘에렉 로베르트’의 이름이 정갈하게 적혀 있었다.
일리아는 레이븐의 편지를 탁자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 두고 에렉의 편지를 먼저 펼쳤다.
[친애하는 일리아에게
네가 수도로 돌아오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언제 돌아올지 몰라서 이렇게 편지를 보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다음 달에 플로라 영애와 약혼하기로 했어. 그러니까 우리의 약혼 서약은 파기해 줬으면 해. 따로 발표한 것도 아니고 공증을 받은 것도 아니었으니 기록은 남지 않을 거야. 그래도 위자료는 섭섭지 않게 보낼게. 그 부분은 걱정하지 마.
전장에서 고생하는 와중에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정말 미안해. 그리고 그동안 고마웠어.
무운을 빌게.]
일리아는 허탈한 얼굴로 편지를 떨어뜨렸다.
달콤한 사랑의 말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에렉은 평소에도 최근에 무슨 사업을 성공시켰는지, 어느 영식과 사냥을 했는지 등 본인의 자랑이나 근황을 늘어놓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성의 없는 이별 통보를 기대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심지어 다른 누구도 아닌, 크리스틴 플로라에게 그를 빼앗기는 결말이라니. 일리아는 사교 모임에서 마주칠 때마다 도도하게 굴던 크리스틴을 떠올렸다. 괜히 속이 뒤틀리는 듯했다.
귀족 간의 약혼은 오로지 사랑 하나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일리아 역시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은가.
‘적어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기다려 줬어야지!’
이를 갈던 일리아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레이븐의 편지를 집어 들었다.
[귀여운 일리아
전장에서 다치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되는구나.
오늘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이유는 로베르트 영식에 관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란다. 로베르트 영식이 최근에 중대한 일을 맡아 수도를 떠나 있을 예정이라고 하는구나. 워낙 중대한 일이라 사사로이 편지를 남기기도 어려울 듯하니 너도 공연히 신경 쓰지 말고 전쟁에만 집중하거라.
얼른 보고 싶구나.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란다.]
편지를 모두 읽은 일리아는 간이침대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레이븐의 배려에 눈물이 날 것 같다가도, 에렉을 떠올리면 속에서 천불이 났다.
‘이럴 때 술이라도 있으면 좋을……. 잠깐.’
간이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막사를 서성이던 일리아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옷가지 사이로 후줄근한 짐 가방이 보였다.
일리아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짐 가방 안으로 스르르 손을 미끄러뜨렸다. 가방 안을 휘적거리자 곧, 작은 위스키병이 손에 잡혔다.
‘전쟁이 끝나면 마시려고 숨겨 둔 거였는데…….’
피로와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니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갈증이 났다.
“인생 뭐 있어. 안 들키면 그만이지!”
일리아는 망설임 없이 위스키를 들이켰다. 독한 위스키가 목을 태울 듯이 넘어갈 때마다 에렉을 향한 분노가 더욱 활활 타올랐다.
“에렉 로베르트! 내가 살아 돌아가기만 해 봐!”
빈 병을 내던진 일리아는 한참이나 허공에 욕지거리를 주절거리다가 막사를 나섰다. 술기운을 날리기 위해서였다.
불과 얼마 전에도 아제로스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기사를 곤죽으로 만들었다가 한바탕 혼이 났던 일리아다. 고작 주먹다짐을 한 것만으로도 그렇게 혼났는데 만약 술을 마셨다는 것을 들키기라도 하는 날에는 적이 아니라 상관에게 죽을 수도 있었다. 이제 막 에렉에 대한 복수 의지를 다잡은 참이 아니던가. 일리아는 그런 허무한 최후를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다.
막사 그늘에 앉은 일리아는 가만히 숨을 골랐다.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지 눈앞이 빙빙 돌고 속이 메슥거렸다.
‘반만 마실 걸 그랬나…….’
애써 눈을 깜박거리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술이 깨기는커녕 취기만 짙어졌다.
“안 되겠다. 세수라도 해야지.”
일리아는 로브를 깊게 눌러쓰곤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에 어둑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검은 그림자가 툭 튀어나와 일리아를 스쳐 지나갔다. 일리아는 눈을 부릅뜨며 그림자가 지나간 자리를 살폈다. 체형이나 걸음걸이가 에렉과 무척이나 흡사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닐 거야. 아닐 건데…….’
술 때문에 이지가 흐트러진 탓일까. 에렉이 이곳에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리아는 천천히 그림자의 뒤를 쫓았다. 그러나 보초의 눈을 피해 한참을 돌아다녔음에도 에렉은커녕 에렉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찾아낼 수 없었다.
결국 으슥한 나무 아래에서 걸음을 멈춘 일리아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려 한구석에 우뚝 솟아 있는 막사를 바라봤다. 에렉은 평소 크고 화려한 것이라면 사족을 쓰지 못했다. 만약 에렉이 어딘가에 숨었다면 분명 저 막사 안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혼자서 결론을 내린 일리아는 망설임 없이 천막을 걷어 내고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에렉 로베……. 으악!”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검을 밟고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다행히도 막사 안에 있던 누군가가 일리아를 잡아 주어 볼품없이 넘어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몸이 이리저리 흔들린 탓에 욕지기가 치밀었다.
‘토할 것 같아…….’
일리아는 숨을 몰아쉬며 메슥거리는 속을 달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아무리 숨을 골라도 한번 몰아닥친 토기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우욱……!”
“이봐, 잠깐!”
일리아는 결국 그녀를 잡아 준 상대의 가슴팍을 붙잡고 저녁으로 먹었던 무언가를 거하게 토해 냈다. 그러고는 당황해하는 낮은 목소리를 끝으로 완전히 정신을 놓아 버렸다.
아아, 죽고 싶다…….
* * *
- 이제 그만 파혼해 줬으면 해.
크리스틴을 품에 안은 에렉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 나는 플로라 영애를 사랑해.
에렉은 부드럽게 웃으며 크리스틴의 꽃잎 같은 입술에 입을 맞췄다.
‘어떻게 꿈마저도 이렇게 거지 같을 수가 있는 건지.’
울컥한 일리아는 얼굴을 와락 구기며 에렉에게 주먹을 뻗었다. 그러나 일리아의 주먹은 에렉에게 닿지 못했다. 그가 한 손을 들어 올려 그녀의 공격을 가볍게 막아 냈기 때문이다.
일리아를 향해 시선을 돌린 에렉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신 차려.”
일리아는 눈을 번쩍 떴다. 흐릿한 시야로 익숙한 회색 천막이 보였다.
“여기는…….”
“내 막사야.”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린 일리아는 돌연 숨을 들이켰다.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황금빛 눈동자를 형형하게 빛내며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눈이 부실 정도로 잘난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고, 공작…….”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일리아는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살벌한 눈빛에 입 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식은땀이 흘렀다.
‘공작이 왜 여기서 나와!’
카일루스 블레어 에스테반.
지금 일리아의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에스테반 공작 가문의 주인이자 이번 전쟁의 총사령관이었다. 서늘한 분위기와 칼같은 성격 때문에 세간에서는 ‘철혈의 공작’이라고도 불리며 유일한 방계 황족으로서 황제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기도 했다.
‘난 죽었다!’
일리아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 많은 막사 중에서 하필이면 상관의 막사에 쳐들어올 건 뭔가. 간이 부어도 단단히 부은 모양이었다.
“일리아 그라니체.”
“네!”
“설명해.”
차가운 카일루스의 목소리에 일리아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을 골랐다. 그러나 완전히 엉켜 버린 머리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해내지 못했다.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떠올리지 못한 일리아는 결국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불편한 침묵이 속절없이 이어졌다. 이제는 뭐라도 이야기할 법하건만, 일리아는 눈만 이리저리 굴릴 뿐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없던 인내심까지 동원해 가며 일리아의 대답을 기다리던 카일루스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제 일은 기억하나?”
“아니요. 기억 안 납니다.”
사실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저 꼴을 만들어 놓고 기억이 안 난다고?”
카일루스가 눈짓으로 한쪽에 대충 쌓아 둔 옷 더미를 가리켰다. 그것들은 알 수 없는 무언가로 잔뜩 얼룩져 있었다. 끔찍하다 못해 처참한 그 모습에 숙취로 엉망이 된 일리아의 속이 더욱 역해졌다.
슬쩍 고개를 돌린 일리아는 일단 발뺌하기로 했다.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기억 안 난다고?”
“네. 안 납니다.”
일리아가 계속해서 모르쇠로 일관하자 카일루스는 덤덤히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바로 영상석이었다.
‘이런 망할!’
영상석은 마력의 결정체인 마정석을 가공하여 만든 것으로, 일정 범위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기록할 수 있는 고급 아티팩트였다. 질 좋은 마정석을 사용하면 영상뿐만 아니라 음성까지도 완벽하게 담아낼 수 있었으며, 내포되어 있는 마력이 많을수록 기록 시간 또한 길었다. 그래서 돈이 썩어 나는 일부 귀족들은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 종종 고품질의 영상석을 가지고 다니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