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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제발 좀 망하세요 (128)화 (128/130)

128화

라이오넬의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그의 얼굴을 보면 또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다.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손을 겹쳐 그의 코 위에 올려 두었다. 이목구비를 가려 봐도 손 틈새로 잘생김이 삐져나왔지만, 말문이 막힐 정도는 아니었다.

“같이 있을수록 불안해진다면서요. 그러니까 잠깐만 떨어져 있어요.”

라이오넬이 내 손을 끌어 내렸다. 천천히 확장된 검은 동공과 붉은 안광이 드러났다.

나는 화들짝 놀라 화장수를 흡수시키듯 그의 볼을 챱챱 두드렸다.

“라이오넬 눈빛! 눈빛!”

그가 긴 숨을 내쉬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긴 그가 몸을 돌려 나를 등졌다.

나는 라이오넬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가 내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쳤다.

“한 달은 너무 길어. 3일,”

“주실 건 아니죠? 에이. 설마.”

나는 문득 드는 기시감에 재빨리 뒷말을 이었다.

“3일이면 아무 데도 못 가요.”

“휴가면,”

“쉬기만 하면 되지 꼭 어딜 가야 하냐고요? 성에서 쉬라고요? 다들 일하는데 저만 놀면 미안하잖아요.”

“……내 생각을 읽는 것 같군.”

“죽기 전에도 똑같은 대화를 했었어요.”

라이오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그의 등에 볼을 기댔다.

단단한 근육과 갈비뼈 밑으로 심장이 거세게 뛰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뭔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가면, 돌아온다고 장담할 수 있나?”

설마 그때 라이오넬도 두려웠던 걸까?

“당연하죠.”

대답하고 그의 답을 기다렸다. 라이오넬은 잠시 침묵하다가 내 손을 끌어 제 얼굴을 묻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내가 죽기 전에 라이오넬에게 들었던 말과 같은 억양, 같은 목소리였다. 그런데 나를 의심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가면, 돌아온다고 장담할 수 있나?”

이제야 알겠다. 저건 무서워서 한 말이었어. 내가 나가서 다신 돌아오지 못할까 봐.

그의 말에 생략된 ‘무사히’라는 부사가 들리는 듯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데본더스는 이제 없잖아요!”

“그런 사람이 또 없을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지?”

라이오넬이 손을 내렸다. 온기가 사라진 자리에 차가운 공기가 달라붙었다. 라이오넬의 눈동자에 분노가 깃들었다.

“로만이 그대를 죽이려다가 실패한 이후로 수많은 암살자가 드나들었어. 그중에 데본더스가 보내지 않은 놈도 끼어 있었을 수 있지.”

“……저는 전혀 몰랐어요.”

나를 암살하려고 했다니. 혹시 전생에서도 이랬던 걸까?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해서 라이오넬이…….

“넬리.”

낮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생각을 끊어 냈다.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그대도 나를 불안하게 해.”

“제가요?”

“그래. 지금도. 나를 앞에 두고 누굴 생각하는 거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네요.”

나는 라이오넬의 팔뚝을 강하게 붙잡았다.

“라이오넬은 제가 죽었을 때의 라이오넬과는 다른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서론을 장황하게 늘어놓나, 싶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 라이오넬은 저를 잃은 라이오넬이고, 라이오넬은 저를 지켜 낸 라이오넬이잖아요.”

양심이 쿡 찔렸다. 회귀 전 라이오넬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내 라이오넬을 지켜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

눈빛에 강한 신뢰를 담아 또렷이 올려다보자 그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그러니까 자신을 믿고 저를 믿어요. 한 달간 떨어져도 아무 일 없을 거예요.”

“믿을 테니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돼.”

“아니요. 그냥 생각만 하는 거랑 경험하는 거랑 다르잖아요.”

“하지만…….”

“불안하면 저를 믿어요! 제가 증명해 보일게요. 이제 우리한테 위험은 없다는 걸.”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그러자 라이오넬이 긴장이 풀린 사람처럼 웃음을 흘렸다.

“용감하고 멋진 고슴도치 같군.”

“고슴도치에 비유하는 게 문제라니까요!”

장난스럽게 노려보자 그가 웃음을 터트리며 내 어깨 위로 이마를 툭 떨궜다.

“그래도 역시 한 달은 길어.”

“타협은 없어요. 한 달!”

“…….”

“한 달!”

“……대신 매일 편지하도록 해. 내가 두렵지 않도록.”

“그 정도야 쉽죠. 이동하는 도중에는 편지하기 힘드니까 도착해서부터 쓸게요.”

나는 라이오넬이 좋아하는, 멋진 다람쥐인지 고슴도치인지 하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나만 믿어요! 한 달, 잘 버틸 수 있어요.”

* * *

대대적인 인사이동과 행정관들의 인수인계가 끝나는 날, 나는 휴가를 떠나기로 했다.

라이오넬과 떨어지는 것은 아쉬웠으나 사실 조금 들뜨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데 라이오넬의 왼쪽 눈썹이 까딱이는 게 보였다.

“아주 신이 났군.”

“네!”

회귀하기 전까지 합치면 장장 4년이다. 회귀 전 3년은 죽을 둥 살 둥 일하느라, 회귀 후 1년은 복수에 실패하느라 바빴다.

여행이나 휴가는커녕 제대로 쉬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신나지 않을 리가!

“다음에 꼭 같이 여행 가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불안해 보였다.

나는 최대한 간소하게 꾸린 짐을 꽈당이의 등에 실었다. 그리고 라이오넬의 얼굴을 끌어 내리고 발꿈치를 들어 볼에 입을 맞췄다.

“그럼 다녀올게요!”

꽈당이에게 올라타려는데 멀리서 누군가가 흙먼지를 꼬리처럼 달고 무섭게 뛰어왔다.

리지는 내게 돌진하다가 아레트에게 덜미를 잡혔다. 하지만 멈추지 않고 팔을 휘저으며 나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리지를 다독이고 안아 주었다.

“넬리 님! 흐어엉, 가지 마세요!”

“나 완전히 떠나는 거 아니야. 한 달만 있다가 올 거야.”

“안 돼요. 못 보내요! 예전에도 떠나실 거라고 했잖아요!”

라이오넬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거람!’

그를 향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데 리지가 내 허리에 매달렸다.

“저도 데려가세요! 폐 안 끼칠게요!”

사실 불안 증세가 심한 건 라이오넬이 아니라 리지가 아닐까?

나는 리지가 왜 이렇게 된 걸까 싶어 착잡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 그러다 목을 가다듬고 그녀를 달랬다.

“리지는 일해야지.”

“그렇지만, 그, 그렇지만.”

“다녀올게.”

인사하자 라이오넬이 리지를 떼어 놨다. 차마 라이오넬의 손길을 뿌리칠 순 없는지 그녀가 울먹이는 얼굴로 순순히 물러났다.

나는 눈짓으로 뒤에 서 있는 집사님, 레반스, 아레트와 인사했다.

그러고 꽈당이 위에 올라탔다. 라이오넬이 말을 끌고 내 옆으로 왔다.

“배웅해 줄게.”

고개를 끄덕이고 라이오넬과 나란히 걸었다. 처음에는 성문까지만 배웅할 줄 알았는데 기어이 도개교를 넘었다.

이대로 두면 영지 외벽까지 쫓아올 기세라 다리를 건너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배웅은 여기까지만 해 주세요.”

라이오넬이 아쉬운 표정으로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손을 뻗기에 자연스럽게 내 손을 내주었다.

그는 복잡한 눈으로 내 손을 내려다보며 한참이나 매만지더니 약지 마디 주름에 입을 맞췄다.

“조심해서 다녀와. 편지하겠다는 약속 잊지 말고.”

“걱정하지 마세요!”

라이오넬에게 손을 흔들고 마을로 들어섰다. 어떻게 알았는지 많은 사람이 배웅을 나와 있었다.

“넬리 님! 가다가 출출하면 요기라도 하세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흑, 제 아들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영영 떠나는 거 아닌데요? 이렇게 성대하게 배웅해 주시면 돌아오지 말아야 할 것 같잖아요. 물론 돌아올 거지만!

인사를 일일이 받아 주며 외벽까지 겨우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는 소피, 톰, 제럴드가 있었다.

“넬리 님. 저희가 호위하겠습니다.”

소피가 앞장서서 나섰다.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서도 괜찮아요.”

나는 가지 않으려는 그들의 등을 떠밀었지만 밀려나 주지 않았다.

굳이 근처 대도시까지는 같이 가게 해 달라고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함께 뎀스로 왔다.

“넬리 님. 정말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숙소도 안전한 곳에 잡았는데 세 사람은 물가에 어린아이를 내놓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괜찮아요! 제가 애도 아니고,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도 변방에서 수도까지 혼자 올라온 몸이다. 그것도 무일푼으로!

물론 운이 좋았지만 어떻게 해야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지 정도는 안다.

“그것보다, 라이오넬에게 아무것도 말해 주면 안 돼요. 제가 편지로 다 써서 보낼 거니까, 막 추궁하듯이 물어봐도 알려 주지 않기로 해요. 약속!”

손가락을 내밀자 소피가 대표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옆에 있던 톰과 제럴드가 꼭 돌아와야 한다느니, 도망치면 안 된다느니, 사라지면 땅끝까지 쫓아갈 거라느니 하는 말을 연신 늘어놓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지 사람들이 다 라이오넬처럼 되어 있었나 보다.

‘역시 한 달 동안 휴가를 달라고 하길 잘한 것 같아.’

이러고 무사히 돌아가면 다른 사람들도 더는 불안해하지 않겠지!

“다들 조심히 돌아가세요.”

패잔병처럼 어깨를 늘어트리고 돌아가는 세 사람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뎀스에서 하룻밤을 묵고 바로 출발 준비를 했다.

꽈당이가 씩씩하고 용감한 당나귀지만 먼 길을 가는 내내 나를 지켜 주긴 힘들다는 것을 안다. 산짐승은 내쫓는다고 해도 산적은 내쫓지 못할 테니까.

혼자 다녔을 때 쓰던 방법대로 믿을 만한 상단에 꼽사리 껴 가기로 했다.

아무것도 없을 때는 울고 빌고 허드렛일까지 하면서 따라갔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넬리 페퍼 남작님? 당연히 동행해 드려야죠! 이렇게 소문의 남작님을 만나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신분 패와 돈과 소문. 이 셋의 상승효과는 엄청났다.

나는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무사히 수도 근처에 있는 내 꿈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소문의 인사’ 소리 듣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그렇지, 꽈당아?”

꽈당이가 귀를 팔랑거렸다. 대충 그렇다는 뜻으로 여기기로 했다.

나는 꽈당이의 갈기를 쓰다듬고 고삐를 풀어 주었다.

“멀리 가면 안 돼. 알겠지?”

“푸르릉.”

풀을 뜯는 꽈당이를 지켜보다가 안으로 들어왔다.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데 관리가 제법 잘 되어 있었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몸을 젖은 빨래처럼 널어놓았다.

“낯선 천장이다.”

실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다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맞다. 라이오넬한테 편지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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